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춘의 난(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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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임춘훈(언론인)

조금은 성급하고 약간은 방정맞은 말 같지만, 박근혜 대통령은 이미 현재완료진행형의 레임덕에 빠져들고 있는 것 같습니다. 역대 어느 대통령보다 빠른 치명적 권력 누수와 민심 이반(離反)이, “망건 쓰자 파장” 꼴로, 취임 16개월 밖에 안 된 대통령의 발목을 잡고 있습니다.
지난 5월 안대희의 총리후보 자진사퇴에 이어, 지난 주 새로 총리에 지명된 보수 논객 문창극의 운명도 이미 “대문 밖 저승” 신세입니다. 3년 전 기독교 장로자격으로 어떤 교회에서 행한 강연내용이 ‘친일-막말 논란’에 휩싸이면서, 그의 자진사퇴를 촉구하는 목소리가 야당과 일부 종교계, 좌파시민단체 등을 중심으로 들불처럼 번져 나가고 있습니다. 새 총리 임명 때마다 이렇게 온 나라가 몇 달 씩 ‘청문회 열병’을 앓는 나라는 아마도 지구상에 대한민국 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국력낭비가 장난이 아닙니다.
지난 주 7개 부처 장관을 교체한 2기 내각 출범과, 5명의 수석비서관을 교체한 3차 청와대 인사 개편을 바라보는 민심에선, 실망을 넘어 격앙된 분위기까지 느껴집니다. 여론조사(리얼미터)에서 박 대통령 지지율은 취임 후 최저인 49%, 서울에선 39%까지 떨어졌습니다. 민심의 바로미터가 되는 서울에서의 30%대 지지율은, 레임덕이 이미 회생불능 국면으로까지 내닫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김기춘이라는 ‘계륵’

이번 인사개편은 세월호 참사로 상심해 있던 국민의 마음을 어루만져 주면서, 정부의 파천황(破天荒)적 변화로 현재의 국가적 위난을 극복해 나가겠다는 대통령의 굳은 의지가 담겼어야 했습니다. 헌데 청와대 새 보좌진은 이와는 무관하게 충성스런 친박계 정치인 일색으로 채워졌고, 내각은 누리꾼 용어로 어리어리한 ‘듣보잡’들로 꾸며졌습니다. 
대통령이 모처럼 ‘수첩’ 밖에서 찾아 낸 인재라는 문창극은 “헌정사상 최악의 총리 후보”라는 야당의 비난 속에, 청문회 자리엔 서보지도 못하고 쫓겨날 판국입니다.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나 총리가 된다 해도, 그가 시대정신에 부합하는 화합형 총리가 되기는 어렵다는 관측이 지배적입니다.
박근혜 대통령의 사람 쓰는 솜씨는 갈수록 태산입니다. 평정심을 잃은 건지, 6.4 지방선거에서 국민의 재신임을 받은 것으로 착각하고 오기를 부리는 건지, 가늠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인사 난맥의 중심엔 비서실장 김기춘이 있습니다. “김기춘의 교체 없는 인적쇄신은 하나마나”라는 게 민심이지만, 대통령은 “김기춘이 포함된 인적쇄신은 절대 불가”라고 어깃장을 놓고 있습니다. 김기춘에 대한 대통령의 정서적 의존도가 날로 커지고, 그럴수록 그의 국정 전횡(專橫)이 전방위적으로 노골화 되는 악순환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이번 내각과 청와대 개편 역시 임명 과정에서부터 김 실장의 입김이 작용해 충성심 강한 ‘김기춘 킷즈’들로 채워졌다고 보는 시각이 지배적입니다.

민심은 김기춘을 떠났다

박근혜 대통령은 40% 정도 되는 고정지지층을 갖고 있습니다. 그가 취임 이래 줄곧 50~60%대의 높은 지지도를 확보할 수 있었던 건 40%의 ‘철벽 지지층’에다 남북관계와 외교에서 얻은 10~20%의 ‘추가 가산점’이 합쳐졌기 때문입니다. 국내문제만 떼놓고 보면, 지지도는 늘 40% 이하였습니다. 내정실패의 최대 원인은 인사였고, 인사실패의 중심엔 청와대 인사위원장을 겸하고 있는 김기춘 비서실장의 존재가 똬리를 틀고 있습니다.
박근혜식 인사정책의 문제점은 지역편중, 직업 및 경력편중, 그리고 이념편중입니다. 부산-경남 출신, 검찰-관료-교수 출신, 그리고 극우보수 성향이 강한 이념적 강골(强骨)들을 선호했습니다. 이렇게 뽑다 보니 PK(부산-경남)출신이 국가서열 상위 10개 중 7개를 싹쓸이 하는 기이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인사에서 철저히 소외되고 있는 호남에서 박 대통령의 인기는 거의 전두환 수준입니다.
6.4 지방선거에서 여당은 충청지역 4개 광역단체장 자리를 모두 야당에 내줬습니다. 보수성향이 강한 충청에서, 어머니인 육영수 여사의 출신지인 충북에서마저 패배하자, 박 대통령은 충격을 받았습니다. 김기춘 실장이 천거한 문창극 총리 카드를 대통령이 덥석 받아들인 건 바로 문창극이 충청 출신인 점이 고려됐습니다. 지역 안배라면 충청보다는 호남을 택해야 옳았습니다.

문창극 문제, 여권 내 파워게임으로

박근혜 대통령은 이른바 ‘혼밥족’입니다. 저녁식사를 대개 관저에서 혼자 하기 때문에, 요즘 대학가의 신풍속으로 자리 잡았다는 ‘혼자 밥 먹는 사람’, 즉 혼밥족이 됐습니다. 혼자 밥을 먹는 대통령 곁에는 청와대의 퍼스트 독인 두 마리의 진돗개, 즉 암컷 새롬이와 수컷 희망이가 앉아 재롱을 떱니다.
어떤 전직 대통령은 청와대 관저생활을 적막강산(寂莫江山)에 비유했습니다. 배우자와 자녀가 없는 미혼여성인 박 대통령의 청와대 관저 생활이야말로 ‘적막속의 절대고독’, 그 자체가 아닐까 싶습니다. 아버지인 박정희 대통령 비서출신이면서 나이도 큰오라비벌로 지긋한 김기춘 비서실장과 박 대통령이 상호의존적 순망치한(脣亡齒寒)의 관계로 엮어지게 된 배경은 이해 할만도 합니다.
박근혜 대통령은 과거 어느 대통령보다 강력한 야당, 강력한 좌파연합세력의 도전을 받고 있습니다. 사흘이 머다 하고 벌어지는 각종 촛불집회에선 대통령 사퇴 구호가 단골로 등장하고, 시위 끝머리엔 “청와대로 가자”는 함성과 함께 시위대가 효자동 쪽을 향하는 게 유행(?)처럼 돼 버렸습니다. 극렬 아스팔트 좌파 운동꾼들은 한 세기 전 왜놈 낭인들이 “명성황후 잡으러 경복궁으로 가자!”를 외쳤듯, 시도 때도 없이 “청와대로 가자!”를 외쳐댑니다. 청와대 처 들어가 대통령을 시해라도 하겠다는 걸까요? 나라의 기강이 말이 아닙니다.
공안검사 출신의 김기춘은 청와대 비서관, 안기부 대공수사국장, 검찰총장, 장관 등의 화려한 공직경력의 소유자입니다. 정치적 사건이 벌어질 때마다 시위대가 청와대를 향해 진격(?)해 들어오는 성경 묵시록 같은 어지러운 정치풍토에서, 홀홀단신의 여성대통령이 김 실장 같은 충직스럽고 강력한 카리스마의 책사를 옆에서 내치긴 쉽지 않을 겁니다.
문창극 파문이 여권 내의 권력투쟁 양상으로 번지고 있습니다. 다음 달 새누리당 전당대회에서 당권에 도전하는 서청원, 김무성, 이인제 세 중진의원이 문 지명자의 자진사퇴를 요구하고 나섰습니다. 친박 좌장으로 박근혜의 복심(腹心)이라는 서청원이 문창극 사퇴의 총대를 메고 나선 건 박 대통령에겐 특히 아픈 대목입니다. 여당의 문창극에 대한 비토는 결국 청와대 2인자 김기춘에 대한 비토입니다. 곧 해외순방에서 귀국하는 박 대통령이 어떤 선택을 할지 주목됩니다. 이번엔 아마도 김기춘의 손을 일방적으로 들어주기가 쉽지 않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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