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나리자의 미소」는 2점 이었다?

이 뉴스를 공유하기
「모나리자의 미소」는 2점 이었다?

모나리자의 미소 세계사(史) 미궁 (迷宮)을 찾아서…

프랑스수도 파리의 르부르박물관에는 해마다 300만이상의 관객이 몰리는데 그들의 최대 즐거움은 거장 레오나르도 다빈치(1452~1519)가 그린 불후의 명작<모나 리자의 미소>(유채 패널화.77x53cm)로서 특히 신비를 머금은 미소는 영원한 찬탄과 수수께끼의 대상이 돼왔다.

모나리자에 관한 일체의 정보는 르네쌍스기의 이탈리아 미술가이자 전기작가이던 바사리의 ‘레오나르도 다빈치전(傳)’에 의존하고 있는데, 그에 의하면 “ 레오나르도는 프란체스코 델 조콘도를 위해 그의 아내 엘리지베타의 초상화를 그려주었는데 4년이 걸려서도 미완성인 채였다. 이작품은 현재 퐁텐블로성의 프랑스왕 프랑수아에게 있다.”고 기술되어있다. 즉 레오나르도가 왕의 초청을 받았을 때 이 미완성의 그림을 가지고갔다가 왕에게 4천에쿠어를 받고 팔았다는 것이다. 또 이런 대목이 있다.

“<모나 리자>를 그리는 동안 악사와 가수 광대들을 불러와 부인의 심기를 항상 즐겁고 싱그럽게 함으로서 정숙한 미소를 머금은 표정, 편안한 손등 신기(神技)를 표현할수 있었다”고. 모나란 이탈리아어로 유부녀에 대한 경칭이고, 리자는 엘리자베타의 약칭이다. 이 기록으로 보아 모델이 당시 피렌체의 대상인 조콘도의 부인임은 확실하다. 그런데도 앞뒤가 맞지않는 개소가 무수히 많아 논란과 억측과 시비와 가설등이 끓이지 않았다.

우선 모델의 나이다. 정설로는 모나리자는 1479년 필렌체의 명문 게라르다니가(家)의 안토니오 마리아 다 놀드 게라르다니의 딸로 태어나 1495년에 결혼했다. 그렇다면 다빈치가 이그림을 그리기시작한 1503년경 그녀는 24세쯤였던 셈. 그러나 미술평론가들은 <모나 리자>의 나이를 30~40대 여성이라고 한결같이 주장하고 있다.

두 번째로, 명백하게 훌륭한 완성품이라고 밖에 볼 수 없는 이 작품을 바사리가 “ 미완성인채”라고 적은 것도 이상하고 그림을 다음과 같이 칭찬한 사실도 이상하다.

“ 눈썹 또한 어떤 데는 짙고 어떤 데는 얕고 그것이 피부의 털구멍에 따라 구불고 더할 나위 없이 자연스럽다. 모양좋은 구멍을 가진 코는 장미색으로 부드러우며 마치 살아있는 살갗이다. 입술은 그 양끝이 붉음을 띠고 살갗에 녹아들어 마치 그림보다는 살아있는 육체 바로 그것이다. 잘 관찰하노라면 목의 움푹한 곳도 맥백치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르부르의 <모나 리자>에는 눈썹도 속눈썹도 거의 그려져있지 않고 “목이 맥박친다”거나 “ 섬세한 장미색의 코구멍이 보인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별로 없을 것이다. 백과사전에 보면 초상에는 처음부터 눈썹이 없었다는 것이 확인되었는데, 그것은 그 당시 넓은 이마가 미인의 전형으로 여겨져, 미인들사이에 눈썹을 뽑아버리는 것이 유행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그렇다면 미술사가 바사리는 우리들이 알고있는 <모나 리자>를 실제론 보고있지 않았다는 셈이 된다.

원래 다빈치는 1505년에 이 그림을 모나 리자의 남편에게 맡겼다고 하는 데 그로부터 40~50년후에 바사리가 ‘이탈리아 화가열전’을 간행할 때는 이미 프랑스왕가에 가있은 셈이다. 그런데 프랑소아1세의 왕실컬렉션 목록에는 <사(紗)베일을 걸친 애인>이라고 적혀있을뿐 <모나 리자>나 그녀의 남편에 관한 언급은 일절 없다.(* 紗란 얇고 발이 성긴 비단, 즉 여름용 옷감임) 또 한가지 불가해한 점은 로맛조라는 르네쌍스.이탈리아 미술사가가 1584년 간행된 연구서에서 “ <조콘다> 및 <모나리자>”라고 쓴 점이다. <조콘다>와 <모나리자>는 다른 그림이란 셈이 되고만다.

다빈치가 장난기로 10년사이 두번 그려
르 부르 박물관 바난 家 두곳 … 라이트 추정

8달러짜리 “실물”같은
복제화


1944년 어느 봄날 프랑스남부에서 골동품상 레이먼드 헤킹이 어느 점포에서 먼지투성이의 캠퍼스 더미를 헤치다가 <모나 리자>복제화를 발견, 약8달러에 구입했다. 돌아와서 깨끗이 닦아 나타난 그림에 그는 기절할뻔 했다. 보면 볼수록 진짜처럼 여겨졌던 것. 그림에는 종횡으로 온통 튼 자국투성이었다. 이건 다빈치시대 특유의 현상으로 나무 패널에 그렸기에 19세기엔 벌레먹기가 심했기에 캠퍼스로 옮긴 탓이라 여겨지기도 했다.

이러한 이체법은 1700년대 피렌체의 미술수복가 피코에 의해 발명된 것이다. 실제로 다빈치의 <브노와의 성모>그림은 이 기법으로 상한 나무 패널에서 캠퍼스로 옮겨졌었다. 헤킹의 그림은 전문가들의 동의를 얻지못해 지금은 니스에 있는 그의 손자집에 있다고 한다.

이러한 가짜소동을 다룬 작가 세이모아 V 라이트에 의하면 그 그림은 튼 것이나 캠퍼스상태를 보아 꽤나 오래된 것임에 틀림없다고 한다. 다만, 색채가 화려해 바사리가 말하는 빨간 입술을 상기케하는 부분도 있지만 배경이 조잡해 다빈치작으로 보기엔 무리가 있다한다.

60년대들어 런던에서 다른 후보작이 나타났다. 헨리 F 퓰리챠박사가 62년입수한 그림을 진짜 <모나리자>라고 주장하고 나선 것. 후에 ‘아일워스판’이라 불리게된 이그림을 진짜라 주장한 근거는 다음과 같았다. 첫째는 바사리의 기록 처럼 아직 미완성품이라는 점이다.

두 번째로는 명화가 라파에르가 다빈치의 아트리아에서 <모나 리자>를 보고 스케치했던 일이 있었다. 그 스케치에는 여성의 초상 양쪽에 그리스원주(圓柱)가 하나씩 2개가 그려져있었는데 르부르의 <모나리자>에는 원주가 없다. 런던 것은 원주가 똑똑히 그려져 있다. 셋째로, 바사리의 묘사, 즉 눈이나 눈썹, 코, 입술, 목등의 <모나 리자>의 특징과 그림이 분명 일치하였다. 퓰리챠박사는 X선사진, 농도계테스트, 미량화학분석등 온갖 최신테크닉을 구사해 증명하려 했지만 어느 것도 결정적 증거가 되지못하자 유명한 전문가단에 도움을 요청했다. 그러나 찬반이 엇갈렸고 또 그림의 배경이 허술한데다 다빈치의 취향과는 동떨어진 결점도 있고하여 미술계서는 진짜로 인정하지 않았다. 박사본인은 79년3월 죽을때까지 진짜로 믿었었지만…

마지막으로 제3의, 그것도 가장 유력한 후보작의 경우를 보자.
1797년 한 미국인이 프랑스에서 귀국했다. 윌리엄 헨리 바난은 어학연구차 유학갔다가 프랑스의 화려한 귀족사회에 매료되어 그럭저럭 20년가까이 머물다 미술품커랙션에도 손을 댔었다. 그가 갖고온 작품속에 <여승_ 레오나르도 다빈치 완성작품>이란 이름의 그림이 있었다. 그것은 그가 프랑스왕비 마리 앙토아네트로부터 대혁명으로 단두대에서 처형되기전, 직접 선물받은 것이라고 하였다. 게다가 이 <여승>그림은 저 르부르의 <모나 리자>와 꼭 닮은 것이었다.

1929년 <여승>은 캠퍼스 바꾸기를 위해 하바드대 포그미술관으로 옴겨졌다. 이때 찍힌 X선사진은 확실히 다빈치시대의 것이었음을 나타냈다고 한다.

그후 바티칸박물관 평의원을 지낸, 로마의 아메리칸 아카데미의 토마스 M 자드슨에 의해 현미경사진이나 적외선사진 분석등 재조사 끝에 “ 내가 보기에 이 그림은 다빈치의 손에 의해서였음이 틀림 없다”라는 단언이 나왔다. 그는 다빈치가 왼손잡이였다는 사실에 언급, “ 이 그림에 일관된 필치는 틀림없는 왼손잡이 작이고, X선뷴석에서도 그의 제자들과는 다른, 다빈치자신의 기법임이 밝혀졌다.”고 말하였다.

포그미술관의 명예이사로 다빈치뎃상의 권위이기도한 아그네스 만간여사에 따르면 오른손잡이 화가는 꼭 우상에서 좌하로 사선을 긋고, 반대로 왼손잡이는 좌상에서 우하로 사선을 긋는다, 그것이 자연스러운 운필이라고 밝힌 바가 있다.

그렇지만 6~7년전 미술조사국제재단이 행한 감정에서는 그림이 다빈치작품이 아니라 17세기경의 복제회일 것이라고 하였다. 헌데 이 겨론은 몇가지 중요한 점을 간과했다는 지적도 있다. 예컨대 바난가의 그림이 복제라면 왜 진짜보다 젊게 그려져 있는가? 복제라면 될 수록 원래의 그림에 충실하게 그려야할 터인데 기묘하다는 것이다.

또 한가지는, 잃어진 기둥문제. 라파에르 스케치의 2개 원주는 실은 르부르의 <모나리자>에도 분명 그려있었다고 한다. 1500연대쯤 프랑소아1세에게 있을 적에 액(額)사이즈에 맞추기위해 양끝을 조금씩 깎았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원주가 그려진 바난가의 그림은 언제 복제됐다는 것일까. 적어도 17세기, 원래의 패널이 깎인 때부터 100년가까이 지난 시점이란 있을수 없는 일이 아닐까 싶다.

바난측 주장은 르부르박물관 소장품이 가짜라는게 아니다. 다만, <모나 리자>가 2장 있다고 주장하는 것. 그런 바보스런 일이 있을수 있을까….

1517년 프랑소아1세의 궁전에 있던 다빈치를 찾아간 아라곤 추기경에게 다빈치는 자기작품 몇점을 보여주었다. 그 그림들은 <성 요하네의 그림> <성모 마리아와 성 안의 그림> 그리고 메디치가의 고 줄리아노대공의 주문으로 그렸던 <피렌체의 어느 부인의 초상화>였다. 여기서 전기작가 바렌틴은 <피렌체의 어느 부인의 초상화>야 말로 르부르의 <모나 리자>가 아닐까고 추측하였다.

그리하여 작가 라이트는 이들 기록들을 근거로 다음과 같은 흥미깊은 가설을 조립했다.
_다빈치는 <모나 리자>를 2장 그렸다. 두 번째 <모나 리자>가 르부르박물관에 있는 것이고, 또 하나의 <모나 리자>(실은 이것이 최초의 것)은 바난판이다_라고.

화가가 좋은 테마의 그림을 몇장씩 그리는건 결코 드문 일이 아니다. 다빈치자신도 <수태고지>나 <암굴의 성모>를 각각 2장씩 그렸다. 그렇다면 <모나 리자>가 2매있으면 안된다는 이유란 없다. 라이트의 추론을 더듬어 보면 다음과 같다.

약10년후 다시 주문받은 셈

1502~3년에 다빈치는 델 조콘도에게서 그의 부인초상화를 주문받았다. 이보다 앞선 1500년3월 다빈치는 일시 베네치아체류중 당시 보급되기 시작한 리넨의 캠퍼스사용법을 배웠다. 피렌체에 돌아온 그는 당장 이기법을 써먹으려 했다. 라이트에 의하면, 이기법으로 그려진 <모나 리자>1호야 말로 현재 바난가 사람들이 소유한 작품이란 셈이 된다. 바난이 귀국시 선하증권에 < 여승_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완성작품>이라고 적은 것도 마리 앙토아네트왕비 주변에서 이그림이 진짜로 인정되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1507년말 완성한 이 그림을 의뢰자인 델 조콘도는 자기집 스토파거리의 저택 벽에 걸었다.
그러는 사이 다빈치는 북쪽 밀라노로 이사가 이후 5년간 그의 활약터가 되었다. 그동안 피렌체에서는 메디치가가 추방되고 도시는 승려 사보나로라의 수중에 들어갔다. 하지만 1512년 메디치가의 복권으로 다빈치도 피렌체에 돌아온다.

새 통치자 줄리아노 데 메디치는 이즈음 카블거리의 메디치가 인근에 사는 미모의 귀부인에게 끌렸다. 몇 개월후 그는 다빈치에게 이 새로운 애인(실은 리자 델 조콘도였다!)의 초상화를 주문했다. 이 그림이 르부르 소장품이다.

그림이 미완성으로 끝났다는 오해도 이렇게 생각하면 설명이 된다. 가끔 아토리에를 방문한 사람들이 그리는중의 그림을 보고 이전의 그림이 생각나 지필(늦은 필치)로 유명했던 터라 그가 그당시의 그림을 아지껏 그리는 중이라고 오해한 것이었다.

게다가 첫장때는 캠퍼스를 사용했고 2매째는 파넬을 쓰고 있다. 장난을 좋아하던 다빈치가 1513년에 같은 사람의 두 번째 초상화를 의뢰받았을 때 전과 같은 포즈로 다시 그려보자고 생각했다고 해도 조금도 이상하지 않다. 르부르의 <모나 리자>의 수수께끼같은 미소의 비밀은 어쩌면 그런데 연유하는지도 모르는 일이라 하겠다….

또 다른 추측도 가능하다. 줄리아노 데 메디치가 첫 번째 그림을 보고 마음에 들어 자기에게도 같은 그림을 그려달라고 주문했을런지도 모른다.

어쨌든 두장의 <모나 리자>는 극히 닮았지만 미묘하게 틀린 점도 있다. 특히 두 번째는 바사리가 기술한 젊은 여성과는 전혀 다른 표정을 보이고있는 것이다. 아마도 남편 조콘도와 헤어지고 줄리아노대공의 애인이 되기까지 리자부인은 여러 가지 고초를 겪었을 것이다. 그 표정에 차가운게 섞이고 눈거플도 느슨해 지고 얼굴은 동그마니 2중턱 기미조차 느껴진다.

2매째의 <모나 리자>는 1515년까지 거의 완성되었다고 추측되는데 그해에 뜻하지않은 사태가 일어났다. 줄리아노가 프랑스의 새국왕 프랑소아1세의 즉위축하차 프랑스를 방문했다가 거기서 17세의 필리베르 드 사보와와 결혼해버린 것이다. 물론 신부를 데리고 오는 궁전 벽에 애인초상화가 걸려있으면 곤란하다. 그래서 다빈치에게 당분간 아트리에에 놔두록 부탁하지 않았을까. 헌데 병약했던 줄리아노는 1516년 세상을 떠나고, 그 이듬해 다빈치는 2매째의 <모나 리자>를 가지고 프랑스로 가 프랑소아1세의 손님으로 지냈다. 여기서 그가 1519년 사망하자 <모나 리자>는 그대로 국왕 커렉션에 보태진 셈이다.

고 줄리아노의 신부가 되던 필리베르는 프랑소아1세의 숙모뻘이었다. 그래서 그림은 국왕에게 남겨두는 것이 최상의 방법이라고 다빈치는 생각했음직 하다. 이 그림이 국왕의 목록에 애매하게만 적힌 것도 이해가 가는 대목이다.

이상이 “ 모나 리자 2매설”을 내놓은 작가 라이트의 주장인데 물론 반론도 있을 법 하다. 그리고 마치 후세의 논쟁을 즐기는 양 지금도 당자는 액자속에서 영원힌 미소를 띄고있는 것이다.

@SundayJournalUSA (www.sundayjournalusa.com),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뉴스를 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