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훈특집 냉대받는 6·25 참전 화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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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전은 인정하지만…’

외국인이라서 유공자 인정이 안된다고?

6·25 한국전쟁 당시 대한민국 국군 1사단 15연대 소속으로 참전했던 화교(국내에 살던 중국계) 출신 이수해(86)씨는 본보 기자에게 지난 2007년 6월 25일자로 국가보훈처로부터 받은 한 통의 공문서를 보여 주었다. <귀하께서는 중국인으로서 6·25전쟁에 참전한 경우로 ‘참전유공자예우에 관한 법률’에 의한 참전 유공자 등록 대상이 아님을 알려드리니 이점 이해하시기 바랍니다>. 이 일이 있기 6개월 전 LA 만리장성에서 한인 6·25참전용사들이 이수해 씨의 처지를 안타깝게 여겨 ‘중국계 화교로서 6·25 전쟁에 참전해 혁혁한 공로를 세운 이수해 씨를 참전유공자로 예우 해달라’ 고 기자회견을 하고 한국정부에 청원했는데, 돌아온 한국정부의 답변은 ‘외국인이기에 안된다’ 였다. 인종차별치고는 아주 치사한 행위다. <성진 취재부 기자>

흔히들 6․25전쟁을 ‘동족 상잔의 비극’이라고 표현한다. 이 전쟁에서 국군과 같은 비극을 겪은 외국인도 있었다. 당시 한국에 거주하던 화교 청년들도 이 전쟁에 참전해 중공군과의 전투를 치렀다. 당시 화교들은 대부분 지금은 대만이라고 부르는 “중화민국” 국적을 갖고 있었다. 외국인이었기 때문에 병역의무는 없었다. 하지만 중공군이 개입하면서 후퇴를 거듭하던 국군과 유엔군은 이들 중 자원한 화교들을 전투에 투입시켰다. 대중공군 첩보작전과 심리전 그리고 중공군 포로 심문 등의 임무를 부여했다. 심리전의 주내용은 적의 투항을 권유하는 것이었다. 모두 유창한 중국어가 필요 한 작전들이었다.

대중공군 첩보작전과 심리전에 투입

서울의 종로 5가 가마솥 공장에서 일하던 당시 이수해(86)씨(별첨 박스 기사 참조)는 1사단(사단장 백선엽) 부대 마크가 달린 군복을 입고 나타난 친구를 따라 전방 부대에 입대했다. 남구 신정동에서 신생원 이라는 중화요리점을 운영하고 있는 화교 강춘덕(86)도 화교수색대원으로 참전했다. 이들은 당시 화교 청년 50여명과 함께 그 부대에 입대했다. 백 장군의 참전회고록에도 화교수색대는 언급된다. 백 장군은 화교수색대원들이 수집한 정보로 반격의 계기를 만들었다고 회고했다. 백 장군은 당시 중공군의 취약한 보급사정과 이로 인해 극도로 떨어진 병사들의 사기를 화교수색대원들로부터 보고받고 반격작전 수립에 돌입했다고 술회했다. 그때 이씨와 강씨는 17살이었다. 화교수색대원들은 대부분 외국인이라는 이유로 군번과 계급을 부여 받지도 못했다. 대한민국 정부의 보훈대상에서도 제외됐다. 국공내전에서 패해 대만으로 밀려난 중화민국 정부는 어떻게든 이 전쟁에 개입하려 했다. 실지 회복의 기회를 잡기 위해서 였다. 화교청년들의 참전도 중화민국 정부의 독려 또는 묵인하에 이루어진 것으로 볼 수 있다. 하지만 이들은 대한민국과 중화민국 모두에게서 외면당했다. 보훈처는 지금까지 화교 참전용사에 대해서는 외면했다.

도대체 보훈처는 어느나라 기관?

지난 2014년엔 대한민국은 전후에 수습한 중공군 유해를 예를 갖춰 안장했다가 얼마 전 본국으로 송환했다. 중공군은 이 전쟁에서 분명한 적군이었다. 그리고 화교수색대 참전용사들은 분명한 아군이었다. 6․25 전쟁에 참전한 적군 중공군 병사들까지 찾아나서는 국가보훈처가 대한민국 국군 부대에서 복무했던 화교 참전용사들을 외면하고 있는데 그 명분은 찾기가 어렵다. ‘또 하나의 조국’인 대한민국을 위해 청춘은 불살랐던 화교 청춘들은 이제 제대로 된 기

▲6·25전쟁에 참전한 화교출신 이수해 용사

▲6·25전쟁에 참전한 화교출신 이수해 용사

록도 남기지 못하고 역사의 뒤편으로 쓸쓸히 사라져 가고 있다. 화교 용사들의 참전은 중국군의 6․25전쟁 개입과 역사적 궤를 같이한다. 1950년 9월 인천상륙작전 후 파죽지세로 북상하던 국군과 유엔군이 그 해 10월 중국군 개입으로 퇴각하던 시점에 화교 참전이 이루어진다. 중국군이 항미원조(抗美援朝: 미국에 대항하고 북한을 돕는다)의 기치를 들고 개입했다면 화교 참전 용사들은 ‘제2의 조국(대한민국)을 지킨다’는 마음으로 참전했다고 한다. 서울 동작구 국립서울현충원 외국인 묘역에는 현재 중국계 6·25참전용사 두 용사의 묘가 있다. 중국인 강혜림(姜惠霖․장후이린)과 위서방(魏緖舫․웨이쉬팡)의 묘다. 두 사람은 6․25전쟁에 참전해 태극기 아래에서 함께 싸운 국내 거주 화교 용사였다.
6․25전쟁에 중국군(중국인민지원군)이 참전한 것은 알아도 화교가 대한민국을 도왔다는 사실은 아는 사람은 극소수이다. 화교 강혜림은 1951년 2월 적정 정찰 등의 임무를 수행 중 경기도 과천에서 전사했다. 유해는 부산화교 소학교에 임시로 안장됐다가 1964년 외국인으로는 처음으로 국립서울현충원에 모셔졌다. 위서방은 1950년 10월 1사단 수색대에 입대해 적진정찰 및 중공군 포로 신문 활동의 공로가 있다. 휴전 후 한의사로 극빈환자 무료 진료 등을 하다 1989년 사망한 뒤 국무회의 의결을 거쳐 이곳에 안장됐다. 두 사람의 묘는 원래 따로 있다가 2012년 5월 15일 강혜림의 묘를 위서방의 묘 옆으로 이장하면서 외국인 묘역이 조성됐다. 전우가 혼령으로 다시 만난 셈이다. 전쟁 당시 육군 4863부대 SC지대는 대표적인 화교 참전부대다. 화교참전동지회 약사에 따르면 1951년 1월 200명 규모로 육군 4863부대 SC지대가 결성된다. SC지대라는 부대명은 서울 차이니즈(Seoul Chinese)의 첫 글자를 딴 것이다. 총책임자 왕스유(王世有), 훈련대장 류궈화 (劉國華), 지대장 나아통(羅亞通․뤄야퉁)이었다. 이 중 왕스유와 류궈화는 국내 거주 화교가 아니라 중화민국(대만) 정부가 파견한 국부군(國府軍) 장교 출신이다. 중화민국 정부는 6․25전쟁이 나자 참전을 원했으나 당시 국제 정세상 여의치 않자 비공식적으로 국부군 장교를 파견한 것으로 알려 졌다. 화교부대는 경기도 문산과 서울 사직공원에서 10주간의 각종 훈련을 마친 뒤 본부를 강화도 부근 교동도에 두고 적 후방에 대한 첩보공작 활동 및 특수작전을 수행했다.

‘누구는 되고 누구는 안돼’ 차별대우

이들의 활동기간은 1951년 3월부터 53년 9월까지 2년 반 동안이었다. 한성화교협회회장을 지낸 친위광(秦裕光․진유광) 전 중화민국한국연구학회장은 1979년 국내 한 일간지 연재에서 SC지대에 대해 이런 글을 남겼다. “대원들은 12명 단위로 조를 편성해 전방 HID(육군첩보부대)에 분산배치 했다. 이들의 임무는 적 후방에 들어가 군사정보를 수집하는 것으로 육해공 모든 루트를 이용했다. 황해도 연백․해주 지역과 철원․김화․평강지역의 적 후방침투작전, 평남 성천․순천 지역의 공중 투하 작전을 비롯해 함남 함흥 북방의 해상침투에 의한 정보활동 등 북녘 전역을 누비며 종횡무진 활약 했다.” 200명의 대원 중 무장공작대원은 한국어와 중국어에 능통해 중국군을 만나면 북한군 행세를 북한군을 만나면

▲동작동 외국인 묘역에 잠든 2명의 화교 출신 참전자묘.

중국군 행세를 하며 중국군의 인원, 장비, 부대위치, 편성 등의 첩보를 수집하고 정보가 될 만한 중국군 간부 납치, 주요시설 파괴 공작도 수행했다. 이 사이 희생자도 상당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1953년 9월 SC지대가 해체됐을 때 무장공작대원 70여명 중에 살아남은 사람은 20여명뿐이었다고 한다. 친위광 전 회장은 이에 대해 “동란으로 희생된 무수한 한국인들에 비하면 얼마 안 되는 수였지만 200명의 참전 화교로선 너무나 큰 희생이었다”라고 안타까운 마음을 적었다. 부대 해체 후 뿔뿔이 흩어져 일부는 중국군 포로 설득작업, 대북 방송의 중국어 아나운서, 심리전 요원으로 활약하기도 했으며 이후에는 거의 생업에 종사했다. 한국정부는 이들이 “외국인”이라는 이유로 이들에게 보상은 주어지지 않았다. 1971년 12월 이수해씨 등 53명이 종군기장을, 1975년 9월 10명이 보국포장을 받은 것이 그나마 위안이었다. 이제 전쟁 70여년이 흐르며 대부분의 국내 외 거주 화교 참전자들은 조용히 생을 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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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교참전용사 이수해씨의 마지막 소원

“작은 위령비라도 국립묘지에 세워졌으면…”

이수해 씨는 6·25전쟁 참전한 공로로 박정희 대통령 당시 보국훈장과 6·25참전기장도 수여받았다. 그런데 지금의 한국정부는 그가 ‘외국인’이라는 이유로 참전유공자는 될 수 없단다. 이 씨는 “전쟁 당시 1사단장인 백선엽 장군도 우리 의 공적을 인정했는데…”라며 먼 하늘만 쳐다 보았다.

유창한 중국어 실력으로 전방에 투입

지난 7월 말 코리아타운에서 만난 이수해씨는 기자가 ‘다시 한번 한국정부에 건의하면 어떤가’라는 제의에 손사래를 치며, “나 이외에도 여러명 화교출신이 건의했지만 번번히 거절 당했다” 면서 “우리가 참전수당이라도 타려고 이러는 줄 알지만…절대 아니다. 다만 우리의 참전을 역사에 기록으로 동작동 국립묘지에 작게나마 위령비라도 세웠으면 하는 것이 소원이다”라고 말했다. 당시 한국의 젊은 이들은 길거리에 잡혀서 전선으로 끌려 갔지만 이 씨같은 화교들은 징집대상이 아니었다. 이런 그는 “요즘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하겠지만 당시 우리같은 화교들은 한국을 제2의 조국으로 한 가족이라고 생각했어. 정말 대한민국을 위해 같이 싸워야 한다고 생각했지.”라고 말했다. 이씨는 전쟁 당시 육군 4863부대 SC지대 소속원인데 이 부대는 대표적인 화교 참전부대다. 화교참전동지회 약사에 따르면 1951년 1월 200명 규모로 육군 4863부대 SC지대가 결성된다. SC지대라는 부대명은 서울 차이니즈(Seoul Chinese)의 첫 글자를 딴 것이다.그들은 북한 공작원을 훈련시키던 육군 4863 부대 (HID) 소속으로 제1사단 등에 배치됐다.

중국에서 대만에서 한국서도 푸대접

유창한 중국어 실력으로 적 후방에 투입돼 적의 부대 위치 파악과 요인 납치 포로 설득 등의 임무를 수행했다. 당시 참전한 화교는 200명 가량인 것으로 추정된다. 그 가운데 생존자는 20여명. 이제 대부분 숨지고 미국으로 이민한 3~4명 중에 현재 이수해 참전 용사만 유일하게 생존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는 첩보부대 시절을 회고하면서 밤이면 전선에서 도둑고양이처럼 돌아다녀 첩보활동을 하면서 때로는 중공군 군복으로 위장해 활동 하다가 미군에 발각 되면 적군으로 오인당해 총격을 받아 일부 전우는 전사하기도 했다고 했다. 6·25전쟁이 나자 서울의 종로 5가 가마솥 공장에서 일하던 당시 17세 소년 이수해는 1사단 부대 마크가 달린 군복을 입고 나타난 친구를 따라 전방 부대에 입대했다. 한국전쟁의 포화로 이미 두 형을 잃은 그는 어머니에게 한마디 말도 남기지 않고 무작정 국군에 들어갔다. 당시 참전한 10대 20대 화교들은 대부분 식당 주방장 종업원들이었다고 한다. 휴전 후 서울 대구 부산 등지로 흩어져 다시 식당일을 했다고 전한다.

그는 군복도 없이 입던 옷을 입고 산에서 꺾은 나뭇가지로 군사훈련을 받았다. 전쟁 발발 이듬해 강원도 동부전선에 투입돼 적군에 포위당한 뒤 탈출해 강화도에서 첩보 교육을 받고 중부전선으로 투입됐다. 이 씨는작전 수행 중 날아온 수류탄 파편에 오른쪽 뺨에 깊은 상처가 생겼다. 그는 1974년 미국으로 이민 온 뒤에는 이곳의 대만계가 아닌 중국 사람들과 갈등을 겪었다. 그는 “중국계 전기기술자가 집에 와서 내가 받은 한국정부 표창장을 보더니 자기의 조국(중국) 나라와 싸운 사람이라고 매서운 눈으로 나를 쳐다 보았다”고 말했다. 그 매서운 눈은 그 뿐만 아니다. 대만 정부도 자신의 청년들이 한국전선에 싸운 것을 내몰라라 하고, 한국정부도 외면하고 있다. 외면할 명분도 없으면서 말이다. 이수해씨는 인터뷰를 끝내면서 기자가 ‘현재의 문재인 대통령은 특전사 출신이고 대선공약 에서 참전자들에 대한 예우를 개선하겠다고 했으니 다시한번 건의해 보자’고 하자 말없이 다시 하늘만 쳐다 보았다. 그리고는 “충혼위령탑에 이름 하나 남기지 못하고 사라진 참전용사를 생각하면 안타깝다”고 말했다. 이씨의 사연을 들은 미주국군포로송환위원회(회장 정용봉)와 6·25참전유공자회 (회장 김해룡)가 한국정부에 건의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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