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서 실감(實感)한 한국 외교의 저력(底力) 내가 본격적인 로케를 위해 한국을 방문한 것은 5월19일, 노대통령이 최초의 부시대통령과의 정상회담을 마치고 귀국한 다음날이었다. 한국에서는 노정권의 최초의 한미정상회담을 “치욕외교였다”라는 비판이 들끓고 있었다. 정상회담의 합의문서에 “사태가 악화한 경우에는 추가적조치를 검토한다”라고 미국의 주장에 의해 명기됐었기 때문이었다. ‘미국에 종속하지않는 독자이자 주체적인 외교’를 표방해 대선에 이긴 노대통령이 미국에 굴복했다고 많은 국민이 느낀것이다. 그러나 노전권내부에서는 “ 겨우 최후선에서 멈춰섰다”라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왜냐하면 미국은 당초 “사태가 더욱 악화된 경우에는 온갖 조치를 취한다”는 군사행동을 명백히 의미하는 문언을 받아들일 것을 요구해왔던 것. 이 문언의 수락은 ‘핵문제를 평화적으로 해결한다’고 호소하는 노정권에게는 절대로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노정권은 정상회담 불과이틀전에 이수혁 외교통상부차관보를 켈리 미국무차관보에게 파견, 막바지 협상 끝에 겨우 ‘사태가 악화된 경우 추가적 조치를 취한다’라는 표현으로 변경할 수가 있었다. <추가적 조치>가 ‘군사행동을 포함하는지 여부를 부시정권은 마지막까지 밝히지는 안았지만 한국정부는 최후의 일선을 지킬수 있었다고 느끼고있었다. ‘남북화해’를 기축으로 전쟁은 절대 피한다는 자세를 일관한다고 설명하는게 ‘추가적조치’라는 말로 완회시키는 것으로 가능해졌던 것이다. 닉슨방중 배우길- 윤외교 주장
미국과의 끈질긴 협상을 지휘한 사람이 52세로 외교통상부장관에 발탁된 윤영관씨였다. 미국 존즈 홉킨스대에서 박사과정을 마치고 90년부터 서울대교수로 있은 윤씨. 미국의 유력잡지에 윤씨 책이 소개되는 일도 많아 신진기예의 학자로서 명성이 자자했다. 그의 저작에 감명을 받은 노무현 대통령이 그의 선거전에서의 외교브레인으로 영입하여 당시 젊은 학자들이 많던 노캠프에서 윤씨는 외교정책을 통괄하고 있었다. 윤씨는 김대중씨가 시작한 햇볕정책(포용정책)에 관하여 북한의 내부변혁을 촉진하고 동북아시아에 새로운 번영을 구축하는 기초가 되는 것으로 높이 평가하여 그 계승을 주장했다. 또 씨는 부시정권의 강경자세에 대해 일찍부터 비판적이었다. 2002년2월 부시대통령의 방한에 즈음하여 쓴 신문칼럼 “북한과의 대타협의 전기를 만들어야”는 부시대통령에게 편지를 내는 형식으로 쓴것인데 “…북한을 악의 축으로 거명하며 강하게 비판한 각하의 연설은 많은 걱정을 낳았습니다. 북에 대한 무력공격의 언급은 북에 대량파괴무기를 단념시키기는커녕 오히려 그 보유를 촉진시키는게 될지도 모름니다”면서 결국 북의 문제는 남북, 미국, 일본, 나아가 국제기구까지 포함한 당사자가 한자리에 모여 포괄적으로 해결할 수밖에 없다고 주장하며 닉슨대통령의 방중과 관계개선때 처럼 대담한 타협의 길로 가기를 간절히 희망한다고 했었다. 인터뷰때 우리가 이 칼럼에 언급하자 그는 “지금도 나는 미국은 닉슨방중과 같은 결단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 이상과 현실의 갭의 틈바구니속에 나의 딜렘마가 있고 갈등이 있는 것입니다”고 고백하고 있다. 윤장관의 싸움은 이 부시전권을 어떻게 설득하여 북한과의 상호타협교섭에로 유도하느냐 이며, 그것은 현재까지 일관되게 계속되고 있다. 전쟁은 되풀이 될 수없다 미일정상회담직후인 5월19일은 남북경협추진위가 평양에서 시작된 날이기도 했다. 평양으로간 대표단을 서울에서 지휘한 사람이 정세현 통일부당관이다. 노대통령이 김대중정권으로부터 같은 직책을 인계시킨 유일한 인물이기도 하다. 정씨는 59세. 한국전쟁발발시 6세였다. 내가 전쟁체험에 관하여 묻자 그는 약간 먼 데를 보는 눈이 되었다. “ 포격전이 시작되고 나는 거리에서 숙부가 살고있던 산속 집으로 피난했습니다. 거기서도 어른들이 이데올로기의 다름으로 서로 죽이는 것을 자세히 보았습니다. 왜 이런 참혹한 일이 일어나는지 나로서는 전연 몰랐습니다.” “도망치던 길과, 집에 돌아오자 집은 타버려 폐허가 된 광경. 지금도 기억에 남아있습니다. 어른이 되면서 왜 이렇게 우리민족은 몰리고 몰려버렸는가, 라고 생각하게쯤 되었지요. 당시의 단편적인 기억, 사진의 컷같은 광경, 그것이 통일문제에 깊은 관심을 가진 요인이라고 생각합니다.” 정씨의 “한국에 전쟁이라는 선택지(肢)는 없다. 전쟁위협이 있다는 것만으로 외자는 도피하고 국가경제가 파탄한다. 평화야 말로 유일최대의 국가발전의 기초인 것이다.”라는 신념은 이런 체험에 기초하고 있었다.
그 정씨에게 최대의 시련이 된게 한미정상회담직후에 열렸던 북한과의 ‘경협추진위’였다. 그후 정씨의 예상대로 사태는 진행되었다. 44시간의 대화중단후 북한은 석명문을 제시해 위원회를 재개시킨 것이다. 석명문에는 “ 우리들의 근본적인 취지는 북남관계가 0이 되어 재난에 봉착하는 일 없이 함께 잘 살아가자는 것을 기대하는 말이었던 것입니다.”고 적혀있었다. 재개된 경협위회의에서 한국은 일거에 이때까지 현안이던 협력사업을 추진한다. 하나의 기둥이 ‘40만t의 쌀지원’이라는 인도적 지원이고 다른 한 기둥은 ‘경의선 연결’과 ‘개성공단 착공’이라는 본격적인 경제협력이었다. “ 북을 설득하기 위해서는 대화만으로는 한계가 있습니다. 실제로 북에게 도움이 되는 지원을 하는 일을 빼놓을수 없어요. 인도적지원이나 경제협력을 하면서 대화를 계속해야만, 핵의 포기를 향한, 북의 성의있는 자세를 끌어낼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전략은 점. 선. 면. 공간으로의 교루확대입니다. 접촉이 점에서 선으로, 차츰 면에서 공간으로 확대되어가면 그에 따라 북도 중국식 개혁개방을 받아들이지 않을수 없게 될것입니다. 그 때문에는 핵의 포기가 필요합니다. 그렇게 북이 변화되어주기를 나는 기도하는 마음으로 계속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같은 때 미국부터는 리처드 펄 국방자문위원등 강경파로부터 북한에의 무력공격불사론등이 잇따랐다. 이러한 미국의 강경자세를 접하자 정 장관은 한 결단을 했다. 6월14일 행해지는 경의선연결식에 출석하지 않기로 한 것. 북측으로부터는 쌍방의 각료가 출석하는 대규모 식전을 열고싶다는 요망이 있었지만 사양할 수밖에 없었다. 연결식당일, 나는 정장관이 어떤 기분으로 식전뉴스를 보고있는지, 그 생각을 알고싶었다. 마음 먹고 인터뷰룰 신청했더니 TV를 보고있는 장면의 촬영과 짧은 인터뷰에 응해주었다. 경제제재 회피하고 6자협의로 남북을 연결하는 철도가 연결된 날부터 이틀후 우리(NHK취재팀)는 尹외교통상부장관과 같은 비행기로 감보디아로 갔다. 아시아지역의 안전보장을 협의하는 ARF.아시아지역포럼이 개최된 것. 미국과 북한대표가 함께 출석하는 얼마 안되는 회의다. ARF본회의의 의장성명안은 당초 “ 핵문제의 평화적해결을 요구한다”는 온건한 내용이었다. 그러나 본회의 당일 의장성명안은 “ 북한에 대하여 핵확산금지조약. NPT에의 복귀를 강하게 요구한다”라는 엄격한 내용으로 어느사이엔가 바뀌고 있었다. 같은 날 미국은 일거에 더 나아가려 하였다. UN안보리에 대해 북한을 비난하는 성명을 내게하려 한 것. 안보리 성명- 경제제재 라는 미국강경파의 시나리오가 움직이기 시작하나 싶었다. 윤장관의 움직임은 재빨랐다. AFT본회의가 끝난후 먼저 파웰장관과 회담. “ 지금은 미국이 주장하고있는 ‘미,북, 중국, 한국, 일본에 의한 다국간 협의’를 북한에 설득하고 있는 단계이며 안보리에 맡기는 것은 시기상조가 아닌가”라는 생각을 전했다. 30분후 중국의 이필성외상과 회담. 한시간에 걸쳐 북한이 다자협의를 받아들이도록 설득해달라고 계속 호소했다. 이 외상은 “북한도 좀처럼 말을 듣지않아 난처하다”고 공개하며 협력을 약속했다. 윤 장관도 필사적이었다. ‘여기서 경제제재로 길이 트이면 한반도에서의 전쟁이 담박 진실미를 띠게된다’는 생각에서였다. 북한이 공격당하는 공포에 질려 이성적인 판단을 할수없게 된다는 걱정도 컸다. 캄보디아에서의 마지막 회견에서 우리들에게 “ 미국에 대해 북한이 5개국협의의 개최를 제언하고 있어 지금 안보리에 맡기는 것은 신중히 해야된다된다고 전했습니다. 미국도 그것을 검토할 것임니다.” “ 북한에 대해서도 이번 회의를 국제사회의 보다 엄격해지고 있는 분위기를 아는 계기로 삼았으면 하고 절실히 바라고 있습니다.”고 말하였다. 한편 7월에는 서울서 난북각료급회담이 열렸다. 여기서 정장관은 철야협의 끝에 ‘핵문제를 적절한 대화의 틀에서 평화적으로 해결한다’라는 다국간협의의 수락을 나타내는 공동성명을 발표하는데 성공했다. 7월말 드디어 북한은 러시아를 포함한 6국협의 수락을 발표했다. 한편, 윤 외무장관은 재삼 미국으로 건너가 북한이 핵을 포기했을 경우의 경제지원이나 체제보증등 6자협의에서 제시해야할 보상에 관하여 협의, 설득을 계속했다. 한국외교의 ‘절실함’ ‘일관성’ 내가 한국외교의 두 책임자를 취재하고 강하게 느낀 것은 우선 ‘전쟁’에의 절실함이다. 丁장관은 “ 우리들은 물을 가득 넣은 바께쯔를 머리위에 놓고 걷고있는 것과 같은 상태인 겁니다. 작은 돌에 걸려 넘어지는 것만으로 이때까지 50년 걸려 구축한 번영과 안정은 무너져버리고 맙니다. 한반도의 안전적인 관리가 절대로 필요한 것입니다.”고 강하게 설명했다. 尹장관도 “ 유일냉전체제가 남은 이지역에 전쟁이 일어나면 동북아시아의 미래는 뺏기고 맙니다. 거꾸로 핵문제의 해결에 성공하면 동북아시아의 비약적인 발전에 길을 여는 것이 되는겁니다.”리고 말하였다. 물론 두사람 모두 미국과 북한이라는 현실속에서 갖가지 타협을 거듭하고 휘둘려 왔다. 그러나 그들은 이 일관된 방침만으로 끈질기게 미국도 북한도 설득해 왔다. 물론 북한에 대한 설득배경에는 엿과 채짝을 교묘하게 쓴 중국의 압도적인 힘이 있고, 미국의 북한에의 강경노선을 전환시킨 배경에는 이라크점령통치의 진흙화가 있다. 하지만 전쟁위협에의 절실함에서 핵문제의 출구를 일관하게 나타내주는 두사람의 외교담당자의 의의(意義)를 무시할 수는 없다고 나는 생각한다. 불상사가 발각돼 노정권의 지지율이 대폭 내려가고, 국민투표조차 있을수 있는 가운데 감히 타이틀에 ‘저력’이라는 말을 쓴 것은 그러한 이유에서다. |
서울서 실감(實感)한 한국 외교의 저력(底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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