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미은행 20년 「갈등과 분란」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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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 행장의 전격적인 사표로 새 은행장이 된 사람은 다름아닌 바로 지난 달 30일 전격 사임한 육중훈 행장이다. 육 행장은 전임 민 행장이 전격사퇴 후 임시로 행장대리로 있다가 한미은행 사상최초로 내부 인사에서 승진된 케이스로 행장자리에 올랐다.육 행장은 1차 임기를 마치고 연임된 지 6개월 만에 역시 전격 사퇴해 한인사회를 놀라게 했다.

  그가 남긴 말은 ‘은행이 자만에 빠져 있으며 조직의 수술이 필요하다’였다. ‘근본적인 개혁’이라는 뼈(?)있는 의미를 곰곰 생각해보면 역시 이사진과 경영진의 문제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육 행장이 남긴 ‘조직의 수술’이나 ‘근본적인 개혁’은 모두 이사진을 겨냥한 말로 해석될 수 있다. 한마디로 이사진의 개혁이 관건이라는 것이다.

  미주사회 최초의 한국계 은행인 퍼시픽 유니언 뱅크(전 가주 외환은행)는 한인사회 최대은행으로 존재하면서 많은 은행원들을 길러 냈다. 오늘의 한인 은행들의 고위직들 중 많은 사람이 가주외환 은행을 거쳐 왔다. 빠져 나온 이유는 은행이 매너리즘에 빠져 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새로 한미은행이 커지고 가주 외환 은행을 능가하면서 역시 한미를 거처간 사람들이 타 한인은행의 경영자들이 됐다. 한미은행도 매너리즘에 빠져 들어 가고 있는 것이다.

  육중훈 행장을 민수봉 행장 후임으로 선임하면서 한미은행 이사회는 “한미에서 키운 사람 행장 만들자”라며 ‘젊은세대 키우기’를 선전했다. 갑자기 민 행장이 나가자 마땅한 후임자를 영입할 수가 없던 처지라 군색한 변명을 늘어 놀 수도 없었기 때문이다.

<  지난 94년 1월 한미은행의 새해 첫 이사회의는 무척이나 지루하고 긴 시간 난상토론을 벌여 잘하고 있던 벤자민 홍 행장의 퇴임시기를 4월로 못 박는 결정을 내렸다. 이때 이사회는 92년에 탈퇴했던 이사 2명이 93년 주주총회 때 이사로 재선임되면서 홍 행장의 재임용을 반대했기 때문이다. 이들 이사들은 홍 행장 반대파로 있다가 밀려났는데 다시 이사가 되면서 복수의 칼을 간 것이다. 당시 한미은행은 벤자민 홍의 지지파와 반대파로 갈라져 바람 잘 날이 없었다. 육중훈 행장은 최초 내부승진

벤자민 홍 행장은 88년에 영입 됐는데 원래 노스롭 항공사의 재무부장이었으며 미국은행 경력도 많았다. 그는 한미은행의 초대 정원훈 행장이 87년에 사임할 때 행장으로 초청을 받았으나 ‘한미은행이 나를 대우할 능력이 없을 것’이라며 거절한 일화가 있다. 그가 볼 때 초창기 한미은행이 행장 대우를 제대로 해주지 못할 것으로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정원훈 행장 사임 후 영입한 김원돈 행장이 이사회와 의견이 갈려 제대로 일을 하지 못했다.

  그래서 金 행장은 1년 만에 사표를 내고 말았다. 다급해진 이사회는 다시 벤자민 홍에게 달려가 은행을 맡아 줄 것을 호소했다. 한편, 당시 미 방위산업체도 불황기에 들어 섰고 미국회사에서 한계를 느낀 벤자민 홍은 은행측에 대해 본봉 이외에 스탁옵션에 성과급 보너스 계약 등의 요구조건을 내걸었다. 벤자민 홍 행장은 취임하면서 한국식 업무처리의 한미은행을 미국식 본연의 은행 체제로 대 개혁을 추진해 나갔다.

  타 한인은행에서 하지 않던 SBA 융자제도 도입, 한미주식거래, 직원 성과급과 능력제 실시 등등 새 제도 도입과 함께 은행 실적도 눈에 띄이게 성장해 나갔다. 당연히 홍 행장에게 지급되는 금액도 높아졌다. 은행 자체 분위기도 과거 이사진의 영향아래서 운영되던 것이 홍 행장의 발언권이 높아지면서 자연 이사진들과 충돌이 잦았다. 초대 정원훈 행장 시절부터 이사진들이 은행경영에 간섭을 해왔으나 정 행장이 한국문화에 익숙한 관계로 묵인하고 지나 가는 관계로 외부로 갈등이 비추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홍 행장은 달랐다. 미국식 문화에 젖어 있으며 계약조건에 따라 자신의 경영방식으로 운영해 나갔다. 미국은행 경력이 많았던 홍 행장에게는 이사진들의 행태가 아주 우스웠던 것이다. 미국의 은행 경영을 제대로 이해 못하는 이사들이 단순히 이사라는 직책으로 경영에 간섭하는 것을 볼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사진 쪽에서 볼 때 행장이 우선 고분고분하지 못한 것도 껄끄러운데 매년 엄청난 봉급과 보너스를 가져가는데 불만이 고조됐다. 은행이 돈을 벌어도 인건비로 나가는 것에 이사회는 못 마땅해 했다. 드디어 94년 새해가 되자 제일 먼저 이사회가 결정한 사항은 홍 행장의 목을 자르는 것이었다.

  홍 행장이 처음 취임하고 나서 여러 가지 의욕적인 업무를 펴나가면서 파생된 ‘홍행장 지지파’와 ‘반대파’ 등 간의 알력은 91년 4월 이사회를 계기로 ‘일부 이사들의 접대비 과대지출건’으로 크게 격돌해 이 내분이 동포사회로 알려지게 됐다. “은행이 잘 된다 싶으니 흥청망청 쓰느냐”로 여론의 지탄을 받자 91년 4월5일 홍 행장과 안응균 이사장이 기자회견을 자청하고 동포사회에 사과를 표명하는 사태로까지 이어졌다.

  이때 13명의 이사 중 2명의 이사가 물러났다. 그리고 투서가 은행감독국으로까지 날라 들어 연방준비은행으로부터 감사를 받기에 이르렀다. 한미은행의 내분사태가 은행감독국이 보기에도 심각한 수준에 다달았음을 알게 했다.
미국에서 금융기관은 무엇보다 투명해야 하는 것이며 한 은행의 문제는 비단 그 은행 뿐 아니라 타 은행이나 금융기관들에게 까지 피해를 줄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벤자민 홍 행장 가져가는 것 많아”

  은행감독국은 94년 12월 7일자로 벤자민 홍 행장 후임으로 들어 온 민수봉 행장 체제의 한미은행에 대해 지금껏 가해진 규제 중 가장 엄한 ‘사전승인제도’(Written Agreement) 조치를내렸다.

  한마디로 은행 이사진들이 정신을 차리라는 것이다. 이 조치는 수년간 지속되어 한미은행을 조였다. 내용은 “한미은행이 지점을 신설하거나 수석부행장급 고위직원을 비롯해 신규이사 선임과 주식배당을 결정시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에 보고하고 사전 승인을 받을 것. 또한 은행감독국에서 납득할 만한 수준에 대손 충당금 적립과 각종 자산 운용 계획 등도 감독국의 사전승인을 받을 것 등”이다. 한미은행 역사에 치욕스런 순간들이다.
이 조치가 내려진 이후 이사진들 자신도 어느 정도 반성의 기회가 됐다.

  한미은행에서 퇴출 당한 홍 행장은 오늘날 아시아나 은행과의 합병으로 화제가 된 나라은행 행장으로 전격 영입 되어 당시 큰 화제를 몰고 왔다. 이 때 한미은행만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한인은행들 대부분이 이사진과 경영진간의 갈등으로 몸살을 앓고 있었다.

  그 당시 중앙은행도 이사진들과 경영진간에 알력이 심화되어 93년 6월 이사회에서 찰스 金 행장의 재임용을 둘러싸고 이사진들간에 분란이 일어 났다. 이사회는 찰스 金 행장의 연임을 거부하고 새 행장 물색에 나섰다. 이러는 과정에 찰스 金 행장의 재임용 조치를 한 이사회에 대해 은행 전무 등 17명의 간부 직원들이 집단사표를 내는 소동이 벌어졌다.

  한인은행 사상 초유의 간부집단 사퇴사건으로 동포사회에 놀라움을 던져 주었다. 그러나, 더 놀라운 사건이 일어 났다. 중앙은행에서 퇴출 당한 찰스 金 행장은 자신을 지지해 사표를 낸 임원들을 대동하고 나라은행(당시 미주은행)으로 함께 들어 간 것이다. 당시 미주은행도 창립 때부터 야기된 이사진들간의 갈등으로 내분이 비등하고 있었다. 여기에서 또 놀랄 일이 계속됐다.

  나라은행 이사회는 중앙은행에서 대거 임원들을 데리고 입성했던 찰스 金 행장과 서니 金 전무를 10개월 만에 전격 해임시키고는 한미은행에서 퇴출한 벤자민 홍 행장을 영입하기에 이른다. 나라은행에서 토사구팽 당한 찰스 金과 서니 金은 ‘하나금융’을 설립해 은행 아닌 다른 금융업무에 몰두하게 되어 그들의 영역을 새롭게 구축했다. 지난 해 12월 15일 발간된 ‘한미은행 20년사’에는 은행탄생의 이념을 이렇게 적어 놓았다.

  (미국은행은 말할 것도 없고, 한국계 은행들도 한인들의 예금은 환영하지만 소액대출은 해주지 않는 것이 관행이었으므로 소자본이 필요한 한인 이민 사업주들을 위한 은행을 만들 필요에 모두 공감했다. 소수 민족 이민자들이 자기 은행을 갖고 경제적 정체성을 확보하게 되면 전체 사회에서의 위상 역시 제고되기 때문이었다) 20년 전 한미은행이 동포사회 번영을 위해 지녔던 이념이 지금은 많이 퇴색된 느낌이다. 자산이 15억 달러에 이르는 미주한인사회의 최대 커뮤니티 뱅크로 성장한 한미은행은 은행을 보호하고 지침을 결의해야 하는 이사진들의 사고방식이 아직도 구태의연 하다는 것은 한인사회 장래를 위해서도 아주 불길한 징조이다.

  1982년 LA를 관통하는 10번 프리웨이 선상에‘Koreatown’이란 법적명칭의 표지판이 등장했다. 그 해 말 정원훈씨가 초대행장으로 취임하였고 코리아타운에 한미은행이 문을 열었다. 이 표지판의 등장은 한인사회의 성장을 알리는 신호였다.

  오늘날 많은 한인은행들이 하나 같이 수익을 올릴 수 있는 원동력은 무엇보다도 한인동포들이 이용을 하기 때문이다. 자칫 은행 관계자들이 ‘은행 경영을 잘 하기 때문에 동포사회 경제가 번영된다’고 일방적으로 인식하고 있다면 크나큰 오산이다.

  은행은 사기업인 동시에 공공기업 이기도 하다. 사회에 대한 책임도 수반돼야 하는 것이다. 한인은행들이 자산 10억대에서 만족해서는 안된다. 100억 이상으로 성장해 한인커뮤니티 뿐 아니라 모든 커뮤니티에서 이용할 수 있는 금융기관으로 발전해야 한다.
장래 뱅크 오브 아메리카를 능가할 수 있는 은행으로 성장해야 한다.

  한미은행의 현 이사진 중의 50%가 20여년을 계속 이사진으로 있어 경영에 간섭하고 있다는 사실은 시대변화를 모르는 것으로 이번 기회에 대폭 개혁이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이제는 커뮤니티에서도 공공의 기업인 은행에 대해 필요하면 소리를 내야 한다.
그 이전에 은행에 관계하는 책임 있는 사람들이 스스로 행동한다면 커뮤니티는 한층 더 성숙해 질 수 있고, 은행은 더 사랑을 받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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