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에 팔려간 북한 난민 여성들의 울부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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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와주세요,
꿈같은 일이 일어날 수 있게 도와주세요.”북한난민

북한인권시민연합 북한난민구호사업단(단장 이미숙)은 요즘은 중국으로부터 거의 매일 도와달라는 살려달라는 메시지를 받고 있다. 주로 중국 남성들에게 팔려간 북한 여성들이 도망쳐 나와 한국으로 가고 싶다는 호소이다. 아래 7명을 구출하려면 1,400만원(미화 약 1만 1천 달러)의 비용이 든다.

모자(엄마 김숙영, 30대 여성, 함경북도, 아들 2008년생)
부모님은 굶어서 한 달 만에 두 분 모두 돌아가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몇 년을 꽃제비로 살았고, 친구들 여럿 죽는 것 보면서 힘든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때 보안원들이 꽃제비들을 잡아서 돌격대에 보냈는데 나도 잡혀서 돌격대 나가 고생하다 도망쳤습니다. 오빠가 있는데 그때 헤어져서 못 만났습니다. 2009년 가을 중국에 돈 벌러 왔는데 강을 건너니 팔아먹는 사람들 기다리고 있었고, 말 못하는 바보한테 팔려갔습니다. 도망치다가 친척들에게 잡혀서 밧줄로 묶여 있다가 다들 잠든 틈에 도망쳐 나왔습니다. 도망쳐 나온 후 떠돌면서 일하는데 신분증 없는 여자라는 이유로 가는 곳마다 남자들이 괴롭혔 습니다. 그게 죽기만큼 힘들었고,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고통입니다. 이제 다 잊고 싶습니다.

이옥연, 30대 여성, 함경북도
학교 졸업하고 탄광기계공장 다녔지만 늘 먹을 것이 없어 먹고 살기 위해 각자 헤매다가 결국 뿔뿔이 흩어져 동생이 먼저 중국에 갔고, 부모님 소식도 모릅니다. 아마 죽었을 겁니다. 제일 소원은 가족을 찾고 싶습니다. 어떤 사람들한테 내가 중국에 가겠다니까 보내 줬는데, 그때가 2006년 가을이었고, 그것이 팔린 것입니다. 중국 농촌으로 남편은 병도 많았고 아주 가난 한데다 술 먹고 계속 때렸습니다. 너무 맞아서 몸이 많이 아픕니다. 날마다 맞고 살 수 없어서 도망쳤습니다. 아기가 크니까 돈 없어 아이 공부 못시키고 병원 못가고 모든 것이 고통스러웠습니다. 살아보려고 농촌일 쎄게 해서 손뼈가 툭 튀어나오고 관절이 아픕니다…..(울음)

김옥순, 50대 여성, 함경남도
배치 받은 농장에서 차려지는 것 없이 일만 했고, 아이 셋을 키우며 먹고 살기 정말 어려워 장사했는데 손해 보는 것이 더 많았습니다. 중국에서 딸과 함께 일해서 돈 벌어 가려고 2006년 9월 강을 건넜는데 협작꾼에게 팔려갔습니다. 딸하고 헤어질 때를 생각하면 말이 막힙니다. 길을 헤매며 딸을 찾아 다녔는데 하늘도 감동했는지 7년 만에 딸을 찾았는데, 옷도 제대로 못 입은 딸을 보면서 서로 울면서 위로했지만 죽도록 고생한 이야기를 하니 희망이 없어서 마음은 죽고 싶었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곳은 살 곳이 못 된다 판단하고 도망쳤습니다. 중국 남편은 술 먹고 때리고, 날마다 소처럼 일하라고 때렸습니다. 도망친 것만으로도 숨을 쉴 수 있습니다.

박영애, 40대 여성, 함경북도
중국가면 큰 돈 벌 수 있고, 엄마에게 말하지 말고 나오라는 말에1999년 2월말의 찬 얼음과 칼바람에 발이 저릴 정도의 두만강을 넘는데 미끄러지고 넘어지기를 여러번 하고 도착한 중국에서 인신매매하는 남자들은 어디인지도 모르는 농촌 산골에 나를 팔아먹었고 갑자기 남편이 목매어 자살해서 나는 그 집을 떠나 일하다가 지금 남편을 만나 아이 둘 낳았습니다. 겨울에는 나무 해다 팔고, 일년 동안 벌어도 1만원이 넘지 않아 겨우 밥이나 먹고, 아이들 학비는 생각도 못합니다. 어떻게 살 방법이 없어 도망치 듯 나왔습니다. 한국에 가서 사람답게 한번 사는 것이 소원입니다.

모녀(엄마 우정애, 20대 여성, 함경북도, 딸 2014년생)
영양실조로 다리 관절병으로 힘들게 살았습니다. 사는 것이 바빠 중국 가서 돈벌어 내 병 고치자고해서 2007년에 엄마와 같이 나왔지만, 중국에 도착하자 따로 팔렸습니다. 나는 돈 한푼 없는 산골 남자에게 팔렸고, 엄마 소식은 모르고 살다 4년 전 찾았습니다. 엄마를 만났을 때 엄마가 날 알아 못 봤습니다. 산골아줌마가 다된 나를 보고, 심장이 멎는 것 같다면서 나를 만지며 부둥켜안고 울었습니다. 엄마도 술주정뱅이에 팔려가 매 맞으며 고생스럽게 살았습니다. 여기 중국 생활은 감옥과 같습니다. 우리 조선여자들의 운명이 이렇습니다. 이들 7명의 사연과 함께 바로 2일전에 또다른 팔려간 북한 여성들의 사연도 공개됐다. 아래 난민들을 구출하는 데는 약 1천2백만 원(미화 약 9,000달러)이 소요된다.

모녀(엄마 이숙현, 30대 여성, 함경남도, 딸 2014년생)
어머니는 97년도에 병으로 사망하셨고, 아버지와 동생이 있습니다. 나 보다 먼저 동생이 중국에 갔고, 나도 동생 찾아 간다고 2008년 한 여름에 강을 건넜는데 그 길로 팔려서 공장에서 일하는 남자에게 시집가 정없이 가난하게 살았습니다. 말도 모르지 알아듣지도 못하는 생활이 너무 힘들었고, 병원은 갈 생각도 못했고 먹고 싶은 것 입고 싶은 것은 엄두도 내지 못했습니다. 소처럼 일만하고 고향 쪽 바라보면서 혼자말로 그립고, 가슴 아픈 이야기를 했습니다. 더 이상 이렇게 살 수 없어 아기를 업고 도망쳐 나왔습니다. 여기 중국은 불안합니다. 빨리 한국에 갈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모자(엄마 오숙연, 30대 여성, 양강도, 아들 2016년생)
어머니는 차사고로, 아버지는 폐암으로 사망해 나는 어릴 적부터 이집 저집으로 보내져 살았습니다. 학교 졸업 후 군수 공장에서 일했는데, 월급은 한 달에 중국 돈 200-300위안 정도였는데 그 돈으로는 먹는 것도 해결이 안돼서 살기 정말 어려웠습니다. 그때 어떤 사람이 중국 가서 돈 벌자고 해서 2008년 여름에 강을 넘었는데 팔렸습니다. 처음 팔린 곳의 남자는 나를 사 왔다고 사람 취급해 주지 않아서 딸 낳고는 내 절로 도망쳐 나왔지만 애한테 미안해 신경병에 잠 못자고 허약직전까지 갔었습니다. 이러다 죽겠다 싶어 정신을 차리고 식당에서 일 하다가 지금의 남편을 만나 살았는데 천대는 여전하고 신분의 위험 때문에 우는 아기를 들쳐 업고 도망쳤습니다. 집을 나와 보니 벌써 자유를 찾은 것 같습니다.

모녀(엄마 반순영, 30대 여성, 양강도, 딸 2014년생)
학교 졸업하고 의과대학 졸업하고 의사로 있다 살림이 어려워서 그만 뒀습니다. 의사라고 하지만 월급은 3천원입니다. 그 돈으로는 먹고 살기 힘듭니다. 돈 벌려고 장사하다 부모님 모르게 23살 때 중국에 나왔다 다시 들어갔습니다. 그 후 다시 2007년 여름에 친구를 따라서 중국에 나와 팔려가 아이 둘을 낳고 살았습니다. 그때 함께 나온 친구는 한국에 갔다고 합니다. 아이들이 자라면서 호구등록이 안되고 아플 때나 필요한 것도 돈 없어 못 사줬습니다. 그리고 주변의 눈초리와 차별을 벗어 날 수가 없었습니다. 남편도 감시가 심해 남편과 다투고 아이 데리고 도망쳤습니다.저는 요골 협착증이 와서 오른쪽 다리가 마비되어 걸음을 잘 못 걷습니다. 그러나 한국에 간다니까 힘이 납니다. 정말 꿈같은 일이 일어날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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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장 이미숙/ 부단장 엄영선, 김영자/ 컨설턴트 이성주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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