볼턴차관의 ‘중국영향력’ 물음에 “암살도 가능” 압록강대안의 미.한국등 제압에는 안보상 반대
중국을 본따지않은 북한
중국은 지난92년 시장경제의 도입을 결정했다. 사회주의체제를 유지한채 사실상의 자본주의로 내디딘 것이다. 우선 서방측과의 관계를 개선하고 일본이나 한국의 자금을 도입할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북한의 반대를 무릅쓰고 한국의 UN가입을 지지하고 8월24일 한중국교수립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북한은 중국의 외교노력을 본따려 하지않고 거꾸로 많지않은 친구에게 배반당했다고 원망했다. 중국이 한국과의 국교수립 1주전에 평양에 특사를 보내 사전통고한 때 “북한관계자에게서 재떨이가 날아왔다”고도 한다. 2000년5월30일 17년만에 방중한 김정일총서기를 맞고자 북경 인민대회당에 중국요인들이 도열했다. 김정일은 장쩌민 총서기(당시), 주용기 총리(당시)등 지도자를 소개받자 한사람 한사람과 아주 정중하게 악수하면서 간단한 인사를 교환했다. 키작은 남자의 차례가 왔다. “여기는 전기심 부총리입니다”고 소개되자, 중산복의 김정일총서기는 순간 표정을 굳히더니 악수도 하지않고 다음 인물앞으로 걸음을 옮기고 말았다고 한다. 한중국교 추진주역에 대한 원한이었다.
하긴 그런 시기가 있었어도 중국공산당과 북한노동당의 교류는 계속되었다. 정부는 정부고, 당은 당이라는 발상이다. 중국공산당에서 대외관계는 당중앙대외연락부가 맡으며 97년부터 다이빙궈가 부장을 맡아왔다. 그와 북한노동당 간부와는 굵은 파이프가 유지돼온 셈이었다.
김정일총서기의 방중받아들이기도, 장쩌민 총서기의 2001년 방북때도 다이빙궈가 준비작업을 맡았었다. 그리하여 중국에서는 ‘김정일과 직접 얘기할 수 있는 얼마안되는 간부’라 불리우게 된 것이었다.
뜻밖에도 그 두사람-김정일이 극도로 싫어하는 전기심과 좋아하는 다이빙궈가 올해들어 극히 중요한 국면에서 다시 김정일과 관계하게끔 되었던 것이다.
먼저 전기심. 그는 지난3월중순 은퇴했는데 그 직전 극비리에 특사로 방북했었다. 출장지까지 비행기로 만나러간 전은 김과 식사를 포함 7시간 회담했다. 그는 김에게 “ 이대로 가면 북한은 제2의 이라크가 된다”고 경고하거나 “미국이 이라크에 매달리고 있는 이때가 기회이다”고 권고했다. “미국과만 대화하겠다”는 김에 대해 “(다국간협의에 응하라는) 부시대통령의 요구에 응할 수밖에 없다” “나의 방북은 핵문제에서의 중국의 마지막 중재노력”이라고 최후통첩을 들이댔다. 이에 대해 북한측(김정일)은 “미.북을 축으로 한 3자(미, 중. 북한)협의라면 응할 용의가 있다”고 회답했다한다.
이리하여 중국은 겨우 3자협의 개최(4월23일)를 성사시켰다. 그러나 북한대표 이근 외무부미주국부국장의 폭탄발언으로 우야무야되고 말았다.
키먼 다이빙궈의 등장
중국은 결국 다시 다국간협의를 중개해야되는 상태로 몰렸다. 후진타우의 친서를 휴대한 제2특사로 다이빙궈 외고부 제1부부장이 선임되었다.
그는 7월14일 평양서 김 총서기를 만났다. 조선중앙방송은 김총서기가 “다이특사와 따뜻하고 친선적인 분위기속에서 담화를 나눴다”고 보도했다. 내용은 공표되지않았지만 후에 “다국간협의에 전향적인 발언을 했다”고 미.중쌍방의 당국자가 밝히고 있다.
그러나 실은 그이상으로 김정일이 핵문제를 둘러싸고 꽤 깊이 있는 발언을 했을 가능성이 있다. 다이의 귀국다음날인 7월16일에 미중외무장관의 전회회담이 있었는데 그중에서 다이의 방미가 결정된 것. 미국수뇌부도 다이의 방북성과를 중시하여 “직접 만나 내용을 듣는게 필요하다”고 판단한 셈이 된다.
다음날 급거 방미한 다이빙궈는 18일 체니 부통령, 라이스 대통령보좌관, 파웰 국무장관과 회담했다. 회담시간은 도합 4시간이 되었다. 미정권중추가 중국의 외교 부부장에게 이토록 오랜 시간을 할애한 일은 극히 드물다. 김정일이 상당히 충격적인 얘기를 다이빙궈에게 전했다고 밖에 생각되지 않는다.
2005년까지는 限定공격
중국외교부의 규벌에 얽힌 복잡한 역학관계를 생각할 때 전기심이나 다이빙궈의 방북이 이조성 외교부장이나 아시아담당 왕이 부부장과의 사이에 적은 파도를 일으켰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중국지도층으로서는 김정일이라는 귀찮은 인물을 달래고 얼추고하는데는 무리한 일도 하지않을수 없었던 것이다. 거기까지 한 것은 미국이 북한의 핵개발을 구실로 강경한 수단으로 나오면 곤란하기 때문이었다.
중국당국은 입을 다물고 있지만, 그들은 가까운 장래에 미국이 북한에서 일으킬것으로 보이는 일들을 상세히 검토하고 있다. 당이나 군, 외교부간부들이 모이는 회합에서 그런 문제들을 논의하고 있다. 정부의 싱크탱크인 중국사회과학원이나 중국현대국제관계연구소, 후진타우 주석등 지도자를 배출해 지도부에 대해 영향력을 가진 명문 중화대학등의 연구자도 이런 논의에 참가하는 적이 있다. 그들의 얘기를 듣고다니며 그 단편들을 이어가는 것으로 그 시뮤레이션의 골격을 상상하는 일은 가능하다.
그들 연구자들의 말을 종합하면, 이대로 가다간 언젠가 미국이 지쳐서 경제제재나 해상봉쇄를 끄집어낼 가능성을 부인못한다. 그 경우 해상에서의 임검이 필요해지고 이는 사실상의 무력행사로 이어진다. 무엇보다 북한자신이 “제재는 선전포고로 간주한다”고 주장하고 있으니 제재하는 측도 그런대로의 각오가 필요해진다.
그래도 북한이 핵개발에 계속 미련을 두는 경우, 바야흐로 미국에 의한 북한공격의 가능성이 떠오른다. 염학통 청화대 국제문제연구소장(교수)은 다음과 같이 예상한다. “미.북한간의 타합이 잘되지 않으면 2004년후반기나 05년에 미국이 북한에 대한 한정공격으로 나설 가능성이 나온다. 지금의 북한에게 대규모의 반격은 불가능할 것이다.”
마준위 중국현대국제관계연구소 동북아시아연구실 부실장도 같은 견해다. “미국의 공격은 북한핵시설에의 핀포인트폭격이 될 것이다. 그 경우 미군의 군사행동은 순식간에 끝난다. 북한군은 이에 대해 움직이지 않는다고 본다.”
그러나 박건일 중국사회과학원 지역안전연구센터 부주임은 다른 전개가 된다고 경고한다. “ 미국이 한정공격을 할 경우 북한이 반격해서 전면전쟁으로 발전한다. 민족성을 생각할 때 중국이 하지말라고 해도 북한은 듣지않는다.” 전면전으로 발전할지의 여부에 관해서는 중국내부서도 견해가 엇갈리고 있음을 알수있다.
중국은 미북전쟁에 참전않는다
또하나의 문제는 미국이 무력을 행사할 때에 중국이 어떻게 움직이느냐 이다. 이점에 관해 중국군이 반세기전의 한국전때 처럼 참전한다는 견해를 나타내는 사람은 없었다.
“중국은 먼저 무력행사에 대한 반대를 표명한다. 그 위에서 평화적 해결의 길을 모색할 것이다. 중국은 한국전때 처럼 북한을 위해 출병하지는 않고 미북간의 조정역을 하려고 한다.”(마준위 부주임)
중국과 북한은 중조우호협력상호원조조약을 체결한 사이다.
“ 지금의 시대에 이러한 조약은 부자연 하므로 재검토를 요한다. 그러나 이것을 북한이 끄집어 내는건 꽤나 후의 일이다. 이 시기에 내놓으면 북한을 자극만 할뿐이니까 말이다.”
제재이건 무역공격이건 한번 틀리면 북한이 붕괴될 걱정이 있다. 북한이 가령 미국이나 한국에 점령. 통치되면 중국에게는 압록강대안까지 미국군이 닥치는게 된다. 이것은 중국에게는 안전보장상의 직접 위협이 된다. 게다가 다수의 난민이 국경을 넘어 밀어닥쳐와 불측의 사태가 일어날 가능성도 있다. 따라서 중국으로서는 북한이라는 나라자체는 어떻게해서든 존속시켜두고 싶다. 그때문으로도 대화에 의한 해결이 필요하다. 그러니까 이상하리만큼의 외교노력을 계속하고 있는 것이다.
지도자김정일을 돌보지않는 날
그러나 김정일이 언제까지나 중국의 외교노력을 이해못하거나, 중국에게 김정일이 북한이라는 나라의 유지에 방해가 되는게 확연해지면, 다른 길을 찾아야만 된다. 그 가운데는 “지도자김정일을 돌보지않는다”라는 선택지도 포함될 것이다.
실제로 미국에서는 이미 “김정일 축출”이 내부서 논의되고 있다. 계기는 금년1월 볼턴 미국무차관이 북한의 NPT탈퇴선언에 따라 방중했을 때였다한다. 관계자에 의하면 볼턴차관이 왕광아 부부장등과 회담시 “ 중국은 도대체 어느만큼 북한에게 영향력이 있는가. 예를 들어 김정일을 암살할수 있는가”고 물었다. 이에 대해 중국측 간부의 한사람은 “당연하다. 우리들이 완전히 돌보지않게 됐다면”이라고 응수했는 것이다.
원래 김정일은 젊은 때부터 쭉 반(反)중국파로 여겨져왔다. 예를 들어 78년9월에 등소평 부총리(당시)가 북한방문시 도처에 김일성주석의 상(像)이 있고 그중에는 황금의 것도 있었다. 개인숭배를 싫어하는 등소평은 불쾌감을 감추지않고 “이런걸 만들기위해 도대체 몇억원을 걸었나. 중국이 원조하고 있는데 돈을 낭비하고있다.”고 나무랐다. 김정일은 이를 듣고 거꾸로 부친의 동상을 더욱 늘렸다고 한다.
83년6월 김정일서기(당시)가 중국을 방문, 그 등소평과 만났다. 이때 상하이를 시찰한 김정일은 귀국후 중국의 개혁.개방정책을 “수정주의다”라고 비판했다. 97년에 한국으로 망명한 황장엽 전 북한노동당서기에 의하면 “등소평에 대해 갖은 욕설을 다했다”고 한다. 그로부터 2000년까지 김정일은 중국을 방문하려 하지않았다.
김정일은 2001년1월 방중때 다시 상하이에 갔다. 중국측은 이때 “상하이에서의 천지개벽같은 거대한 변화는 중국공산당이 실시한 개혁.개방정책이 옳았음을 얘기하고있다고 (김정일이)강하게 지적했다.”고 일부러 발표했다. 83년의 수정주의비판에 대한 응수였던 것이다.
북한접경에 중국군 15만명 배치
겨울 월경과 북한병 약탈등 심해
약3주전부터 중국동북부 북한과의 국경지대에 다수의 중국군병사가 도착하기시작했다고 뉴스위크지가 서울과 북경특파원기사를 인용 보도하고 있다. 뒤이어 중국측은 강물이 동결하는 겨울에 대비해 15만이라는 대규모병력을 배치할 계획을 밝힌바 있다.
90년대후반부터 탈북한 사람들이 말하는 억압과 기아 체험에 현지주민(조선계중국인이 많다)들은 크게 동정했었다. 그러나 재작년 중국당국은 난민유입을 막기시작했다. 올들어서는 국경경비가 한층 강화되고 있다. 이때까지의 소규모 국경경비대를 대신해서 한달사이에 국경에 연한 3개거점을 중심으로 본격적 부대가 배치케 된 것이다.
북한에 사는 이웃에 대한 중국의 인내가 한계에 달했다고 볼수도 있다. 이때까지 중국정부는 북한의 비상식적인 언동을 관용으로 대했다. 미국등이 지적하는 핵개발의혹도 상대하지않았었다. 하지만 작년10월 북한이 핵개발계획의 존재를 인정한 것은 중국정부에게 매우 불쾌한 일이었다. 오랜 세월의 우호국이 차츰 무거운 짐이 되기시작한 것. 중국내로 들어온 북한난민은 이미 15만명이상. 중국측 통계로는 해마다 1만명씩 새로 들어온다고. “공식통계일 뿐이지 실은 연간 2만명이라는게 실상이다”고 관계자는 말한다.
북한난민은 이제 중국의 국경지대에서 트러블의 씨가 돼있다. 2년전쯤부터는 남민에 의한 강도나 살인사건도 드물지않다고 한다. 지난1월 판석이라는 마을에서 북한병사가 자동소총을 쏘며 강도질 하고 총검으로 가족들 목을 째고간 사건이 있었다. 6월엔 조선족일가가 살해되고 집안을 엉망으로 뒤졌는데 북한병사소행으로 여겨졌다.
두만강변 국경도시 도문시에서 얼마전 4명의 북한병에 의한 은행강도미수사건이 발생했는데 순찰중이던 중국군들에 잡혔다 한다. 국경부근에 불안이 만연되고 있는데 북한남성은 모두가 군대경험이 있다는데서 공포감은 더 하다. “전에는 동여매고 털어갈 뿐이었는데 지금은 죽인다”고 한 여성은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