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집 텔레비전은 새벽 2시가 돼야 꺼진다. 주요채널은 8번, 10번, 12번. SBS가 5번, 7번과 9번이 KBS1, 2 그리고 11번이 MBC이니까 우리 집 주요채널은 ‘공중파’가 아니다. 8번, 10번, 12번은 바로 ‘쇼핑채널’이다. 그리고 채널 선택권은 아내에게 있다.
LG, 우리, CJ, 현대. 이렇게 4개의 홈쇼핑을 보면서 아내는 (당연히) 쇼핑을 한다. 그런데, 그녀가 사는 것은 러닝머신이나 이동갈비 같은 게 아니다. 그녀는 ‘속옷’을 산다. 문제는 속옷을 너무 많이 산다는 데 있다.
아내가 한 달에 구입하는 속옷은 평균 다섯 벌. 브래지어와 팬티 세트는 기본이고, 거들에 체형보정 속옷까지 종류도 다양하다. 날마다 갈아입어도 가지고 있는 속옷을 다 입어보려면 딱 두 달이 걸릴 정도다. 그럼에도 아내는 ‘속옷 쇼핑’을 멈출 줄 모른다.
아내가 속옷을 사는 이유는 여러 가지다. 새로 산 속옷이 온몸을 단단하게 감싸줄 때의 안도감, 그리고 세탁 전의 새 옷에서 풍기는 냄새가 좋아서란다. 하지만 정작 그것들보다 서른두 배 정도는 중요하게 생각하는 이유가 있다. ‘남편 바람막이용’이라는 게 바로 그것. 근거는 이렇다. 장인, 그러니까 그녀의 아버지는 젊어서 바람기가 많았다. 속만 끓이던 장모, 남편의 바람기를 어떻게 잡을 것인가 해결책을 찾기 시작했는데 그게 영 엉뚱한 데서 결론이 났다. 바로 속옷. 예전에야 깔끔한 속옷에 신경 쓰는 여자가 많지 않았다. 세탁이야 했겠지만 적당히 색깔도 바래고 허리 고무줄도 늘어났을 터. 사실 뭐, 어차피 속옷 보여줄 사이라면 ‘벗어버리면 될 속옷’ 따위 뭘 신경 썼겠는가. 로맨스도 아니고 그저 불륜일 텐데. 상대적으로 ‘매력적인 속옷’으로 승부를 걸 만하다고 판단한 장모, 그 길로 최신 유행에 비싼 외제 속옷들까지 준비하기 시작했고 덤으로 사시사철 새 이불을 준비했단다. 아무튼, 바람녀의 속옷에 실망했던지 아니면 이제는 가정을 지키자고 생각했던 것인지 장인어른은 가정으로 돌아왔고 그뒤로는 ‘행복하게 살았더래요’가 이 황당한 이야기의 결말이다.
내가 바람을 피운 것은 아니다, 아직까지는. 딱 한번, 심각할 뻔했던 총무부 미스 김과 한밤중에 통화하다 들킨 적은 있지만 그건 ‘바람’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속옷의 영험함’을 믿는 아내는 속옷쇼핑을 시작했다. 그녀를 탓하지는 못했다. 그저 ‘날 그렇게 못 믿느냐. 내가 당신 놔두고 바람 피울 것 같냐’는 볼멘소리를 할 뿐.
그렇게 하나둘 늘어나는 아내의 속옷이 맘에라도 들면 다행일 텐데. 나는 도대체 맘에 안 든다. 먼저, 자수가 들어간 속옷은 감촉이 나쁘다. 껴안을 때 브래지어의 꽃무늬 자수가 내 가슴을 긁을 때면 기분이 불쾌해진다. 마치 긴 손톱을 가진 여자(실은 동화 『백설공주』에 나오는 ‘늙은 마녀’가 생각난다)가 내 가슴을 슥슥 긁고 있는 착각이 들어서 온몸이 쭈뼛 선다.
색깔도 맘에 안 든다. 빨간색, 자주색도 모자라서 금색까지. 번쩍번쩍 거리는 브래지어와 팬티를 입고 있는 아내를 볼 때면 내가 ‘투탕카멘’이라도 된 기분이 든다. 러시언 모델들이 입은 속옷들은 온통 남편을 학수고대하는 ‘아줌마’들 주머니를 털어낼 요량으로 만든 것 같다. 디자인부터 다분히 남편 취향이 아니라 ‘그녀들의 취향’. 하긴, 대부분의 디자이너가 여자일 테니 전혀 근거가 없는 것도 아닐 테다. 이쯤 되면 아내는 뭔가 크게 착각을 하고 있는 셈이다. 내가 어떤 속옷을 좋아하는지 전혀 모르지 않은가(기왕 살 거, 웬만하면 내 맘에라도 들어야 할 게 아닌가. 그게 ‘목적’에도 들어맞고). 아무래도 그녀에게 내가 좋아하는 속옷에 관해서 ‘요약정리’를 해줘야 할 필요가 있었다.
“내가 좋아하는 여자 속옷은 흰색이야. 와인색이나 검정색 속옷이 훨씬 에로틱해 보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건 쉽게 잊혀지는 색이지. 머릿속에 내내 둥둥 떠다니는 영상은 단연 흰색이라니깐. ‘순백의 미’라는 얘기도 있잖아. 포르노영화를 생각해 봐. 아, 본 적 없다고 했던가? 보통은 말야, 흰색 속옷을 입은 여자가 나와. 근데 그게 얼마나 고급스럽고 순수해 보이는지. 색깔도 그렇지만 ‘중요 부위’가 훤히 들여다보이는 망사나 레이스 같은 게 치렁치렁 달린 것도 난 싫어. 꼭 무슨 중년의 권태기 부부가 ‘옛날 분위기 한번 살려보자’고 작정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그게 아니라면 굳이 ‘업소 분위기’ 낼 필요 없잖아. 무슨 업소냐고? 뭘 그런 걸 물어. 그런 게 있어. 아! 흰색에 ‘포인트’로 들어가는 장식은 봐줄 만하더라. 그 정도는 맘에 들어. 소재는 100% 순면이 좋아. 잘 세탁해서는 따뜻한 봄 햇살에 꼬득꼬득하게 말린 순면속옷을 상상해봐. 그 감촉, 묻어나는 햇살 냄새. 당연히 코를 비비고 싶어서 견딜 수 없을 거야. 다시 말하지만 첫눈에 혹하고 끌리는 게 중요하지 않아. 회사에서 어서 집에 가고 싶도록 하는 속옷은 뭐니뭐니해도 흰색이야. 흰색 순면속옷!”
불과 2주 전 상황이다. 이제 아내는 더 이상 속옷을 사지 않는다. 아내는 매일 아침 내 출근을 챙기고 그리고 나면 집안일을 하고 일주일에 두 번은 문화센터에 가서 요가를 한다. 요가를 시작한 이후로는 밤늦게까지 TV 홈쇼핑을 보는 일도 거의 없다.
이제, 아내는 흰색 순면속옷만 입는다. 나도 그런 아내의 변화가 싫지 않다.
여전히 나는 흰색 순면속옷을 좋아하니까.
그런데, 좀 이상하다.사는 게 재미가 없다. 이유가 뭘까?
출처 : 여성중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