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역사를 당당하게 내세워 국민적 자긍심을 일깨워줄 필요가 절실한 요즘. ‘명성황후’는 그런 의미에서 상징적인 인물이다. 흔히 ‘민비’로 격하되고 비하되어 있는 ‘명성황후.’
이제 식민지 사관에서 벗어나 우리 민족의 자긍심을 불러 일으켜야 할 때가 온 것이다.
비운의 국모 명성황후의 일대기를 그린 뮤지컬로 명성왕후 시해 백주기를 맞이하며 제작, 기획된 우리 문화상품 제 1호 – 명성황후. 명성황후는 조선의 마지막 황후이며 16세의 나이로 고종과 결혼하여 국사에 큰 역할을 하다가 일본인들에게 정책적으로 시해 당하는 인물이다.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거대한 버섯구름이 피어 오르는 히로시마 원폭투하장면이 스크린에 가득하다. 1945, 1944, 1943… 빠른 속도로 줄어가는 연도, 1896년에 멈춘다. 무대가 밝아지면 장소는 히로시마 법정. 명성왕후 암살사건에 대한 재판이 진행중이다. 재판은 암살자들의 무죄로 끝나고 천왕에 대한 충성의 소리만이 울려 퍼진다. 시대는 다시 거꾸로 흘러 1866년 봄, 대원군은 강력한 쇄국정책과 함께 집권세력 유지를 위해 친인척인 민 자영을 고종과 결혼시킨다. 왕궁 생활에 적응한 명성황후는 지성과 미모를 겸한 아름다운 여성으로 성장하고 대원군의 세도에 저항하며 왕권을 되찾기 위한 준비를 한다. 왕위 계승을 위해 아들의 잉태를 기원하지만 두 번이나 세자를 잃은 후 수태 굿을 치르면서 건강한 옥동자를 잉태한다. 세자가 태어나면서 고종과 명성황후의 입지는 서서히 자리를 잡게 된다. 이때 명성황후는 고종을 독려하며 친정을 권하게 되고 이로 인해 대원군과의 갈등이 고조된다. 당시 한반도의 정세는 각 국의 이권다툼으로 혼란의 극치를 달리고 있었고 결국 대원의 하야와 함께 고종은 정권을 잡는다. 이후로 명성황후의 활약은 날로 비대해져 각 국 대사들에게 두각을 나타내는 총명한 인물로 성장한다. 그러던 중 한반도를 발판으로 침략의 야욕을 불사르던 일본은 명성황후가 친 러 정책을 펼치는 것을 느끼고 특별한 경계를 하기 시작한다. 1895년 그 동안의 노력으로 삼국간섭이 체결 되면서 경회루에서는 축하연이 벌어진다. 이로 인해 일본의 국제적 입지는 더욱 약화되고 한반도 야욕을 삭혀야만 하는 곤란한 처지에 이른다. 결국 일본의 국가 정책 상 큰 걸림돌로 지적된 명성황후를 조용히 암살하기로 결정하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