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라크, 다음은 북한인가?
국제 여론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미국은 이라크를 공격, 후세인 정권을 무너뜨렸다. 프랑스, 독일 등 전쟁에 반대했던 나라들은 세계 유일의 초강대국 미국의 심기를 거스른 것을 후회라도 하듯 미국을 향해 관계 개선의 제스처를 보내고 있다. ‘악의 축’으로 규정된 세 나라 중 하나인 북한이 미국의 다음 목표로 떠오르고 있다.
전쟁의 포성이 멎은 지 50년, 한반도에는 다시 전운이 감돌고 있다. 3자회담, 5자회담 등 대화 노력에도 불구하고 미국은 북한에 대한 봉쇄와 압박을 강화하고 있다. 북한은 이러한 경제 제재는 전쟁행위라며 미국과의 일전불사를 외치고 있다. 내년에 치러질 미국의 대선을 앞두고 한반도 정세는 매우 빠르게 위기를 향해 치닫고 있다.
한반도의 전쟁 가능성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이 사람들은 흔히 “한반도에서 전쟁이 일어날 경우 미국인을 포함, 너무나 큰 인명피해가 예상되기 때문에 미국이 북한과 전쟁을 하지 못할 것”이라고 말한다. 너무나 엄청난 재앙을 불러올 전쟁은 일어날 수 없다는 논리인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100만명이 넘는 무고한 사람들이 증오와 분노와 공포 속에서 죽어간 참화를 직접 겪은 게 바로 우리들 아닌가. 한국전쟁의 몸서리치는 역사에서 우리가 배운 것은 무엇인가? 전쟁 발발도, 무차별 폭격도, 야만적인 학살도, 휴전선 고착화도, 남북간의 끝없는 증오와 불신도 모두 우리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일어났다는 참담한 깨달음 아닌가. 따라서 단 1%라도 전쟁의 가능성이 있다면 바로 그 이유, 즉 ‘너무나 큰 참화가 예상되기 때문에’모든 노력을 다해서 전쟁을 막아야 한다는 게 우리의 태도이다.
“중국이 한반도의 전쟁이나 북한의 붕괴를 원하지 않으므로 전쟁은 없다”는 얘기도 있다. “일본이 당장은 미국과의 공조를 위해 대북 제재에 앞장서고 있지만 실제로는 한반도의 전쟁을 원치 않는다”는 얘기도 있다. 그러나 경제 발전을 최우선으로 추진하는 중국으로서는 미국과의 관계 악화를 용인할 수 없으며, 최악의 경우 북한을 포기할 수도 있다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일본 또한 북한의 미사일이 자국을 겨냥할 수 있다는 가정 아래 북한에 대한 ‘선제공격’을 거론하는 게 현실이다. 무엇보다도 다른 나라들의 이해관계에 한반도의 전쟁과 평화 문제를 맡긴다는 것이야말로 우리가 경계해야 할, 주인답지 못한 태도 아닌가.
전쟁을 막기 위한 작은 몸부림 – 4편의 다큐멘터리
올해 MBC 10대기획의 하나인 <정전50주년특별기획 - 끝나지 않은 전쟁>은 바로 우리 힘으로 한반도의 전쟁을 막기 위해 우리가 할 일을 생각해 보자는 뜻으로 기획된 4부작 다큐멘터리다.
1편 ‘2003, 위기의 한반도’(PD 이채훈)에서는 ‘테러와의 전쟁’ 이후 변화한 미국 사회의 분위기를 진단하고 대북 강경책을 주도하고 있는 미국 매파들의 목소리와 평화를 추구하는 미국 지식인·시민들의 반응을 미국 현지 취재로 알아본다. 제2편 ‘한반도와 핵’(PD 이선태)에서는 우리 민족은 물론 인류의 대재앙을 불러올 수 있는 한반도 핵무기, 그 역사를 살펴보고 현안 핵 위기의 기본 구조를 밝힌다.
제3편 ‘거대한 폭풍, 한반도 주변 4강’(PD 배연규)는 북한 핵 문제를 둘러싼 중국, 일본 등 주변 열강들의 기본 방침과 이해관계를 중국·일본·미국·러시아 현지 취재로 정리한다. 제4편 ‘평화의 조건’(PD 김상균)은 전쟁의 위기를 막고 한반도 평화체제를 이루기 위해서 한국 정부와 평범한 시민들이 할 수 있는 역할은 무엇인지 알아본다.
전쟁 발발 가능성, 1994년보다 높다.
지금의 전쟁 위기는 북한의 핵개발 계획을 둘러싼 미국과 북한의 첨예한 대립에서 비롯된다. 1994년 전쟁 일보직전까지 갔던 북한의 핵위기는 카터 전 대통령과 김일성 주석의 극적인 타협으로 평화적 해결의 실마리를 찾았다. 북한은 핵 개발을 동결하는 동시에 NPT에 복귀하기로 했고, 미국은 북한을 핵무기로 위협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핵 포기’라는 ‘주권 제한’의 대가로 미국은 북한에 대해 중유를 제공하고 경수로 건설을 지원하기로 했다. 1994년의 ‘제네바 합의’(Agreed Framework)는 북미 관계 개선의 중요한 전기가 되는 듯 했다.
그러나 9년이 지난 지금 제네바 합의는 휴지조각이 되어 버리고 말았다. 북한과 미국은 서로 상대방이 이 합의를 파기했다고 비난하며 한치의 양보도 없이 맞서고 있다. 미국은 “북한이 제네바 합의를 무시한 채 비밀리에 핵을 개발했다”고 비난한다. 북한은 “미국이 팀 스피리트 훈련 등 핵전쟁 연습으로 북한을 위협했으며, 부시 대통령의 ‘악의 축’ 발언으로 침략 의도를 노골적으로 드러냈다”고 비난한다. 이러한 극단적인 적대감 속에서 북한과 미국은 서로 마주 달리는 기관차처럼 폭발을 향해 치닫고 있다. 극적인 전환점이 없는 한 충돌은 시간문제인 것처럼 보인다.
9·11 이후 미국 본토가 테러리스트들의 공격 목표가 된 상황에서 북한의 핵 개발을 묵인할 수 없다는 게 미국의 방침이다. 북한의 핵탄두(1, 2개가 있는지 6, 7개 있는지, 아니면 아직 없는지 분명치 않다)는 장거리 미사일과 결합되어 알래스카 등 미국 본토를 위협할 가능성이 있으며, 북한이 플루토늄을 국제 테러리스트 조직에게 판매할 경우 미국의 심장부가 핵 테러 위협에 처할 수도 있다는 논리를 편다.
이러한 기본 방침은 북한에 대한 ‘선제 공격’(preemptive strike)을 합리화하는 근거가 되며, 미래에 발생할지도 모르는 위협에 미리 대처한다는 ‘예방 전쟁’(preventive war) 이론으로까지 확대되었다. ‘독재국가’로서 대량살상무기 확산의 가능성이 가장 높다고 미국이 점찍은 나라가 바로 북한이다.
대화의 싹이 보이지 않는다.
그러면 북한의 태도는 어떤가? 작년까지만 해도 “미국이 있지도 않은 핵무기를 거론하며 공공연히 대북 적대정책을 편다”고 주장하던 북한은 작년 10월 방북 중인 켈리 미국무부 차관보에게 “농축 우라늄은 물론 그보다 더한 무기도 가질 자격이 있다”고 공언하더니 올해 5월 베이징 3자회담에서는 아예 “핵무기를 가지고 있다”고 선언하며 미국에 정면으로 맞서기 시작했다.
북한은 1994년과 같은 포괄적 합의를 통해 체제 안전을 보장받고 경제 지원을 이끌어 내자는 의도로 보인다. 그러나 문제는 부시 행정부가 이러한 북한의 ‘벼랑 끝 전술’(brinksmanship)을 ‘공갈’(blackmail)로 간주, 이에 굴복하거나 타협하지 않겠다는 점을 분명하고 단호하게 밝히고 있다는 점이다. 부시 행정부는 클린턴 정부가 ‘제네바 합의’에 사인한 것을 북한에 대한 ‘굴복’이자 결정적인 잘못으로 간주하고 있다. 따라서 북한이 강경한 태도로 미국을 협상 테이블에 끌어내는 것은 실현 불가능한 꿈으로 보인다.
북한은 이라크 전쟁을 보면서 “IAEA의 사찰 수용 등 이라크가 유화적인 태도를 취했는데도 미국은 침략을 강행했다”고 주장하며 “전쟁을 억지할 수 있는 것은 오직 강력한 자위력 뿐”이라며 핵무장을 합리화한다. 이에 대해 미국은 “이라크가 강경한 태도를 유지했다면 더욱 강력한 미국의 공격을 자초했을 것”이라고 북한에 경고한다.
전쟁 초읽기는 이미 시작됐다.
한반도에서 전쟁이 일어날 경우 어떤 경로로 전개되고, 어떤 결과를 낳게 될까? 이라크 전쟁을 기획한 미국의 대표적인 매파 전략가인 리처드 펄(국방정책자문위원)은 “한반도의 유일한 전쟁 시나리오는 전쟁이 일어나고 북한 정권이 신속하게 붕괴한다는 것”이라고 짧게 대답했다.
취재 중 만난 전문가들은 미국이 1994년처럼 영변 핵시설에 대한 ‘족집게 폭격’(surgical strike)을 하고 북한이 반격을 포기하는 수준의 ‘낙관적’ 시나리오로는 충분하지 않다고 말한다. 북한이 농축 우라늄이나 플루토늄을 개발했다면 다른 곳으로 옮겨 놓았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영변 폭격만으로는 목적을 달성할 수 없으며, 따라서 전쟁을 한다면 김정일 정권의 붕괴를 목표로 하는 전면전이 불가피하다는 것이다.
미국의 군사연구단체인 지구안보연구소(Global Security/www.globalsecurity.org)는 한반도 전쟁 발발 예상일을 초읽기하고 있다. 전쟁은 미국의 선제공격일 수도 있고 이러한 공격이 기정사실로 판단될 경우 북한이 먼저 공격할 수도 있다.
악몽의 시나리오- 한반도의 새로운 전쟁은
‘전면전’이고 ‘핵전쟁’이고 또 한번의 ‘동족상잔’이다.
미국의 매파 전략가들과 군사전문가들은 최악의 경우 미국이 영변 등 핵시설을 공격하거나 김정일에 대한 ‘족집게 폭격’을 할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으면서도 대체로 “미국이 먼저 공격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입을 모은다. 한반도는 이라크나 이란과 달리 비무장지대 좁은 지역에 2백만명 가까운 병력이 밀집되어 있고 수도 서울이 북한의 장거리포 사정권 안에 있기 때문에 전쟁 발발 시 100만명에 달하는 사망자가 발생할 것으로 예상된다.
이와 관련 최근 미2사단과 용산 본부를 평택 이남으로 이전하는 등 주한미군을 재배치하려는 움직임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이러한 후방 배치가 전쟁 발발시 미군의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한 사전 포석임을 취재 중에 만난 미국의 그 누구도 부인하지 않았다. 누가 먼저 공격을 시작하든 전쟁이 일어나면 대량 인명 살상이 예상되는 휴전선과 수도권 인근의 지상전은 한국군이 담당하고 미국은 해군과 공군을 동원하여 핵 시설로 추정되는 곳과 김정일이 위치한 곳을 집중 공격한다는 게 대체적인 미국의 전쟁 전략이다. 미국의 대표적인 매파 전략가인 리처드 펄은 “휴전선 인근에서 한국인들이 서로 죽고 죽이는 것은 그들의 문제”라는 취지의 발언을 했다.
한국 전쟁 당시 26발의 원자탄을 사용할 것을 검토했던 미국은 1958년부터 전술 핵무기를 한반도에 반입, 한때 1,000기가 넘는 핵무기가 남한에 배치된 바 있다. 팀스피리트 훈련은 북한에 대한 핵 공격에 대비한 실전훈련이다. 북한이 이에 대해 극심한 공포를 느끼며 격렬히 반발해 온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1992년 냉전 종식 이후 한반도의 핵무기는 모두 철수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런데 미국은 2002년 1월의 ‘핵태세보고서’(NPR)에서 북한에 대한 핵 선제공격 가능성을 명시했고, 그해 9월 의회에 제출한 ‘국가안보보고서’에서 이 방침을 재확인했다. 유사시 핵 항공모함이나 잠수함에서 북한을 겨냥한 핵무기 발사가 언제든지 가능한 것이다. 그리고 핵공격 대상으로 지목된 국가들 중 제일 먼저 언급되는 게 다름 아닌 북한이다.
미국은 ‘족집게 폭격’의 효율성을 극대화하기 위해 저강도 핵무기인 ‘벙커 버스터’의 성능을 개선하는 데에 주력하고 있으며, 아예 이를 수소폭탄으로 개조하고 있다고 한다. 핵보유국이 비보유국을 핵무기로 위협하지 않는다는 대전제에서 핵확산을 억지하는 NPT의 기본정신과 ‘제네바 합의’의 핵심조항을 미국이 유린했다는 게 북한의 주장이다.
김정일이 은신한 지하 벙커에 대한 미국의 핵공격이든, 영변 핵 시설에 대한 미국의 폭격이든, 남한의 핵 시설에 대한 북한의 보복 공격이든 한반도에 돌이킬 수 없는 대재앙을 초래할 수 있다. 거대한 방사능 유출로 한반도는 수백년간 죽음의 땅으로 변해 버릴 수 있는 것이다.
북한이 선제공격할 가능성도 있다.
한국전쟁 당시 미군의 무차별 북폭을 경험한 북한 주민들은 전쟁에 대해 격렬한 공포감을 갖고 있다. 그러나 불가피하게 전쟁이 일어날 경우 미국에 정면으로 대항하겠다는 의지 또한 강력하다. 북한이 겪고 있는 경제난과 기아 사태는 결국 미국의 경제 제재 때문이라고 북한 사람들은 믿고 있다. 미국의 다큐멘터리스트 마이클 그랜트가 최근 북한 현지에 들어가서 촬영한 화면에는 미국과의 갈등을 보는 북한 주민들의 생생한 증언이 담겨 있다. 그들은 전쟁은 피해야 하지만 불가피하게 일어날 전쟁이라면 당당하게 맞서겠다고 말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북한이 선제공격을 할 가능성은? 자살인 줄 뻔히 알면서도 북한이 선제공격을 할 수 있을 것인가? 그럴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는 게 취재 현장에서 만난 사람들의 공통된 지적이었다. 미국의 위협이 극대화된 상황에서 북한은 가만히 앉아서 당하는 것보다는 먼저 공격하여 미국에게 피해를 입히는 것이 낫다고 생각할 수 있다는 것이다. 공격받은 전갈이 상대방을 물고 나서 죽듯이, 북한은 미국에게 강력한 도발을 할 가능성이 있다.
미국의 핵문제 연구기관인 노틸러스 연구소의 피터 헤이스 소장은 미국의 경제 제재가 심화되고 실제 무력 공격을 할 게 예상되면 북한이 선제공격을 할 수도 있다고 지적하며, 북한이 취할 수 있는 군사적 행동 방안을 분석했다. 서해 북방한계선(NLL)에서의 선제공격, 미군 정찰기 격추, 휴전선 일대에 배치된 10,000여대의 장사정포를 사용한 미군 시설에 대한 전면공격, 일본의 미군기지에 대한 미사일 공격 등 모두 12가지 경우의 수가 있다는 것이다.
어느 경우든 미국은 전면적인 반격으로 북한 정권 타도에 나설 것이다. 미국이 공해상에서 핵무기나 미사일, 마약(?)을 실은 북한 선박과 항공기를 나포하거나 공격할 경우 북한이 어떻게 대응할지도 미지수다. 북한이 이에 대해 ‘저강도’의 보복을 해도 사태는 걷잡을 수 없이 확대될 수 있다. 사소한 충돌이나 우발적인 교전이 대규모 무력충돌로 비화할 가능성이 언제라도 있는 것이다.
미국의 ‘외교적 해결’ 그 본질은?
미국이 말하는 ‘외교적 해결’은 국제 공조를 통해 북한을 지속적으로 압박하여 핵 포기를 유도해 나간다는 전략이다. 다시 말해 북한은 계속 강화되는 국제적인 경제 제재와 봉쇄 앞에 무릎을 꿇고 핵 포기를 선언하든지, 아니면 체제 붕괴를 감수해야 하는 극단적인 선택을 해야만 하는 것이다. 국제적인 고립, 날로 악화되는 경제 사정 등 시간이 갈수록 북한은 생존이 어려워지는 것이다.
미국은 북한에 대해 ‘대화는 하되 흥정은 하지 않는다’는 외교 원칙을 유지하고 있는데, 이를 가리키는 ‘악의적 무시’(malign neglect)는 이미 널리 쓰이는 용어다. 북한 체제가 스스로 붕괴하든지, 아니면 북한이 최후의 선택으로 무력 공격을 감행하든지 미국은 대응할 능력이 있으며, 어느 경우든 시간은 결코 북한 편이 아니라는 것이 미국의 계산이다. 미국의 ‘외교적 해결’은 무력 사용을 마지막 카드로 준비한 채 압박을 강화하고, 일단 전쟁이 일어나면 즉각 북한 정권을 타도한다는 전략이다.
미국은 북한을 군사적으로 압도할 능력을 갖고 있는 게 사실이다. 하지만 미국으로서도 쉽사리 전쟁을 감행하기 어려운 조건인 것 또한 사실이다. 대참화를 불러올 게 뻔한 이 전쟁에서 미국은 가급적이면 선제공격에 따르는 도덕적 책임을 피해 가고 싶어하는 것이다.
미디어와 기독교 근본주의
지난 5월 <월스트리트 저널>이 실시한 미국내 여론조사는 “대량살상무기(WMD) 보유국에 대한 공격을 63%의 미국인이 지지한다”고 밝혔다. 미국의 언론은 앞다투어 북핵의 위험성을 알리는 특집을 방송하고 있다. 루퍼트 머독의 폭스 뉴스가 주도한 언론의 우경화는 이제 CNN과 PBS까지 확대되어, 미국 언론에서 다양성을 찾아보기 힘들게 됐다. 미국 언론에 비친 미군의 이미지는 선량하고 친근하다. 미국인들은 부시 행정부가 조장하고 언론이 확대재생산한 전쟁 논리에 수동적으로 세뇌되고 있다. 미국인들은 정치적 무관심 속에서 부시 행정부가 주도하는 군국주의적 세계지배 전략을 무기력하게 추종하고 있다. 민주당마저 과거 야당이 수행하던 비판적 기능을 상실했다.
극우적인 기독교 근본주의도 더욱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700 Club’을 통해 영향력을 확대해 온 팻 로버트슨 등 극우 근본주의자들은 이제 부시 행정부 내에 막강한 정치적 기반을 구축하고 있다. 이들은 세계를 ‘선과 악’의 단순한 이분법으로 보며 미국이 수행하는 공격적 대외정책을 미화하는데 앞장선다. 부시의 ‘악의 축’ 발언도 기독교 근본주의의 냄새를 물씬 풍긴다. 이라크, 북한, 이란의 지도자들을 ‘악마’의 이미지로 색칠하고 미국의 ‘테러와의 전쟁’에 하느님이 함께 한다고 주장하는 부시의 연설들은 모두 기독교 근본주의의 영향을 보여주는 것이다.
부시 본인이 기독교 근본주의자인 빌리 그래엄의 안수기도를 받은 뒤 정계에 들어간 사실이 말해주듯, 이제 한반도 전쟁위기를 말할 때 기독교 근본주의의 영향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미소짓는 파시즘’과 ‘뒤집어진 전체주의’
이러한 미국의 시스템을 시카고 대학의 프랜시스 보일 교수는 ‘미소짓는 파시즘’으로 규정했다. 물질적 풍요의 이미지 속에서 세계 유일의 초강대국이라는 자부심을 내면화시키고 소수 집권층의 전횡을 수수방관하도록 유도하는 새로운 형태의 파시즘이라는 것이다. 프린스톤대 명예교수인 셸던 울린 교수는 미국이 ‘뒤집어진 전체주의’ 체제가 됐다고 진단했다. “히틀러의 전체주의나 조지 부시의 전체주의는 팽창과 세계 지배를 꿈꾼다는 점에서 본질적으로 같다. 그러나 히틀러가 대중의 직접 참여를 유도하고 선동한 반면 부시는 대중의 무관심을 조장하고 마음대로 통치한다. 히틀러가 세계에 대한 무차별적인 군사 공격을 택한 반면 미국은 ‘테러와의 전쟁’이라는 이데올로기 아래 신자유주의의 끝없는 확산을 추구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진보적 학자들의 비판을 증명이라도 하듯 부시 행정부 내에 영향력을 미치는 극우 이론가 토마스 바넷(미국방성자문위원·해군전쟁대학 교수)의 이론은 미국의 새로운 세계지배 전략을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미국의 신자유주의가 통용되는 ‘투명한’ 국가들을 그는 코어(Core) 국가로, 그렇지 않은 국가들을 갭(Gap) 국가로 분류한다. 그에 따르면 이스라엘은 갭 국가들에 둘러싸인 코어 국가고, 북한은 코어 국가들에 둘러싸인 갭 국가이다. 신자유주의의 확산에 걸림돌이 되고 속셈을 알 수 없는 갭 국가들을 미국의 영향권 아래 확실히 편입시키는 것이 앞으로 미국의 세계전략의 기조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토마스 바넷이 보여준 세계지도는 중동 지역과 아프리카 대부분 지역, 중남미의 상당수 국가들, 그리고 동아시아의 북한을 흉물스런 검은 색으로 묘사하고 있었다. 그의 이론에 따르면 “이라크 다음은 아마도 북한”이라는 것이다.
거대한 폭풍, 한반도 주변 정세
내년으로 다가온 미국의 대선도 중요한 변수가 된다. <코리언 엔드게임>의 저자 셀리그 해리슨은 “부시 행정부가 이라크 전후 처리 문제를 비롯한 중동 문제로 2004년 대선 전까지는 북한을 공격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분석하고, “그가 대선에서 재집권에 성공하면 아마도 미처 못한 일(북한에 대한 공격)을 마저 하려 들 것”이라고 전망했다. 그러나 시카고대의 프랜시스 보일은 “내년 대선을 앞두고 부시가 한반도의 위기를 극대화시켜 지지율을 높이려고 할 가능성이 높다”고 진단했다. 어느 경우든 우리의 뜻과 관계없이 한반도는 시한폭탄처럼 위기를 향해 가고 있는 것이다.
북핵 문제의 평화적 해결을 위해 중국은 중요한 역할을 할 것으로 예상된다. 정전협정의 당사자로서 중국은 북한의 핵무장을 원치 않는 동시에 북한의 체제 붕괴도 원치 않는다. 그러나 경제 개발을 최우선으로 추진하는 처지에서 미국과의 관계 악화는 중국으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중국의 정치학자 커커우는 “중국의 기본 목표는 경제발전과 대만과의 통일에 영향을 미치지 않도록 하는 것”이며, “결론적으로 이러한 두 가지 목표를 위해서는 북한을 희생해도 좋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것은 북한이 미국에게 ‘핵위협’을 할 때 반드시 확실하게 알아야 할 사실”이라는 것이다.
한편 일본은 미국의 대북 강경책에 편승해 유사법안을 통과시키는 등 노골적으로 군국주의를 향해 치닫고 있다. 일본은 북한 미사일이 자국을 정면으로 겨냥할 수 있는 상황에서 한반도의 전쟁을 원치 않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미국의 강경 드라이브에 편승해 노골적으로 군국주의의 본성을 드러내고 북한에 대한 경제 제재에 앞장서는 등 예측불허의 모습을 보이고 있다. 한반도를 둘러싼 강대국들의 복잡한 이해 관계의 충돌은 정치적 갈등과 군사적 불안을 초래할 수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는 어떻게 동북아의 평화를 꽃피울 수 있을까?
한국 정부가 평화에 앞장서야 한다.
<한국전쟁의 기원>을 쓴 브루스 커밍스는(시카고대 교수)는 정전협정 중 ‘신무기 도입을 금지한 13항 ’, ‘평화협정 체결을 건의한 60항’ 등의 조항만 지켜졌어도 한반도에는 평화가 왔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미국의 진보적 언론인이자 한반도 문제 전문가인 셀리그 해리슨(존스 홉킨스 대학 교수)은 지금의 주한미군 재배치는 오히려 공격적인 움직임이며, 한반도 평화에 역행하는 것이라고 지적한다. 그는 불안정한 정전체제를 끝내고 동북아 평화체제를 이루기 위해서는 미국이 동북아에서 탈개입 정책을 취하고 주한미군의 성격이 평화적인 목적으로 전환돼야 한다고 강조한다.
지금의 전쟁 위기는 잘 돌파하면 항구적인 동북아 평화체제의 초석을 놓을 기회로 만들 수 있다. 미국과 북한이 한치의 타협의 여지도 없이 대립하고 있고 중국과 일본의 태도를 예측하기 어려운 현 상황에서 믿을 것은 우리 자신 뿐이다. 아무리 우리 힘이 상대적으로 미약하더라도 한반도의 운명을 결정할 선택은 우리 자신의 손에 달려 있다.
미국을 먼저 설득하기는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북한을 설득하는 게 먼저이다. 북한의 핵 포기를 설득하고 파격적인 경제 지원을 약속하는 게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다. 북한은 이미 노무현 정부의 설득을 무시하고 5월 베이징 3자회담에서 ‘핵 보유’를 선언한 바 있다. 무한한 인내와 자제력을 요구하는 일이다. 그러나 이밖에 어떤 대안이 있는가?
이와 관련, 국내의 젊은 평화운동가 정욱식(평화네트워크 대표)의 제안은 경청할 만하다. 지금 상황은 북한과 미국이 힘을 다해 고무줄을 잡아당기고 있는 형국이다. 북한이 먼저 고무줄을 놓아서(핵포기를 선언해서) 미국과의 갈등을 해소하거나 최소한 미국이 강공책을 추진할 정치적 명분을 제거해 버리는 것이다.
힘이 강한 미국은 휘청거리겠지만 힘이 약한 북한은 뒤로 나동그라질 것이다. 이 때 한국이 할 수 있는 일은 북한이 넘어질 자리에 매트리스를 깔아주는 것이다. 북한에게 경제 지원을 제공하는 동시에 미국에 대해서는 북한에 대한 강공책을 포기하도록 설득할 수 있는 여지가 생긴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 노무현 대통령이 그동안의 애매모호한 외교적 태도를 불식하고 김정일 국방위원장과의 정상회담을 적극 추진하여 성사시키는 게 필요하다.
북한이 이를 얼마나 전향적으로 검토할지도 미지수고, 남한 보수세력의 강력한 반발이 예상되는 것도 사실이다. 이러한 꿈이 실현된다 하더라도 미국이 남한 정부를 무시한 채 북한에 대한 강공책을 버리지 않을 가능성도 있다. 어쨌든 굉장히 순진한 얘기로 보일 수도 있음을 인정한다. 그러나 이밖에 다른 대안이 있는가?
풀뿌리 시민들이 할 수 있는 일
전쟁 없는 한반도를 이루기 위해 풀뿌리 시민들이 할 수 있는 일도 있다. 이라크 전쟁 후 세계 각국에서 평화운동의 움직임이 활발히 일어났다. 전쟁현장인 이라크에 가서 ‘인간방패’라는 이름으로 몸을 바쳐 평화를 위해 싸우는 사람들도 있고, 온몸으로 참회하며 평화를 기원하는 ‘삼보일배’라는 방법으로 행동하는 사람들도 있다.
매향리 기지 반대투쟁에 헌신해 온 사람들, 핵잠수함 반대운동인 ‘트라이던트 보습 만들기’를 이끈 영국의 앤지 젤터, 팔레스타인 가자지구의‘검은 옷을 입은 여인들,’대인지뢰금지운동으로 노벨평화상을 수상한 조디 윌리엄스, 핵무기의 일본 반입에 반대하는 고베 시의원 등 대표적인 평화운동가들의 활동을 소개하고 이들이 말하는 한반도 평화의 조건을 들어보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일 것이다.
전세계 시민들의 반전운동은 이제 인터넷을 통해 ‘글로벌 네트’를 구축하고 있다. 전쟁 이후 5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전쟁의 아픔을 생생히 기억하며 몸서리치며 공포에 떠는 사람들, 드러나지 않은 여러 곳에서 아직도 전쟁의 아픔에 시달리는 사람들. 이들의 힘은 동북아와 한반도의 평화를 이뤄낼 수 있는 기본 동력이 될 것이다. 우리 시민들이 자신의 일상의 자리에서 한반도의 평화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 것인지 성찰할 수 있는 계기를 제공한다.
우리 제작팀은 두 번 다시 전쟁의 아픔을 겪지 않아야 한다는 생각에서 반전평화를 외치는 국내외 대표적인 반전평화운동가들의 활동을 탐색함으로써 한반도 평화를 위해 우리 시민들이 각자의 일상에서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모색한다.
이 프로그램의 마지막편에 담기 위해 넬슨 만델라, 조디 윌리엄스, 메어리드 코리건 마기르, 아돌포 페레스 에스키벨, 호세 라모스등 노벨평화상 수상자들을 섭외하고 있다. 이들의 목소리로 한반도 평화를 염원하는 간절한 메시지를 전달할 예정이다.
출처 : 오마이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