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일본에 이어 중국을 방문 중인 노무현 대통령이 7일 후진타오 주석과 정상회담을 갖고 북한 핵문제의 평화적 해결 원칙을 재차 천명했다. 특히 핵문제를 둘러싼 북미간의 대결 구도 악화와 동북아 군비경쟁 가속화에 촉각을 곤두세워온 중국이 적극적인 역할을 재차 다짐하고 나서 한국과 중국의 중재에 의한 다자회담 개최 가능성도 점쳐지고 있다.
후진타오 주석은 정상회담을 마치고 가진 기자회견에서 한반도 비핵화 지지 및 대화를 통한 평화적 해결 원칙을 거듭 확인하면서 △ 북-중간에 의사소통 채널 유지 △ 정세 악화 반대 및 돌파구 마련 노력 △ 북한의 안보 우려도 진지한 고려 등을 강조했다. 중국의 국가 주석이 대외 문제와 관련해 이와 같이 상세하고도 적극적인 입장을 피력한 것은 대단히 이례적인 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이는 북미간의 긴장이 계속 고조되고 북핵 문제를 틈타 한미, 미일 군사동맹 체제 및 미사일방어체제(MD) 구축이 가속화되고 있는 현실에 대한 우회적이지만 강력한 견제 의사를 피력한 것으로 해석된다. 즉, 북한의 핵무장도 절대로 안되지만, 이를 빌미로 무력충돌이나 북한의 붕괴를 가져올 수 있는 봉쇄 및 제재, 그리고 MD 등 군비강화 움직임도 반대한다는 뜻을 나타난 것이다.
미국 국무부, “다자회담으로 對北 안전보장 논의하자”
중국 정부의 이와 같은 적극적인 움직임은 미국에게도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다. 미 국무부의 리처드 바우처 대변인은 7일(미국 시간) 정례 브리핑에서 “한중 정상회담에서 중국의 후진타오 주석이 북한의 핵개발 중단은 대북 안전보장과 병행돼야 한다고 말한데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을 받고, “우리는 이미 북한을 공격하거나 침공할 의도가 없음을 분명히 밝혔으며 더 구체적인 논의는 앞으로 다자 회담에서 이뤄질 수 있을 것”고 답변했다.
이는 비록 부시 행정부 내에서 상대적으로 온건론을 대변해온 국무부의 입장이긴 하지만, 북한에 대한 불침공 의사를 다시 한번 확인했다는 점에서 적지 않은 의의가 있다. 부시 행정부는 올해 초까지 북한을 침공할 의사가 없다고 밝혔으나, 최근 들어서는 “선제공격을 포함한 모든 옵션을 테이블에 올려놓고 있다”며 북한을 강하게 압박해왔기 때문이다.
더욱 중요한 점은 북한의 체제안전보장 문제를 다자회담의 의제로 삼을 수 있다는 점을 공식적으로 밝혔다는 점이다. 부시 행정부는 지금까지 다자회담을 주장하면서도, 우선적으로 북한의 핵 프로그램을 신속하고 검증가능하며 돌이킬 수 없는 방법으로 폐기해야 한다는 입장을 견지해왔다.
그러나 바우처 대변인은 이 날 “(북한의 안전 보장 문제를) 어떻게 진전시킬 지는 다자회담에서 논의하자”는 것이 미국의 입장이라고 밝힘으로써, 다자회담 의제의 ‘형평성’을 만들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제공했다.
북한, 적극적인 자세로 나와야
다자회담을 미국의 시간끌기 전략으로 보고 있는 북한으로서도 이 점을 최대한 활용할 필요가 있다. 일단 미 국무부가 핵문제와 함께 북한의 안전보장 문제를 다자회담에서 논의할 수 있다고 밝힌 만큼, ‘동시적 해결’의 물꼬를 틀 수 있는 최소한의 조건은 만들어졌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북한으로서는 미 국무부 대변인의 발언을 ‘함량미달’로 볼 수도 있지만, 이를 수용해 다자회담에 나서는 것이 미국 내 협상파들의 입지를 강화시켜준다는 것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한중정상회담과 이에 대한 미 국무부의 호응을 통해 못처럼 조성된 평화적 해결 분위기가 북한의 거듭된 다자회담 거부로 저해될 경우, “북한의 본질적인 목적은 핵무장에 있다”는 미국 내 강경파들의 입지를 강화시키면서 본격적인 봉쇄와 제재 국면으로 넘어갈 수 있다는 점을 북한은 인식해야 한다는 것이다.
북한이 우려해온 미국의 선제공격 가능성과 관련해서도, 오랜만에 미 국무부가 불침공 의사를 밝힌 만큼, 북한이 다자회담에 응하고 나옴으로써 ‘정치적 구속력’을 부여할 필요가 있다. 또한 다자회담이 열리면 미국 주도의 대북한 봉쇄 및 제재 전략도 상당 부분 지장을 받을 수밖에 없다는 점도 중요한 대목이다. 특히 8월말에 경수로 사업이 중단될 가능성이 대단히 높은 현실에서 조속한 다자회담 성사를 통한 상황 반전이 절실한 상황이다.
4자? 5자? 6자?… 노 정부 전략 세워야
또 한가지 중요한 문제는 다자회담의 참가국 수이다. 지난 4월말 북한, 미국, 중국 3자로 시작된 다자회담은, 이후 미국은 한국과 일본까지 포함한 5자회담으로 가야된다는 입장을 정한 상태이고, 한국과 일본도 이에 동의하고 있다.
반면 북한은 북미 직접대화를 먼저 갖고 이후에 다자회담을 갖자는 제안을 했으나, 미국이 이를 거부하자 최근에는 남한까지 참여하는 4자회담은 수용할 수 있다는 입장을 중국을 통해 미국에게 전달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미국은 이를 공식적으로 확인해주지 않고 있고, 5자 회담이나 러시아까지 참여하는 6자 회담을 고수하고 있는 상황이다.
이번 한중정상회담에서도 다자회담에 대한 ‘모호성’은 재차 확인되었다. 특히 이 과정에서 노무현 정부가 또 다시 외교적인 미숙함을 드러내 빈축을 사고 있다.
<한겨레> 8일자에 따르면 노무현 정부는 한중 양국은 ‘확대’ 다자회담 개최를 위해 노력하기로 했다고 정상회담전에 배포한 보도자료를 통해 설명했지만, 정작 정상회담이 끝난 후에 이러한 내용은 포함되지 않았다.
한중정상회담이 끝난 후 가진 기자회견에서 노 대통령은 다자회담과 관련해 “당사자간의 대화가 조속히 재개되어야 한다”고 밝혔고, 후진타오 주석은 “관련국가들과 적극적으로 협의할 것”이라며 말을 아꼈다. 마치 한중 정상간에 ‘확대’ 다자회담에 합의한 것처럼 보도자료를 배포했지만, 북한을 의식한 중국의 거부로 합의에 도달하지 못했다는 것을 사후적으로 보여준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 정상회담을 통해 중국의 적극적인 문제 해결 의지를 확인한 것은 큰 성과라고 할 수 있다. 이는 기본적으로 북한 핵무장 불용, 한반도의 안정과 평화 유지, 핵문제의 평화적 해결이라는 대원칙을 한중 사이에 공유하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이제 한중 정상회담 결과를 바탕으로 다자회담 개최를 위해 총력을 기울일 때이다. 다자회담 형식과 관련해서는 러시아까지 포함한 6자 회담이 현재로서는 가장 바람직한 틀이라고 할 수 있다. 러시아 역시 북한의 핵폐기와 안전보장을 동시적으로 해결해야 한다는 입장을 갖고 있고 다자회담 참가 의사를 밝혀온 만큼, 충분히 현실성 있는 대안이라고 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노무현 정부가 지금까지의 소극적이고 일관성이 부족한 태도에서 벗어나 다자회담이 실질적인 문제 해결의 방식이 될 수 있도록 치밀하고도 적극적인 전략을 세워야 한다는 점이다.
분명한 것은 모처럼 한반도 위기의 평화적 해결 분위기가 조성되고 있다는 것이고, 이 국면에서 문제 해결의 돌파구를 반드시 마련해야 한다는 것이다. 가능성을 현실로 만들 수 있는 정치외교적 노력이 어느 때보다 절실한 상황인 것이다.
출처 : 오마이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