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고고학계 일각에서 최신 과학기술을 원용해 역사의 물적 기초가 되는 고대유물의 연대 측정을 감행한 용기에 대해 우선 찬사와 갈채를 보낸다. ‘황국사관’의 틀에서 아직 탈피 못하고 있는 일본의 학문 분위기속에서 유물의 객관성을 우선시했기 때문이다. 그 여파는 앞으로 매우 넓고 크게 번져가며 올바른 동아시아역사 체계를 바로 잡는 길잡이가 될 수 있다. 한.일 고대관계엔 ‘지각변동’이라 할 만큼 충격적이다.
그렇다해도 앞에는 매우 험난하고 긴 역정이 가로놓여 있다. 모두를 납득 승복시킬만한 작업이 수월치 않다. 그 유물마다의 전파와 연관 및 발전과정을 특정 짓는 것부터 지난한 과제다. 한국의 경우는 “역사의 교량”이라는 종전의 억울한 지정학적 인식때문에 더 어려운 처지에 놓이게 되고, 남북한으로 분열.대립한 내부갈등 탓에 더 곤욕을 치루게끔 되었다.
먼 옛적은 제쳐두고라도 중국과 북방으로부터의 청동기문물을 흡수 소화하여 더욱 발전시켜 창조한 문화를 뽑내고 또 이웃에 전파한 노고와 기여가 조금도 평가받지 못했었다.
구체적으로는, 이번의 500년 소급론에 대해 국내학계는 아직 제대로 반응을 못하고 있다.
예를 들어본다. 벼농사의 일본전파가 500년 빨라졌다면, 한국서는 어떻게 되나? 볍씨가 公認된 평양 남경유적이 BC 7-6세기로 간주돼왔는데 출토된 팽이형토기를 이어받은 가락형토기의 충남 송국리유적도 같은 시기라는 자체모순까지 생긴다.
논(水田)은 논산시 마전리(BC8세기)와 울산시 무거동옥현(BC5)외에 별로 발견된 것이 없지만 볍씨(탄화미)라면 89년 김포 가현리의 5km사방 니탄층(泥炭層. BC15-12세기)에서 나온 쌀.조를 비롯하여 고양 가와지 토탄층에서 출토된 탄화미는 BC10세기의 동촉을 수반한 등 자료가 쌓여가고 있다. 유적 및 유물의 집대성을 서둘러야 한다.
토기도 마찬가지. 일찌기 김정학 교수는 일본의 죠몬(신석기시대)조기 소바다 토기의 조형은 우리 빗살문 토기라고 단정한 바 있다. 일본 후꾸오카에서 야요이문화를 연구했던 부산대 심봉근교수는 죠몬 후기말의 고료식 부터 죠몬만기의 오오이시식, 구로가와식, 유우스식(돌대문)등 모두가 한국의 영향아래 이뤄진 것으로 보고 있다.
한.일 양국의 토기비교에서는 1) 유우스식에서 일본의 하라, 산만다, 하라야마, 야마노데라, 이따쯔께의 5곳 출토품이 한국의 곡안리, 황석리(파주), 외동, 대봉동, 오동(회령)것과 각각 기종도 같다고 했으며, 2) 야요이 전기의 이따쯔께1식 양식에서도 이다쯔께와 야구로자끼 2곳서 나온 4점은 역삼동, 가락동(서울), 오동, 산청(경남)출토품과 동 계통이라고 도시(圖示)한 바 있다.(‘한국에서 본 일본야요이문화의 전개. 99년4월 학연문화사 간)
‘참다운 동아시아사 大系’의 확립을 위해서 꼭 짚고 넘어갈 대목이 있다. 일본학자들이 아직도 툭하면 운운하는 ‘대륙 영향권’풍조다. 6천년전 양양 오산리서 나온 결합낚시바늘이 부산 조도를 거쳐 일본 북구주로 보급된 데에 중국영향이 있었던가. 북유럽에서 시베리아를 거쳐온 빗살문토기와 중국이 무슨 관계가 있나. 銅문화를 꽃피운 殷나라는 동이족이다. 서하에서 몰려온 한족의 周에 밀려 동해안 복건에서부터 양자강북안의 절강, 산동, 하북 각성과 만주서부를 거쳐 한반도에 와 꽃피운 지석묘人들은 일본 구주에까지 가서 지석묘역을 조성, 오늘의 황해와 동지나해를 한바퀴 도는 대이동 자국을 남겼던 것이다.
야요이문화의 SET를 이루는 사람과 벼, 마제석기(농경구), 방추차(직물), 청동기, 지석묘(묘제)등은 모두 한국계다. 중국남부를 거친 벼만 해도 북한(北限)에서 개량된 한국산이었으니 3천년전의 기원전10세기에 이들 문물을 갖고 대거해서 일본 북구주로 건너간 사람들은 과연 누구였겠는가.
동아시아 영역안의 한, 일, 중인들이 과거의 관계를 겸허하게 뒤돌아 보고 앞날 생활의 지표를 바로 세우는 날이 될수록 빨리 와주었으면 한다.
동아시아 고대사의 ‘대수정’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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