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은행 벤자민 홍 행장 은행관계자들 비하 발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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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은행 벤자민 홍 행장이 이번에는 한 교포언론으로 분류 되는 영자 월간지에 동포 은행의 은행 관계자들을 싸잡아 ‘영어를 몰라 은행 업무에 차질이 많다’는 식의 발언으로 구설수에 휘말려 곤욕을 치루고 있다.
홍 행장의 이와 같은 발언 내용에 교포 은행 관계자들은 한결 같이 의구심을 나타내며 홍행장의 발언 저의가 무엇인지 알수 없다고 입을 모으며 분개하고 있다. 과연 누구를 겨냥한 발언 인지 어느 은행을 두고 하는 말인지 궁금하다.

벤자민 홍 행장의 유창한 영어실력은 자타가 공인하는 바이지만 그렇다고 자신이 수년간 근무하고 10여년 교포사회의 은행장으로 지낸 그의 입에서 은행의 임원 이사진,경영진까지 싸잡아 영어를 못해 운영에 미숙함을 보이고 있다는 인터뷰 내용은 참으로 어른스럽지 못한 소아병적이고 유치한 발상이라는 것이 중론이다. 자유당 시절 특무대 대장인 김창룡씨 밑에서 보좌관을 지낸 경력의 홍 행장은 매사가 이런 식으로 인간 관계를 형성하거나 비하 시켜 “나 아니면 안되는 위험한 생각’을 지니고 있는 사람이다. 물론 영어를 잘해 한국인 부인과 이혼하고 미국인 부인과 결혼을 했는지 몰라도 이번 교포 은행 관계자들에 대해 모욕적이고 비하 시키는 인터뷰 발언에 대한 사과 표명이 있어야 할 것이다. 미국사회에 살면서 영어를 잘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렇다고 영어를 잘 못 한다고 흉이 되는 일이 아니다. 물론 미국 땅에서 살면서 당연히 영어를 잘해야 하지만 홍 행장 경우 처럼 그걸 문제 삼아서는 안 될 것이다. 영어를 잘 못하는 이사들 밑에 들어와 은행장을 10년 동안 해 왔으면 감사하고 고맙게 생각해야지 모두 싸잡아서 공격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
그런 맥락 이라면 한인 소유의 은행을 떠나 미국계 은행으로 돌아가야 마땅한 논리다.

한인사회에서 ‘동포은행의 대부’로 불리는 정원훈씨에게 항상 ‘행장’이라는 타이틀이 따라 다닌다. 한국에서부터 한국은행 등을 거쳤기 때문에 잔뼈가 굵어 온 ‘뱅커’이다. 그는 1977년 LA 코리아타운에 본국은행의 최초 현지 법인은행인 가주외환은행의 초대행장을 맡으면서 한미은행, 새한은행, 아시아나은행 등을 직접 설립하고 행장을 지냈다.

은행 하나를 설립하는데 많은 시간과 노력이 따른다.
또한 은행국과 교섭하는데도 전문 금융지식이 따라야 한다. 미국식 금융제도에 익숙해야 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이러한 동포은행을 하나도 아니고 여러 개를 설립한 정원훈씨가 “영어가 모자란다”고 하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동의할까.

최근 북가주의 아시아나 은행을 합병하면서 실제로 나라은행의 전권을 휘어 잡게 된 벤자민 홍 행장은 ‘(80년대전후)한인은행들의 경영진과 운영진들은 영어를 몰라 미국식 은행운영에 미숙함을 나타냈다. 한인은행들의 대부분 경영진들은 한국에서 은행생활을 하다가 온 사람들로 미국에서 은행을 경영하는데 많은 문제를 노출시켰다’면서 과거 한인은행 경영진들과 현재 은행에 근무하는 은행원 들을 싸잡아 비하시키는 발언을 해 파문이 일 것으로 보인다.

홍 행장은 최근 발간된 영문월간지 ‘코레암’ 5월호에 커버스토리로 소개됐는데, 자신의 은행활동을 인터뷰하는 과정에서 자신이 한인은행 참여 당시 한인은행들의 경영진들을 가리켜 “영어 실력이 형편없었다”고 말해 상대적으로 자신의 영어실력이 월등해 은행을 성공적으로 이끌어 왔음을 시사했다. 홍 행장이 언급한 대목을 보면 1988년 한미은행에 영입 될 당시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한미은행은 1982년 12월 15일에 설립된 순수동포은행으로 초대 가주 외환 은행장을 지냈던 정원훈씨를 비롯해 잔문, 조지 최, 안응균, 안이준, 안성주씨 등을 비롯한 이사들과 1백여명의 주주들로 구성됐다. 벤자민 홍 행장이 이 은행의 행장으로 영입된 것은 한미은행이 설립된지 6년 정도 지났을 때이다.

따라서 일차적으로 “영어를 못한다”라는 카테고리에 들어가는 사람들은 한미은행의 정원훈 초대행장을 포함해 이사들 전원과 당시의 고위직원들로 볼 수 있다. 이차적으로 포함될 수 있는 사람들은 한미은행 다음으로 1986년에 세워진 중앙은행 관계자들이 될 수 있다. 이 은행은 이정현 이사장을 비롯 데이빗 홍, 金상훈 이사들이 주도했다. 그리고 1989년에 오늘의 나라은행인 당시 미주은행이 방미철, 제임스 한, 브라이언 우 이사들에 의해 설립됐다. 또한 오늘날 중앙은행의 金선홍 행장, 새한은행의 金주학 행장, 최근 사임을 발표한 한미은행 육증훈 전행장, 윌셔은행의 민수봉 행장 등도 당시 한인은행들에서 전문인으로 활동할 때였다. 이외에 고석화 윌셔은행 이사장도 당시 은행에 관련을 맺고 있었다.이같은 한인은행 설립자들과 경영 운영진들 대부분이 ‘영어를 못하는’축에 들어갈 수가 있는지 의문이 가는 대목이다.

우선 ‘한인은행의 대부’인 정원훈 행장이 ‘영어를 못하는 사람’으로 한인 은행가에서 볼 수 있는가?
대답은 ‘아니다’이다. 정 행장은 한국에서나 미국에서 모두 은행경력이 풍부한 사람이다. 미국에서 손수 한인은행을 여러 개를 직접 설립한 당사자가 미국은행 지식을 모르면 은행설립의 주도적 역할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정 행장은 이미 80년대에 10년후의 미국은행의 변모를 예견했고 국제금융의 변화를 예측해 소수민족인 한인커뮤니티의 은행을 어떻게 운영해 나가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당시 미은행국은 은행설립에 매우 보수적이었고 특히 소수민족계에 대해 까다로웠다.

그런 환경에서 정 행장은 은행설립계획부터 영업계획에 이르기까지 청사진을 은행국에 제출해 허가를 받아 냈다.
그가 주도해 설립한 은행들은 모두 성공적이었다. 특히 그가 초대행장으로 키운 한미은행은 오늘날 15억 달러의 자산으로 최대 한인은행으로 성장하는데 그가 초석을 다졌다는 것은 의심할 수 없다.

정원훈 행장 이외에 金선홍 행장, 金주학 행장, 민수봉 행장, 고석화 이사장들이 모두 ‘영어를 못해서’ 미국식 은행경영을 하지 못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 이 답도 역시 ‘아니다’이다.

윌셔은행의 민수봉 행장의 경우 한국상업은행에서 잔뼈가 굵은 사람이다. 40년간을 미국 일본 등 해외의 지점장으로 근무한 경력이 인정 받아 미 은행감독국에서도 별탈 없이 한미은행의 행장으로 취임 했고 현재 윌셔은행의 행장으로 재직 하면서 나라은행 못지 않은 실적으로 은행을 몇배나 성장 시키는 뛰어난 저력을 과시하고 있다. 이 답도 아니다.

그렇다면 그 의도는 무엇인가. 인터뷰 내용의 의도대로 한미은행의 이사진을 향한 분노의 목소리라고 밖에 들리지 않는다.

미국 주류사회에 깊숙이 들어있던 벤자민 홍 행장은 1988년에 한미은행 행장으로 영입 됐는데 원래 미국은행에서 아시아태평양 담당 부사장에 오르는 실력으로 나중에 미 유수의 방위사업체인 노스롭 항공사의 재무부장이 되었다.
미국은행에서 일할 때 일본 지점을 개설해 초대 지점장으로 나가서 일본 금융인들까지 ‘한국인이 지점장으로 온다’는 소식에 놀랬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그는 한미은행의 초대 정원훈 행장이 87년에 사임할 때 안응균 이사 등이 찾아가 ‘행장을 맡아 달라’고 요청하자 ‘한미은행이 나를 대우할 능력이 없을 것’이라며 거절하기도 했다. 그가 볼 때 초창기 한미은행이 행장 대우를 제대로 해주지 못할 것으로 판단했기 때문이라고 추후 밝혔다. 그런데 정원훈 행장 사임 후 영입한 金원돈 행장이 이사회와 의견이 갈려 제대로 일을 하지 못했다.그래서 金 행장은 1년 만에 사표를 내고 말았다.

다급해진 이사회는 다시 벤자민 홍 행장에게 달려가 은행을 맡아 줄 것을 호소했다. 한편 당시 미 방산업체도 불황기에 들어 섰고 미국회사에서 더 이상의 한계를 느낀 그는 은행측에 대해 본봉 이외에 스탁옵션에 성과급보너스 계약 등의 요구조건을 내걸었다. 은행 이사진들은 은행을 살려야 겠다는 심정으로 울며 겨자먹기 식으로 그의 제안을 따를 수 밖에 없었다.


홍 행장은 취임하면서 한국식처리의 한미은행을 미국식의 본연의 은행 체제로 대 개혁을 추진해 나갔다. 타 한인은행에서 하지 않던 SBA 융자제도 도입, 한미주식거래, 직원 성과급과 능력제 실시 등 새로운 제도 도입과 함께 은행 실적도 눈에 뜨이게 성장해 나갔다. 당연히 홍 행장에게 지급되는 금액도 높아졌다. 은행 자체 분위기도 과거 이사진의 영향아래서 운영되던 것이 홍 행장의 발언권이 높아지면서 자연 이사진들과 충돌이 잦았다. 초대 정원훈 행장 시절부터 이사진들이 은행경영에 간섭을 해왔으나 정 행장이 한국문화에 익숙한 관계로 묵인하고 지내 가는 관계로 외부로 갈등이 비추어지지 않았다.

이사진 쪽에서 볼 때 홍 행장이 우선 고분고분하지 못한 것도 껄끄러운데 매년 엄청난 봉급과 보너스를 가져가는 것에 불만이 고조됐다. 은행이 돈을 벌어도 인건비로 나가는 것에 이사회는 못 마땅해 했다. 드디어 94년 새해가 되자 제일 먼저 이사회가 결정한 사항은 홍 행장의 목을 자르는 것이었다.

홍 행장은 한미은행에서 6년 그리고 나라은행에서 1994년부터 현재까지 약 10년을 지내 왔다.
지금까지 받은 봉급과 보너스 그리고 스탁옵션 등을 합치면 2천만 달러대를 넘나들 것으로 추산될 것으로 보인다.
한미은행이나 현재의 나라은행 이사진들의 일부는 홍 행장이 ‘너무 많이 가져 간다’ 는 불만이다. 물론 계약에 의해 지불되는 만큼 계약 내용을 지켜야 하는 것이다. 홍 행장은 자신이 받은 수입을 자신의 은행 영향력을 키우는 담보로 사용했다. 지난해 까지만 하더라도 나라은행측에서는 홍 행장을 올해 6월 명예롭게 은퇴시키는 계획이 있었던 걸로 알려졌다. 그러나 아시아나은행과 합병하고 거부인 이종문 회장을 영입하면서 아예 ‘친위 쿠데타’ 식으로 전권을 장악하기에 이르렀다.

이것이 그의 ‘과욕’인지는 두고 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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