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삼 전 대통령은 지난 2001년 2월 15일에 펴낸 그의 회고록에서 이런 말을 남겼다.
<나름대로는 내 모든 심혈과 정성을 다 기울여 이 회고록을 썼다. 이 회고록을 읽는 국내외 여러분들께서 한국의 진실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으로 감히 확신하는 바이다>
그러나 ‘민주주의를 위한 나의 투쟁’이라는 부제가 달린 ‘김영삼 대통령 회고록’은 한국의 진실을 이해하는데 ‘도움’은 될 지 몰라도 ‘큰 도움’은 되지 못할 것으로 보인다. 이 책이 나오기 1년 전 국내외에 큰 파장을 몰아왔던 “백두사업과 린다김 스캔들”에 대해서는 한마디 언급도 없었다. 말썽 많던 ‘백두사업’은 바로 김영삼 전 대통령이 청와대 시절인 1996년 6월 21일 그 자신이 결재한 것이다.
그 후 백두사업이 2억 1,000만 달러라는 천문학적인 계약이면에 엄청난 부정이 도사리고 있어 2000년 5월 세상이 시끄러울 정도로 문제가 됐는데 이 사업을 결재했던 김 전 대통령은 회고록에서 한마디 언급도 없었다. 진실여부에 대한 평가도 없었다. 국민의 엄청난 세금이 지출되는 국방계획에 왜 한마디도 없었을까. 그 회고록은 그 자신의 PR책일 뿐이었다.
한국에서는 잊혀져 가는 이 ‘백두사업 스캔들’은 미국법정에서 다시 심판대에 오르게 된다. 한국에서 3년 전 ‘백두사업과 린다김 스캔들’이 몰아칠 때, 미 사법당국도 록히드 마틴의 전신인 로랠 사와 린다 김의 거래에 대하여 비밀히 내사해 왔다.
지난 3년 동안 미 연방검찰과 캘리포니아 검찰은 린다 김이 받은 커미션 액수의 위법여부 등을 포함해 거래행적을 추적해와 최근 한국정부에 사법공조를 의뢰하기에 이르렀다. 연방대배심 측에서는 발표를 하고 있지 않지만 이미 록히드 마틴 사와 레이데온 사는 연방대배심으로부터 소환장을 받아 놓고 있는 실정이다.
현재 미 FBI는 린디 김이 한국과의 무기거래 중개 대가로 리베이트를 받고도 이에 대한 탈세여부를 조사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캘리포니아 주 대법원에 접수된 소장(S100136) 에 따르면 린다 김은 로랠사(현 록히드 마틴)로부터 커미션으로 1,000만 달러를 받은 것으로 되어 있다. LA 타임스가 지난해 12월에 보도한 바에 따르면 이 신문이 입수한 로랠 사 메모에는 린다 김에게 회사 측이 500만 달러를 선불할 의사가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 같은 1,000만 달러 커미션이 사실이라면 이는 연방법이 규정한 해외군사 무기거래법을 위반하게 되는 것이다.
또 다른 연방법에는 한 계약 당 커미션 액수를 5만 달러로 한정하고 있다.
로랠 사는 지난 1995년에 린다 김이 한국의 청와대를 포함해 영향력있는 군 실세들과 커넥션이 있음을 알고 그녀를 고용했다.
LA 타임스가 입수한 1995년 로랠 사 메모에 따르면 “린다 김이 한국정부의 청와대를 포함해 최고위급 주요정책 결정자들과 연결되어 있다”라고 밝히고 있다. 1995년 메모는 당시 로랠 사의 사장인 프랭크 란자에게 보낸 것인데 의미 심장한 문구로 되어 있다.
“현재 로랠 사내에 어느 누구도 ‘닥터 김’이 지니고 있는 커넥션을 갖고 있지 않다. 그녀는 한국정부의 정책결정자들에게 쉽게 접근할 수 있다. (그녀는) 이 수속과정에서 적절한 시기에 꼭 알맞은 인사들에게 우리의 메시지를 전해 우리를 도울 것”이라고 쓰여져 있었다. 이 메모에 린다김을 ‘닥터 김’으로 호칭한 것이 재미있다.
이 로랠 사는 1996년에 록히드 마틴 사에 합병됐다. 린다 김은 한국에 있을 때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이 같은 사업(백두사업 등 포함)에서 나는 애국심으로 한국을 도운 면도 있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이와 같은 말은 한국민에게는 그럴듯하게 들릴지 모르나 미국 회사쪽으로 볼 때는 ‘저 여자는 우리가 고용했는데 누구편을 드는 것인가’로 오해를 받을 수도 있다. 린다 김이 중개한 ‘백두사업’의 감청기를 적재한 정찰기 도입사업은 진행과정에서 상당한 문제점을 내포하고 있던 사업이다.
사람들은 고도의 스파이 정찰기라면 U-2기 같은 첩보기를 연상한다. 그러나 ‘백두사업’의 첩보기는 고도가 아니라 저공비행을 하면서 감청하는 정찰기를 말한다. 직접 북한상공을 넘나들면서 첩보비행을 하는 것이 아니라 휴전선 이남쪽으로 비행하면서 영공침범 없이 첩보를 감청하는 정찰기인 셈이다.
따라서 이 첩보기는 한국이 처음으로 개발한 것이나 다름이 없다. 그와 같은 감청장비를 적재할 수 있으며 저공비행을 하는 기종으로 나타난 것이 바로 미국 레이시온 항공기 제작사의 ‘호커800XP’ 또다른 미국 회사인 세스나사의 ‘시스테이션Ⅲ’, 프랑스 닷소사의 ‘팰콘50EX’ 등이다.
한편 지상으로부터 저공비행하면서 감청을 할 수 있도록 고안된 첩보기는 세계 어느나라에서도 개발한 적이 없다. 미국에서도 개발한 적이 없어 선례를 따를 수도 없었다. 당시 한국 국방부의 ‘백두사업’ 관계자들이 수집한 정보에 따르면 가장 빠른 시간내에 이 같은 첩보기를 제작할 수 있는 나라로 미국을 우선순위 1위로 평가하고 있었다.
이 첩보기는 특수정찰기에 감청장비를 적재하여 개발하는 것인데 문제는 감청장비와 정찰기간의 전파방해를 받지 않도록 특수개발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왕이면 첩보기 생산업체가 감청제작회사와 결합하는 방법이 이상적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미국 내 회사중 호커 800XP를 생산하는 레이시온 계열사에는 감청장비를 제작하는 E-시스팀즈가 있었다. 일반적인 생각으로 동일계통의 회사면 모든 것이 순조로울 것 같아 한국은 호커800XP를 생산하는 레이시온 항공기 제작사와 E-시스템즈사로 구성된 ‘레이시온 컨소시엄’이 만들어 내는 첩보기가 타 경쟁회사들에 비해 20% 정도 비싼 가격이지만 동일계통이라 계약을 하게 됐다.
그러나 여기에서도 문제가 있었다. 과연 이들 회사가 제작한 첩보기가 한국이 원하는 첩보기인지 능력을 시험해야 하는데 불행하게도 한국에는 그것을 판단할 능력이 없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미국정부에 그 시험평가를 의뢰하기에 이르렀다. 원래 ‘백두사업’은 한국군의 전략 정보기술의 자주화를 위한 것으로 출발한 것인데 미국에다 평가를 일임하게 됐으니 전략 정보체계를 미국이 고스란히 알게 되었으며 애초의 목적도 무산되어 버린 것이다.
즉 미국정부에 하청을 제공해 레이시온 컨소시엄이 생산한 백두 정찰기가 한국이 원하는대로 제작되었는지를 심사하고 미국정부가 보증하는 계약을 체결한 것이다. 이럴 경우 한국은 제작회사에게 사기를 당할 염려는 없어도 한국군 자체로서의 전략정보의 자주화는 불가능한 것이었다. 많은 문제점을 내포한 ‘백두 정찰기’ 제작에서 또 다른 중요한 결함이 발견되었다.
백두 정찰기는 휴전선 남방40∼50㎞ 에서 휴전선을 따라 비행하며 북한 지역을 정찰하다가 북한의 지대공 미사일에 노출될 수 있다고 주장하는 한국공군측에서 반대의견을 개진하고 나섰다. 또 공군측은 기종제작 설계면에서 감청장비 등을 부착할 경우 첩보기의 운항속도에 변화가 예상될 수 있다는 의견도 제기했다.
이 같은 반대의견보다 더 근본적인 문제는 ‘왜 첩보기가 필요하냐’라는 의문이었다. 첩보 수집이 꼭 정찰기를 통해야만 되는 것이냐였다.
한국군은 이미 지상에 북한전역을 감청할 수 있는 전자장비를 설치하고 있다. 지상장비를 통해서도 감청할 수 있는데 구태여 첩보기가 필요한가 하는 의문이다.
물론 ‘백두사업’ 관계자들은 입체 작전상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하여간 말썽의 ‘백두사업’ 정찰기 문제는 이미 엄청난 돈이 대부분 미국으로 전달됐다. 되돌릴 수 없게 되어 버린 것이다. 수업료 치고는 너무나 비싼 대가였다. ‘백두사업’은 이제 LA의 캘리포니아 법정에서 린다김과 록히드 마틴 사가 한국을 상대로 불공정 행위를 했는가에 관해 심판을 받게 된다.
또한 린다 김이 록히드 마틴 사로부터 받은 거액의 커미션이 정당한가도 심판을 받게 된다. 이 과정에서 다시금 ‘부적절한 관계’가 ‘성상납’으로 증거가 될는지 주목이 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