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sia 증권시장의 풍운아 마쯔오카 히데오(박준홍) 과연 그는 재기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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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쯔오카 히데오(한국명 박준홍) 씨는 과연 자본주의 시장의 냉혈한 금융 자본가인가, 아니면 고도로 훈련된 원칙주의자인가? Asia 증권시장의 풍운아였던 마쯔오카 히데오(한국명 박준홍) 씨가 이곳 미국에 거주하며 과거행적을 잊은 채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다.

이에 본보는 그의 성장과정과 기업경영, 그리고 사생활에 대해 집중 추적해 보았다.본보가 그를 추적한 결과 마쯔오카 히데오(한국명 박준홍) 씨는 지난 99년 도미 후 지난 4년간을 왜 침묵으로 일관했는지에 대해서 다소나마 알 수 있었다.

지난 97년 8월 재일 한국인 출신으로 일본의 대형 투자신탁사의 사주로 군림했던 마쯔오카 씨는 그가 소유한 FIC 일본 본사의 빌딩에서 멀지 않은 동경의 오꾸라 Hotel에서 기자회견을 열었다.

자신이 당시 증권투자기업인 PHT 법인에 5억 달러 이상의 손실을 입힌 것에 대해 겸허하게 반성하고 모든 개인자산을 매각해서라도 손실보전은 물론이고 이것을 계기로 다시는 증권시장에 돌아오지 않겠다는 여운(?)의 말을 남기고 쓸쓸히 퇴장했던 것이다.

이 기자회견 후 마쯔오카 씨는 조국인 한국으로 귀국, 새로운 인생을 도전하기 위해 정치입문을 시도했으나 실패, 또 다시 미국으로 이주하여 평화로운 소시민으로서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 하지만 최근 증권세계와 손을 끊고 다시는 증권시장에 발을 들여 놓지 않겠다던 그의 행보가 발 빠르게 움직이고 있어 관심의 대상이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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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운의 천재 마쯔오카

그는 지난 85년 일본 증권시장에 발을 들여 논 이후 철두철미한 자기관리와 예의 번뜩이는 정보수집과 관리능력으로 90년대 초까지 일본 증권가 최고 Market maker로 성장했다. 이 성장과정에는 그가 기업합병이나 주식매수에 있어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냉혈한적인 면이 일조했다는 분석. 그는 투자에 있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비인간적인 면이 많았으며, 주식정보와 자료관리만큼은 철저하게 남을 신뢰하지 않는 성격의 소유자였던 것이다.

하지만 두 번에 걸친 대형금융 사고는 그를 곤경에 빠지게 했다. 그러나 이 같은 위기극복에 있어 알고 지내던 많은 지인들의 도움으로 벗어난 점을 보면 그가 대인관계에서도 탁월한 관리능력을 지니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아직까지도 세계 각 대형 증권사의 간부 및 관계자들과 만나 모종의 거래를 하고 있으면서도 철저하게 본인이 관여하지 않은 것으로 연막을 치는 전술을 보면 그가 얼마나 이중적인 삶을 살고 있는 지가 여실히 드러나고 있다. 최근 한국에서 논란이 되고 있는 정치권이나 재벌들의 자금을 해외에서 관리하는 관리책이 아니냐라는 루머도 나돌고 있으나 현재까지는 아무 것도 드러난 것이 없다.

천문학적 재산은 과연 어디에?

현재 그가 보유하고 있는 약 1,500억 엔(미화 12억 달러) 이상의 신탁자금은 대부분이 유가증권이나 무기명 채권으로 분산 투자되어 있으며, 일본 법률상 공소시효가 끝나는 2004년 이후 이 신탁자산을 이용, 국제 증권시장에 다시 모습을 드러내 재기할 준비를 하고 있는 것으로 분석되고 있다.

또한 최근에는 일본에서 계획적인 대규모 파산설이 나돌 정도로 음해성 루머로 인해 심하게 시달리고 있으며, 이를 확인하려는 일본 언론 취재진들의 인터뷰에 일체 응하지 않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아직도 마쯔오카 히데오(한국명 박준홍) 씨는 일본 증권시장에서 한시대의 영웅이었으며 풍운아였다는 사실만큼은 그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이 없다. 만약 이 같은 그가 다시 증권시장에 돌아오면 폭풍처럼 몰아치는 스타일의 드라마틱한 주식매수 기법을 선보이며 증권시장 활성화에 기여할 것이라는 기대감에 오히려 그를 기다리는 대형 증권사 간부들이 목을 빼고 기다리고 있다는 소문까지 나돌고 있다.

현재 영국계 증권사 고위 중역으로 재직 중인 전 PHT 신탁 임원이었던 야마모또 씨는 그에 대해 이 같은 평가를 내리고 있다. “마쯔오카 회장과 나는 25년 전 처음 대면한 뒤 지난 85년부터 95년까지 10년 간을 같이 동고동락한 사이지만 단 한번도 그를 내 후배나 친구로 생각해 본 적이 없다.

그가 지난 97년 한국으로 귀국하기 전까지는 다소 과장된 표현을 빌린다면 나의 인생을 바꾸어 놓은, 한마디로 금융시장의 스승이었고, 거대한 투자군단의 지휘관이었다. 재일한국인으로서 거의 불가능하다고 판단되었던 일본 금융시장의 장악을 실현한 유일한 재일한국인이었다. 그의 치밀하고 대담한 투자법은 분명 시장의 유연성에 큰 활력이 되었던 것만큼은 엄연한 사실이며, 지금도 그가 나를 부른다면 다시 그에게 돌아갈 수밖에 없는 인간중독증에 걸려 버렸다”며 “아무튼 그는 일본 금융가에서 주식투자에 관한한 위대한 도박사였으며 전설이었다”고 전했다.

파란만장한 49년 인생

1980년 5월 군에서 제대한 직후부터 부친인 박승희 씨가 소유하고 있던 한국 최대의 계기 메이커인 ㈜서울 미터의 기획조정실장으로 입사하여 경영수업을 쌓았던 한국인 박준홍 씨. 그는 81년 당시에는 신군부와 가까웠던 한 인사의 계략에 빠져 파생된 회사 경영상의 법적문제로 수차례 수사기관에서 조사를 받은 후, 모든 회사의 직책과 주식지분을 포기해야만 했었다. 당시 박준홍 씨는 수사기관에서 엄청난 수모와 고통을 당하는 과정에서 정부에 대한 증오심까지 생겼던 것이다.

박준홍 씨는 일부 유가증권 자산 및 부동산을 처분하여 1982년 당시로는 거금인 약 60억원 정도의 현금을 중소기업 은행을 비롯한 시중은행의 가명구좌에 예치하고 있었다.

이미 ㈜서울 미터는 과점주주가 바뀐 상태였고, 박준홍 씨는 부친이 한국에 처음으로 창업했던 기업인 ㈜서울 미터의 경영권 회수에 상당한 집착을 갖고 있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에 지난 82년 자신이 보유한 현금자산을 이용하여 ㈜서울 미터를 다시 매입하기 위한 방편으로 ㈜서울 계기라는 종합계기 메이커를 창업하기에 이르는데…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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