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먼저 군사독재정권하의 북한에서는 과학자나 기술자, 심지어 학생까지도 군에 동원된다고 밝혔다. 예를 들면 1961년에 그는 평양에 있는 이공계의 최고학부 김책공업대학 기계제작학부에 입학했는데 그때의 학생번호가 52113번이었다. 학생시절 이 번호판을 항상 가슴에 달고 다녀야 했는데, 그 의미하는 바는 제5연대 제2대대 제1중대 제1소대 제3분대의 대원(학생)이었다는 것.
그는 졸업까지의 5년간 군사학과 군사훈련이 3000시간이상 과해졌으며 따로 1600시간이상의 정치사상교육도 받았는데 정작 전문 분야인 공학계 공부는 겨우 820시간이었다 한다.
66년의 졸업식 날 대학의 간부부장(인사부장)에게서 한사람씩 ‘배치선’(취직자리)을 통고받는데 졸업생은 누구나가 “영변행”을 겁냈다. 한번 가면 다시 나올 수 없다는 소문 때문이었다. 안씨는 다행히 펑양과학원으로 배치를 받았다. 기계제작부 26명중 4명이 영변행이었지만 이듬해 67년까지 모두 1500명이상의 우수한 이과졸업생이 영변으로 배치되었다 한다.
안씨는 과학원에 근무했고 동창들이 현장에 많이 있었던 관계로 영변의 원자력단지에 관해서도 꽤 많이 알고있었다. 그가 그려 보인 약 800만평에 달하는 단지 약도는 앞서 소개한 망명 여과학자 이미씨<본보 406호>의 진술과 일치한다. 연구소 본부와 우라늄농축소, 주택단지만 지상에 짓고 나머지는 모두 지하에 건설되었기 때문에, 밖에서 보면 산자락에 석유탱크같은 철제 원형탱크가 100개가량 널려있어 산 깊은 곳에 학교와 석유정제공장이 있는 것 쯤으로 보인다는 것이다.
1988년에 영변에서 처음으로 출력 5000kw의 원자력발전이 행해졌다고 안씨는 증언한다. 물론 원자폭탄 생산을 목적삼고 있으므로 경수로형이 아니고 풀로토늄을 사용한 것. 5000kw나 발전한 것은 풀로토늄을 생산할 때 방출되는 에너지를 소비하기 위해서이다.
91년 소련이 붕괴하자 김일성은 소련으로부터 원자력 관계의 과학자나 기술자를 다수 초빙해 핵개발의 기술부족을 메우는데 전력을 기울였다. 93년 드디어 영변에서 극비리에 지하핵실험을 단행했다고 안씨는 주장한다.
金昌里로 핵시설 이동
북한은 74년 IAEA(국제원자력기구)에 가입하고 85년에는 NPT(핵확산방지조약)에 조인했다. 91년에는 한국과 한반도비핵화공동선언(6.15선언)을 채택하고 다음해 92년에는 IAEA와 보장조치협정에 조인하였다. 이렇게 대외적으로는 평화국가인 것처럼 위장해 왔다.
그러나 IAEA와의 합의에 따라 92년5월부터 93년1월사이 도합 6회의 “특정사찰”이 실시되면서 내막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IAEA가 북한이 영변에서 추출한 핵무기제조용의 풀로토늄이 수kg에 달할 가능성이 높다고 결론지은 것이다. 북한이 IAEA에 신고한 것은 겨우 90g였으므로 너무 큰 차이에 세계가 소연해 졌던 것.
IAEA가 의혹해소를 위한 “특별사찰”을 요구하자 북한은 93년3월에 NPT탈퇴를 선언했다. 이 돌연한 탈퇴선언은 다시 전세계에 충격을 주었고 미국을 비롯 세계각국이 북한을 비난해 미.북관계가 일촉즉발의 위기까지 갔었다.
이즈음 세계가 주시하는 영변에서 더 이상 핵개발을 계속하는 건 위험하다고 생각한 김일성.김정일부자는 핵시설을 이동시키는 명령을 내렸다. 이동할 곳은 평북 대관면 금창리.핵시설을 금창리로 옮기는 이유는 다음의 5가지였다.
1) 영변에서 멀다. 영변에는 다시 사찰단이 올 가능성이 있으므로 부근에 옮길 수는 없다. 금창리는 영변에서 서북으로 50km이상 떨어져있다. 게다가 느슨한 산들이 가로놓여 있어 실제보다 더 멀리 느껴진다.
2) 운반하기 쉽다. 영변에서 금창리까지 팔원선 철도가 있어 구간 14개역이다. 기자재를 철도로 이동시키는 편리함이 크다.
3) 중국과 가깝다. 금창리에서 중국국경까지는 불과 40km. 장차 미군기가 폭격하려 해도 중국에 핵피해가 미칠 우려가 있으므로 쉽사리 손댈 수가 없다.
4) 은산을 이용할 수 있다. 금창리는 원래 은창리라 불리워 전에는 대규모 은광산이었다. 이 대규모 지하 은광산을 일부 고치는 것만으로 핵시설을 만들 수 있다. 게다가 은광은 지반이 견고해 붕괴될 염려도 없다.
5) 주택가에서 멀다. 부근의 龜城까지는 삼봉산을 넘어 10km이상 떨어져 있다.
금창리로 시설이동 때는 물자 포장을 위장하거나 연구원에게 군복을 입히는 등 미국의 정찰위성을 속여가며 진행해 90년대중반까지 무사히 마쳤다.
94년10월 클린턴정권당시의 미국과 북한은 “제네바협약”에 서명했다. 그 당시의 북한측 동향을 안씨는 이렇게 설명하였다. 평양에서 열린 집회에서 노동당중앙으로부터 하달된 팸플릿이 낭독됐는데 내요은 대략 다음과 같았다고. ‘ 조인으로, 드디어 미국이 우리의 위대한 지도자 김정일 장군님의 아래에 무릎 꿇었다.
그들이 우리에게 100만KW의 발전소를 보내건, 해마다 50만t의 중유를 보내건, 쌀을 해마다 몇10만t보내건 관계가 없다. 조선전쟁에서 (미국이) 우리나라 사람들을 몇 백만명이나 학살한 것을 생각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문제는 그 후에 있다.
‘ 우리는 계속해서 필요한 조치를 취한다. 미국이나 일정한 나라만이 핵을 갖는다는 것은 그들이 멋대로 정한 일이고 우리는 필요하다면 (핵무기를) 갖는다, (노동)당원들은 이 일을 명심하고 열심히 노력해야 된다.’ 이에 관하여 안씨는 다음과 같이 부연설명했다. 내용은 핵개발 등 어디 부는 바람이냐는 투였다. “우리는 언제나 집회에서 처럼 박수를 해서 끝이더군요. 같은 집회는 북한전역의 약 2만군데에서 일제히 있었을 것입니다.”
핵개발에 외국인 속속 참여
한 미 일 세나라가 동해안 금호에다 경수로건설에 착수하는데, 아이러니칼 하게도 서해안쪽 금창리에서는 계속 핵개발이 행해지고 있었다.
과학자. 기술자는 러시아나 동유럽에서뿐만 아니라 이란, 파키스탄등 중동에서도 왔다는 것이다. 안씨는 제네바협정이 체결되기 전달인 94년9월 북경에서 평양으로 향한 고려항공에 30명이상의 이란인 기술자들과 함께 탄 일이 있다고 했다. 또 약 50명의 파키스탄 기술자들을 태운 버스가 평양을 떠나 교외로 가는 것도 목격했다 한다.
파키스탄에서 “핵개발의 아버지”라 불리우는 압둘 칸박사 등을 통해 핵개발기술을 도입하고, 반대급부로 노동미사일의 기술을 전수하기 위해 북한 과학자.기술자가 몇10명이나 파키스탄에 파견되기도 했다.
이란에서는 우라늄의 농축실험이나 장거리미사일의 엔진실험을 공동으로 시행하기도 했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