<美국무부 비밀문서 단독입수> 백선엽, 516직후 박정희 ‘빨갱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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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선엽 전 육군참모총장이 1949년 숙군당시 박정희의 목숨을 구해줬다는 주장과는 달리 5.16 직후 박정희와 혁명주체세력을 빨갱이로 의심, 미국 측에 이들의 사상을 조사해야 한다고 주장한 미 국무부 비밀문서가 밝혀져 충격을 주고 있다.
또 당시 주 대만한국대사였던 백선엽은 5.16 직후 프랑스대사로 발령이 나자 군사정부가 자신을 체포할 것을 우려해 부임 전 업무협의를 위해 귀국하라고 명령을 거부할 것이라는 입장을 미국 측에 은밀히 전달했던 것으로 확인돼 박정희와의 갈등의 골이 상당히 깊었던 것으로 드러났다.
미 국무부가 최근 공개한 비밀전문에 따르면 에버렛 드럼라이트 주 중화민국 미국대사는 5.16 쿠데타발생 8일 뒤인 1961년 5월 24일 미 국무부에 백선엽 주 중화민국 한국대사와의 면담내용을 담은 비밀전문을 <선데이저널>이 입수해 공개한다.
박우진(취재부기자)

이 전문의 발신일시는 1961년 5월 24일 오후 4시, 미 국무부 수신일시는 1961년 5월 24일 오전 7시 23분이며 이 시간은 국무부가 워싱턴DC에 소재함을 감안하면 미 동부시간으로 추정된다.
2페이지의 이 비밀전문에서 드럼라이트 대사는 어제[5월 23일] 주 중화민국 한국대사인 백선엽 대사를 만나 한국 쿠데타에 대해 장시간 대화를 했다며 백선엽은 쿠데타이후 서울로 부터 단 한통의 전문을 받았을 뿐이며 그 전문은 쿠데타지도자가 케네디대통령에게 보낸 메시지와 비슷한 것으로 장개석 총통에게 보내는 메시지라고 말한 것으로 기록돼 있다.
미국은 한국에서 쿠데타가 발생하자 주한미국대사관을 비롯한 미국의 재외공관에 쿠데타 지도자인 박정희장군이 누구인지 파악하라는 지시를 내렸으며 이에 따라 주 중화민국 미국대사가 박정희 장군의 군 선배격인 전 육군참모총장 백선엽 주 중화민국 한국대사를 만났던 것으로 보인다.

박정희에 대한 경계심과 의구심

백선엽은 이날 미국대사에게 자신이 쿠데타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은 신문에 보도된 정도로 제한적이라고 말했고 미국대사는 주한미국대사관이 국무부에 보고한 쿠데타 진전 상황에 대해 백선엽에게 설명했다.
백선엽은 자신이 박정희에 대해 아는 것은 의례적인 것뿐이라며 박정희는 여순반란사건이 발발했을 때 육군본부 작전참모부[G-3]에 근무 중이었으며 송요찬 사령관이 반란진압을 위해 광주로 갈 때 동행했다고 밝혔다.
백선엽은 자세한 내용은 명확하지 않지만 여순반란사건직후 박정희는 군법회의에 회부돼 수감됐고 여순반란사건을 주도한 공산주의자간첩단에 ‘중간 수준’ [MIDDLE-LEVEL]으로 가담한 사실이 발각됐다고 말했다.

백선엽은 자신은 박정희의 재판을 관할한 군법회의의 멤버가 아니었다며 자신은 박정희가 어떻게 한국육군에 복직했는지 상세한 내용은 잘 모르며 그저 박정희의 경력정도만 안다고 밝혔다.
백선엽이 미국대사에게 건넨 말 중 참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은 바로 이 대목이다. 백선엽은 육본 정보국장으로서 자신의 말마따나 1948년부터 1949년까지 숙군작업을 주도했으며 박정희가 좌익혐의로 사형판결까지 받았으나 자신이 육군수뇌부와 미군수뇌부를 설득, 형집행정지 결심을 얻어내 석방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백선엽의 최근 주장대로라면 박정희의 좌익 혐의에 대해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사람이 바로 자신이지만 1961년 미국 측에는 자세히 모르는 것처럼 말한 것이다.
백선엽이 1949년 박정희를 석방한 뒤 12년이 지난 1961년 다시 미국 측에 박정희의 사상이 의심된다며 의혹을 제기한 것은 1949년 박정희 석방이 잘못됐으며 1961년에도 문제 소지가 있다는 주장인지 백선엽이 직접 밝혀야 할 것이다.

▲  5.16 직후 중화민국 주재 미국대사가 백선엽 대사를 만나 대화한 내용을 본국에 보고한 ‘비밀전문’의 첫 장. ⓒ2014 Sundayjournalusa

朴-北, 특급 커넥션 가능성 주장

 

또 백선엽이 박정희를 문관으로 채용하도록 한 것은 물론 6.25가 발발하자 육군에 복직되도록 강력히 추천했다고 알려져 있지만 미국 측에는 이 같은 사실을 전면부인하고 자신은 복직과정을 잘 모른다고 주장한 것도 의문이 아닐 수 없다. 백선엽의 기회주의적 행동 또는 기존 그의 주장이 사실이 아닐 가능성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이 전문에서 백선엽은 박정희가 이승만 정권에 대한 학생운동이 발생했을 때 [3.15부정선거반대 4.19혁명을 의미] 부산의 군 사령관이었고 대구출신이며 대구는 예전에 좌익과 공산주의자들의 온상이었다고 말했다.

백선엽은 박정희는 강직하고 청렴하다는 평판을 얻고 있으며 자신이 보기에는 박정희가 혁명의 발화점이라고 믿고 있다고 말했다. 백선엽은 박정희가 비밀리에 공산주의자들과 커넥션을 계속 유지하고 있는 지는 판단할 수 없지만 이 같은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으며 미국정부가 이를 염두에 둬야 한다고 믿는 것처럼 보였다고 미국대사는 기록하고 있다.
백선엽은 또 쿠데타는 실질적 영향력을 행사한 젊은 장교들이 가담하고 있고 이 젊은 장교들 중 일부는 아마도 공산주의자들과 연계돼 있다고 믿고 있었다. 특히 백선엽은 미국대사에게 미국정부가 이들의 백그라운드를 조심스럽게 조사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으로 드러났다.

▲  에버렛 드럼라이트 주중화민국미국대사는 5.16 쿠데타 발생 보름여가 지난 1961년 6월 2일 미국무부에 백선엽과의 면담내용을 담은 비밀전문을 보냈다.  이 전문의 발신일시는 1961년 6월 2일 오후 5시, 미 국무부 수신일시는 1961년 6월 2일 오전 9시 41분이며 이 시간은 국무부가 워싱턴DC에 소재함음을 감안하면 미 동부시간으로 추정된다 2페이지의 이 비밀전문에서 미국대사는 백선엽이 프랑스 대사로 발령이 났다고 자신에게 말했다며 이에 대한 백선엽의 견해를 정리했다. 백선엽은 프랑스대사로 발령받았으며 이는 새 정부에 대해 공개적 지지를 하지 않음으로써 새 정부를 실망시킨데 따른 조치라고 밝혔다. ⓒ2014 Sundayjournalusa

 

백선엽은 군사정부는 쉽게 권력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고 정치적, 개인적 자유는 앞으로 오랜 기간동안 심각하게 축소될 것이라며 미국정부가 방향을 바꾸게 하지 않거나 혁명적 모멘텀을 중단시킬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회의적인 견해를 표명한 것으로 돼 있다. 즉 미국정부가 나서더라도 군사정부의 도래한 현실을 되돌릴 수는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박정희 살려준 백선엽은 이중인격자

백선엽은 또 당시 참모총장인 장도영에 대해 영리하고 능력도 있지만 때때로 용기와 결단력이 부족하다고 평가하고 따라서 장도영이 혁명을 이끌거나 컨트롤하거나 또 쿠데타그룹을 장악할 수 있을 지 의심스럽다고 밝혔다.
백선엽은 쿠데타지도자가 강력한 지도력을 행사하지 못하고 쿠데타세력 내에서 내분이 발생, 서로 싸우게 된다면 심각한 위험이 닥칠 것이라고 경고하고 문민정부는 심각한 타격을 입었고 군사혁명을 통제할 문민지도자는 없다고 털어놓기도 했다.

백선엽은 김홍일장군은 애국적이고 철저한 공산주의자이기는 하지만 지력과 통찰력이 부족하다고 평가했고 미국대사도 이 같은 평가에 동의했다고 전문은 기록하고 있다.
미국대사는 마지막부분에 코멘트를 통해 중화민국정부[GRC]는 한국쿠데타에 지대한 관심을 갖고 사태를 예의주시하고 있으며 장면정부가 한국의 정치적 경제적 문제에 적절히 대처하지 못했기 때문에 강력한 정부의 출범을 반기기는 하지만 혹시라도 공산주의자들이 한국을 전복할 길을 열어주게 될까봐 우려하고 있다고 밝혔다. 미국대사는 또 중화민국정부 및 백선엽대사와 긴밀히 연락해 사태를 파악하겠다고 덧붙였다.

이 전문을 살펴보면 백선엽이 미국대사에서 말한 내용 중 여러 부분에서 진실성이 의심된다. 1948년부터 1949년까지의 숙군과정에서 좌익행위가 발각된 박정희를 자신과 장도영 등이 나서서 미 군사고문단 등에 사면을 건의, 목숨을 살려줬다는 것이 백선엽 자신의 최근 주장일 뿐 아니라 역사적으로도 어느 정도 사실로 인정된 부분이다. 그러나 정작 백선엽은 5.16혁명직후 미국이 이를 진압하느냐 마느냐 하는 결정적 순간에 ‘나는 박정희 숙군과정과 사면, 복직과정에 대해 잘 모른다’고 오리발을 내밀고 박정희 등 혁명주체세력이 공산당과 연결됐을 가능성이 있다며 이들의 사상적 백그라운드에 대해 미국이 조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지극히 이중적인 행동이다. 그렇지 않다면 백선엽은 실제로 박정희를 빨갱이로 의심하면서도 숙군과정에서 살려준 셈이 된다.
백선엽이 미국에 털어놓은 내용은 이뿐만이 아니다. 아마도 백선엽은 자신이 미국 측에 말한 내용은 영원히 비밀이 지켜질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래서 속마음을 내뱉은 것이다.

▲ 박정희와 백선엽 1군사령관으로 부임한 백선엽 대장(왼쪽)이 5사단장으로 부임한 박정희 준장(왼쪽 세번째) 등 예하 사단장의 보직신고를 받는 장면.

신변위협 귀국거부 8년 해외생활

백선엽은 5.16 쿠데타 박생 8일 뒤인 1961년 5월 24일 주중화민국 미국대사를 만난데 이어 쿠데타발생 약 16일 뒤인 6월 2일 다시 미국대사와 만났음이 미 국무부 비밀전문을 통해 드러난다. 이날 그는 자신이 미국대사로 발령 났음을 알린 뒤 중대한 결심을 털어놓은 것으로 확인됐다. 그야말로 깜짝 놀랄 정도의 내용이었다.

백선엽은 이날 미국대사에게 프랑스대사로 발령이 났지만 군사정부가 자신을 체포할 것을 우려, 만약 프랑스 부임 전 업무협의를 위해 귀국하라고 명령한다면 거부할 것이라고 말한 것으로 확인됐다. 5.16 직후 미국대사에게 박정희 등 혁명주체세력의 사상을 의심한데 이어 프랑스대사로 발령이 났음에도 다시 한번 이들의 사상을 의심한 것이다.

에버렛 드럼라이트 주 중화민국 미국대사는 5.16 쿠데타 발생 보름여가 지난 1961년 6월 2일 미국무부에 백선엽과의 면담내용을 담은 비밀전문을 보냈다.  이 전문의 발신일시는 1961년 6월 2일 오후 5시, 미 국무부 수신일시는 1961년 6월 2일 오전 9시 41분이며 이 시간은 국무부가 워싱턴DC에 소재함을 감안하면 미 동부시간으로 추정된다.

2페이지의 이 비밀전문에서 미국대사는 백선엽이 프랑스 대사로 발령이 났다고 자신에게 말했다며 이에 대한 백선엽의 견해를 정리했다. 백선엽은 프랑스대사로 발령받았으며 이는 새 정부에 대해 공개적 지지를 하지 않음으로써 새 정부를 실망시킨데 따른 조치라고 밝혔다. 프랑스 대사 발령을 좌천으로 생각한 것이다. 즉 중화민국정부를 설득해 군사정부지지성명을 발표하라는 명령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했기 때문에 좌천됐다는 것이다.

▲ 미국대사는 코멘트를 통해 백선엽이 아직도 한국내 광범위한 서클을 가지고 있으며 군부내에도 어느정도 영향력이 있다고 평가된다며 군사정부가 백선엽을 조정하거나 또는 중립화시키려 할 가능성이 있다고 밝혔다. 미국대사는 또 이러한 가능성때문에 상황이 명확해 질때 까지는 한국에 돌아가지 말라고 자신이 백대사에게 권유했다고 적고 있다. ⓒ2014 Sundayjournalusa

박정희, 백선엽 군부 내 영향력 경계

 

백선엽은 군사정부가 백선엽이 한국의 상황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도록 하기 위해 한국에서 멀리 떨어진 프랑스로 그를 보낸 것이라고 미국대사에게 말했다. 한마디로 자신을 귀양 보냈다는 것이다. 백선엽의 말대로 백선엽은 유일하게 육군참모총장을 두 번이나 역임한 인물이며 특히 1957년부터 1959년까지 총장이었기 때문에 군부 내 영향력이 남아 있었을 가능성이 컸다. 박정희 등 혁명주체세력도 이 같은 상황을 고려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특히 백선엽은 프랑스대사 지명을 수락할 것이라고 통보했으나 만일 업무협의를 위해 한국에 먼저 들어 왔다가 프랑스로 가라고 명령한다면 자신은 체포될 것을 우려하기 때문에 귀국을 거부할 것이라고 밝힌 것으로 드러났다.  백선엽이 쿠데타세력을 극도로 불신하고 있음을 알 수 대목이다.

백선엽은 또 그가 정부와의 모든 관계를 끊어버린다면 자신은 일본이나 미국으로 가서 공부를 하거나 또는 도저히 새 정부의 향후 진로에 동의하지 못할 정도라면 새 정부에 대한 반대활동을 준비하겠다고 말했다. 박정희에 대항하는 반정부활동도 서슴지 않을 것이라는 엄포였다. 백선엽은 어제 뉴욕헤럴드트리분의 클라크특파원과의 장시간 대화를 통해 군사정부가 실질적으로 청년장교에 의해 움직인다는 사실을 더욱 확신하게 됐다고 전했다.
또 박정희를 제외한다면 노년장교들은 없으며 이른바 영턱스들이 계엄령에 의해 통제를 연장시키려 할 것이며 이들 청년장교들은 반미 성향을 숨기고 있기 때문에 장래는 예측불허라고 밝혔다. 청년장교들은 반미성향이지만 지금을 그 같은 사실을 숨기고 있다고 단정한 것이다.

군사정부 좌익 반미경향 예의주시 경고

백선엽은 시니어장교들과 주니어장교들 간의 다툼은 1959년으로 거슬러 올라가며 1960년 선거 때 이승만이 부통령 이기붕에 대한 군부의 지지를 요청하자 군 기강이 눈에 띄게 흔들리기 시작했다고 설명했다. 그 뒤 15명의 청년장교들이 공개적으로 육군참모총장의 권위에 도전하면서 사태는 더욱 확산됐고 군법회의가 15명의 장교들의 옷을 벗김으로써 주사위는 이미 던져졌으며 또 매그루더장군이 엄격한 군법적용을 요청하면서 개입함으로써 청년장교들 사이에 반미감정이 더욱 커지게 됐다고 밝혔다.
이는 김종필 등 육사 8기생들의 1960년 5월 육군참모총장 퇴진요구 등 정군운동, 1960년 9월의 이른바 ‘16인 하극상’사건을 설명한 것으로 당시 매그루더 유엔군사령관은 이들에 대한 엄격한 처벌을 요구했던 것은 사실이다.

 ▲ 백선엽 회고록 <군과 나> 표지.

백선엽은 청년장교 15명의 명단은 가지고 있지 않으나 이들 15명이 쿠데타에 주동적으로 가담했음이 틀림없다고 말했다. 백선엽은 아직도 상황이 폭발위험성이 높고 미국의 입장은 미묘하면서도 위험한 상황이라며 장도영이나 김홍일은 우두머리가 아니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백선엽은 미국은 군사정부내의 최근의 반미경향을 주의 깊게 관찰해야 하며 군사정부가 공산주의자로 흐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고 말했다, 다시한번 쿠데타세력의 사상을 의심한 것이다. 미국대사는 코멘트를 통해 백선엽이 아직도 한국내 광범위한 서클을 가지고 있으며 군부 내에도 어느 정도 영향력이 있다고 평가된다며 군사정부가 백선엽을 조정하거나 또는 중립화시키려 할 가능성이 있다고 밝혔다. 미국대사는 또 이러한 가능성 때문에 상황이 명확해 질 때 까지는 한국에 돌아가지 말라고 자신이 백 대사에게 권유했다고 적고 있다.
백선엽의 이 같은 행동은 자신의 회고록뿐 아니라 최근 중앙일보 등에 약 2년간 연재된 회고록내용과도 일부 배치된다. 그는 박정희가 남로당 군사총책이었지만 실제로 활동한 적이 없었기 때문에 자신이 앞장서 사형판결을 받은 박정희를 형집행정지로 구해냈다고 밝혔고 청년장교들의 사상을 의심했다는 내용은 전혀 없었다.

백-박, 그들의 물고 물리는 갈등의 골

백선엽의 속마음을 박정희가 알아챘기 때문인지 백선엽은 오랫동안 국내로 돌아오지 못했다. 백선엽은 1961년 프랑스대사로 발령이 나서 1965년까지 파리에서 생활한 뒤 곧바로 캐나다대사로 부임, 1969년까지 캐다나 대사로 활동했다. 5.16혁명직후 8년간 해외로만 돈 것이다. 이는 백선엽이 박정희를 의심한 만큼 박정희 또한 자신의 과거를 알고 있는 백선엽을 경계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백선엽은 1969년이 돼서야 제19대 교통부장관에 취임, 2년간 일한 뒤 충주비료, 호남비료 등 국영기업체 사장을 두루 역임했다. 8년간의 깊은 의심 끝에 잠시 장관이 됐다가 그 뒤부터는 공직이 아닌 국영기업체로 밀려난 것이다.

자신 외에는 아무도 모를 것 같았던 행동들, 그러나 이 같은 행동은 낱낱이 기록돼 문서로 남아 있으며 이 문서는 당사자들이 이 세상에서 사라진 뒤에도 아주 오랫동안, 어쩌면 영원히 그의 행적을 증언하고 있다. 이같은 문서가 5.16혁명이후 박정희 집권기간 동안 그가 왜 해외로만 돌다가 장관을 지낸 뒤 다시 국영기업체 사장을 전전했는지 그 단초를 보여주는 것이다.
1920년생인 백선엽, 올해 나이 95세이다. 그는 육영사업을 한다며 그의 동생인 백인엽장군과 함께 선인학원을 세웠으나 엄청난 비리로 점철됐음은 잘 알려진 일이다. 백세를 바라보는 백선엽은 이제 무엇이 진실인지 솔직하게 고백하고 그간의 잘못이 있다면 이에 대해 용서를 구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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