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획도 없이… 준비도 없고… 체계도 없고…”즉흥적 발상 전시효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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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획도 없이… 준비도 없고… 체계도 없고…”즉흥적 발상 전시효과만 노려
이민 기념 사업회 진정한 의미 「퇴색」각종 사업 「졸속」 일관

“이민 100주년 기념사업회는 ‘실패한’ 기념사업회”

이민100주년기념 남가주기념사업회(대표회장 윤병욱)는 초창기부터 과잉의욕을 보여 무려 18개(기념사업회 발간 ‘선구자들의 삶과 꿈’ 24페이지 참조)의 사업계획을 마련했다. 이 기념사업회는 “이민100주년”을 앞두고 2002년 한 해 동안 18개의 사업을 추진한다고 밝혔다. 그러나 어떤 사업계획은 그 항목 하나만으로도 힘이 벅찬 것이 있는데 18개를 하겠다고 나선 것은 다분히 자기과시욕으로 밖에는 볼 수 없었다.

우선 어떤 사업계획을 발표했는지 제목만이라도 기록해본다. 1) 4.29폭동백서 발간 2) 이민100년사 화보집 간행 3) 미주이민족보 작성과 초기이민자료 웹사이트 개설 4) 독립운동산실, 국민회관 보존작업 5) 덴버 독립운동 백서 발간 6) 중가주 독립운동 백서 발간 7) 초기이민자료 수집 8) 초기이민역사 박물관 건립준비 9) 이민100주년기념 음악제 개최 10) 이민100주년기념 연극 공연 11) 초기이민 사진전 순회개최 12) 이민100주년기념 학술세미나 개최 13) 이민100주년기금모금파티 개최 14) 재미대학산악연맹의 미주50개 정상정복 지원 15) 1.5세 및 2세 초청 100주년 기념사업회설명 16) 독립운동가 발굴보훈 신청 17) 미주이민100주년 기념일 선포 18) 하와이 및 미주전지역 사업에 적극협력. 기타 기념사업회에서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사업은 충분한 검토를 거쳐 계속 본 사업으로 추진해 나간다. 이상과 같은 사업계획은 초기대표였던 서동성 실행위원장과 민병용 사무총장 때 마련된 것이다.

지난 2001년 당시 기념사업회에 참여 인원도 적었고 특히 사업활동을 위한 기금도 턱없이 부족했다. 참여인원 중에는 한인초기이민사에 대한 지식을 지닌 사람들도 적었고 대부분은 “뜻이 좋으니까”로 참여했다. 또 이름내기 좋아하는 사람들도 참여했다. 그러나 돈이 모아지지가 않았다. 자연 내부에서는 책임 공방이 오고갔다. 위에 적은 사업계획들도 전문가들의 자문이나 진지한 토의를 거쳐서 마련되기 보다는 몇몇 사람들이 전문가인양 행세하면서 마련한 것들이다. 그렇다고 해서 무의미한 사업계획은 아니다. 상당히 의미있는 사업계획인 것 만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 같은 사업계획을 추진하는 시스팀이 애초부터 갗추어지지 않은 것이 가장 큰 문제였다.

국민회관 보존사업 이민 100년사 발간 서동성 공동회장, 윤병욱 회장 독주 비난 충돌 「결별선언」

유명무실한
‘국민회관 보존작업’

한 예를 들어보자. 사업계획 중에는 현재 동포사회에 많은 관심을 불러 일으키고 있는 ‘국민회관 보존작업’이 들어가 있다. 그러나 결과를 보자. 오늘날 누가 ‘국민회관’의 보존작업을 추진했는가?. 애초 기념사업회측은 한국의 도산기념사업회(회장 서영훈)와 흥사단미주위원부(위원장 백영중)와 협력해 2002년부터 시작한다고 밝혔다. 그리고 기금 조성은 한국에서 65%, 미국에서 35%의 모금을 통해 실시한다고 했다.

남가주기념사업회는 ‘국민회관 보존작업’을 사업계획으로 작성했으나 2001년을 허송세월로 보내고 2002년에 들어와서도 아무런 진전을 보이지 않았다. 기념사업회는 매달 평균 2회의 모임을 가진 것으로 되어 있으나 ‘국민회관 보존작업’에는 위원장만 선정되고 위원회는 구성되지도 못했다. 기념사업회가 2002년부터 새로 체제가 바뀌어 윤병욱씨가 대표회장이 됐으나 ‘국민회관 보존작업’건은 추진되지 못했다.

당시 국민회관 문제는 오히려 한인사회와 서울에서 논의가 오가고 있었다. 서울의 도산기념사업회와 미주의 흥사단미주위원부가 관심을 표명하면서 추진 움직임을 보였다. 그런데도 기념사업회측은 이들 단체와 협력해 사업계획을 추진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강건너 불보기”식이었다. 이민100주년남가주기념사업회에서 작성한 ‘국민회관 보존작업’은 동포사회에서는 알고 있지도 못했다. 이렇게 기념사업회측이 ‘국민회관 보존작업’에 나서지 못한 배경에는 윤병욱 대표회장과 박상원 사무총장의 책임이 크다고 볼 수 있다. 이들은 ‘국민회관 보존작업’ 계획을 이민100주년기념사업회에서 다루는 것을 달갑게 여기지 않았다.

흥사단과 도산기념사업회에서 ‘국민회관 복원사업’을 들고 나왔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흥사단이나 도산기념사업회측이 하는 일에 경쟁이 되지 않겠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윤 회장과 박 총장은 원래 흥사단 단원이기 때문이었다.

사실 이민100주년기념사업회측으로 볼 때 ‘국민회관 보존사업’이상으로 더 중요한 사업은 없다고 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민회관 보존사업’은 이민100주년기념사업회의 전국사업에도 제안되지 못했다. 한마디로 이민기념사업회는 무엇이 진정 중요한 사업인가를 인식하지 못한 것이다. 이들 이민100주년기념사업회 관계자들은 무슨 행사 때마다 “우리 이민선조들의 희생을 기억하고 후세에 전하자”고 목청을 높이지만 행동은 따르지 못했다. 기념사업회측이 마련한 사업계획들에는 이민선조들의 희생을 기억하는 뜻있는 계획들이 많았다. ‘이민족보작성과 이민자료 웹사이트 제작’ ‘덴버독립운동 백서 발간’ ‘중가주독립운동 백서 발간’ ‘초기이민화보집 발간’ ‘초기이민자료 수집’ ‘이민학술세미나 개최’ 등등이다. 그러나 이같이 중요한 계획들이 2003년이 다가는 현재까지 이렇다할 성과가 발표되지 않고 있다.

임원들의 사고방식이 문제

이들 의미있는 사업계획들은 초창기 서동성 대표시절에는 나름대로 추진하려는 작업이 있었다. 그러나 기념사업회 전체가 이에 대한 관심이 부족하고 극히 일부 임원만이 이를 추진하기 때문에 가시적인 성과를 기대할 수 없었다. 물론 기금부족과 전문 인원들의 참여가 미흡했고 외부의 지원도 미약했기 때문이다. 극히 일부 임원들이 계획을 추진하는 바람에 다른 임원들이 공동의 관심을 가질 여유가 없었다. 이런 환경은 기념사업회 내부 시스팀이 제대로 짜여지지 않았기 때문이고 시스팀을 활성화 하려는 의지가 없었기 때문으로 분석되고 있다.

이 같은 분위기는 윤병욱 대표회장 체제에 들어와서도 달라지지 않고 오히려 분파작용이 심해 사업회 자체의 힘이 약해졌다. 특히 윤 회장 체제에서는 전임 서동성 대표체제에서 기획한 사업계획들 보다는 자신들이 새로 마련한 사업계획들에 치중하게 되는 바람에 의미있는 사업계획들이 대부분 퇴색됐다.

윤병욱 대표회장이 들어서면서 새로 만든 사업계획 중에는 ‘이민100년사 발간’이 들어있다. 이 계획 자체는 상당히 의미 있는 것이다. 미주 한인사회에서 이민의 역사가 약 120년 정도(최초의 미시민권자는 서재필 박사로 1885년에 도미해 1890년에 미시민권 취득)로 알려져 있는데 전체 이민역사책이 없다는 사실에서 ‘100년사’ 발간은 무척이나 뜻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같은 ‘100년사’를 간행하기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충실한 준비와 연구가 필요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윤 회장체제는 오직 ‘100년사’ 발간이란 거창한 과제에 취한 나머지 전시효과만 노렸다.

너무나도 준비가 허술했다. 이들은 ‘100년사’를 1년만에 만들었다. 지난해 12월 5일에 ‘미주한인이민100년사’ 출판기념회가 열렸다. 우선 자기들 임기내에 만들었다는 자만심 때문에 이 ‘100년사’는 간행되자 비난을 받기에 이르렀다. “무겁기만 한 쓸모없는 책”이란 비판의 소리도 들었다.

원래 ‘100년사’는 계획에 없었다. 새로 대표회장이 된 윤병욱씨는 기념사업회에 참여하기전에는 한미동포재단 이사장으로 활동했다. 그 당시 동포재단에서는 남가주한인사회 50년사를 기획했다. 편집위원들도 구성되어 있었고 필진도 정해져 일부는 작업을 진행시키고 있었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윤 이사장이 갑자기 물러나게 되면서 그는 이민100주년 남가주기념사업회 대표를 맡게됐다. 그는 동포재단 시절의 ‘50년사’를 부풀려 ‘미주이민100년사’로 새로 계획을 세워 추진하면서 한미동포재단과 공동으로 발간하기에 이르렀다. 한미동포재단측도 큰 반대가 없었다. 왜냐하면 이왕이면 다홍치마로 ‘100년사’가 ‘50년사’ 보다는 더 의미가 있기 때문이었다.

문제는 ‘50년사’ 편찬위원에서 ‘100년사’ 편찬위원으로 확대를 해야 하는데 적당히 넘어가는 수순을 밟았다. ‘50년사’는 남가주한인사회를 대상으로 한 것이지만, ‘100년사’는 미주한인사회 전체를 망라한 이민사가 돼야 하므로 편찬위원도 전국적 규모로 해야하고 작업도 많은 시일을 요해야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같이 가장 중요한 편찬계획을 ‘50년사’ 편찬을 중심으로 재추진하는 바람에 ‘100년사’는 남가주 중심의 이민사 책이 되버렸다. 타주에서 관심을 가질리가 없었다. 시카고 지역과 아틀란타 지역 휴스턴 시애틀 뉴욕 등 각지역은 별도로 이민사를 발간했거나 현재 진행하고 있다.

LA 지역에서도 민주통일단체들에서 새로 100년사를 준비하고 있고, 한국의 국사편찬위원회와 미주학계가 공동으로 100년 이민사를 기획하고 있다. 기념사업회에서 졸속으로 만든 ‘100년사’는 10만 달러의 비용이 들었다고 한다. 한미동포재단에서 5 만 달러를 부담하고 기념사업회에서 5만 달러를 부담하는 조건이었다. 기념사업회측이 담당한 5만 달러는 한국정부 지원금에서 전액 보조받았다. 따라서 이 발간사항은 한국정부의 감사대상이 된다. 앞으로 감사원이 어떻게 이 문제를 다룰지도 관심사이다.

사사건건 대립의식

‘이민100년사’도 많은 문제점을 내포하고 발간됐는데, 이와 비슷한 케이스가 ‘이민100년 사진화보집’ 발간이다. 이 계획은 서동성 대표시절에 기획된 것으로 원래 2002년 8월에 발간 계획이었다. 그러나 이 문제는 윤병욱 대표체제에 들어 와서 서동성 전 대표와 편찬문제를 두고 대립되는 바람에 진전을 보지 못했다. 우여곡절끝에 편찬위원장에 이재권 부회장이 선출됐다. 그러나 사진화보집 예산편성 문제로 윤 회장측과 이 부회장측이 사사건건 대립했다. 이재권 부회장은 윤 회장측이 이런저런 이유를 붙여 화보집 제작을 방해했다고 비난했다. 윤 회장측은 이 부회장이 편찬작업을 자의대로 추진한다고 비난했다. 기념사업회의 한 관계자는 “이 부회장이 평소 윤 회장의 독선을 지적하고 나서는 바람에 대립이 생겼다”고 전했다. 이런 와중에 한국일보측이 사진화보집을 지원하겠다고 나섰다. 이 부회장측은 출판비용을 부담하지 못하는 한국일보의 지원은 의미가 없다며 서동성 공동회장의 허가를 받아 서울의 SBS 방송계의 문화기금을 받아 출판키로 하면서 작업을 추진했다.

이에 윤 회장측은 이 부회장이 SBS와의 출판계약이 공개적이지 못하다는 명분을 내걸어 편찬위원장직을 해임하기에 이른다. 여기에서 윤병욱 대표회장과 서동성 공동회장 그리고 이재권 부회장 등이 크게 충돌하면서 기념사업회는 와해 분위기에 몰리게 됐다. 급기야 서동성 공동회장과 이재권 부회장 등이 윤 회장의 독주를 비난하면서 기념사업회와를 떠나게 됐다. 윤 회장측은 새로 사진화보집 편찬위원장에 차종환 위원을 선정해 2003년 말까지 발간을 하도록 결정했다.

그러나 전임 이재권 위원장이 맡았던 화보집 제작 자료들의 인수인계 작업이 이루어 지지 않아 또 다른 문제로 떠오르고 있다. 또 이 와중에 다른 단체에서 이민100년 사진화보집을 발간한다고 하여 똑 같은 사진화보집이 2개나 간행되는 일이 벌어질 것으로 보인다. 공동으로 협력한다면 더 충실한 화보집이 될 수 있는데 제각기 자신들만 옳다고 주장하는 꼴이 돼가고 있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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