聖처녀 장다르크, 정말 부활했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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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형때 얼굴못보게끔 군중들 멀리서 차단
국왕의 “가짜”단정은 교황청등 무마용 설

세계사의 미궁(迷宮)을 찾아서(3)

1431년5월30일, 프랑스북부 노르만디의 고도 르앙의 광장에 아침일찍부터 많은 구경꾼이 몰려들었다. 광장복판에는 화형대가 만들어지고 땔감이 높이 쌓여 있었다.

오래지 않아 회색 죄수복이 입힌 한 아가씨가 화형대앞에 끌려나왔다. 사교가 엄격한 어조로 판결문을 읽는다. “ 신의 이름으로 너는 이단자의 신앙, 우상숭배, 악마환기등의 죄를 저질렀기에 성당서 추방되고 세속의 사법권에 인도한다….”

이 아가씨야 말로 당시 이미 전설적 존재가 돼있던, <오르레안의 성처녀> 장다르크이다. 불과 19세의 그녀는 영국군에 잡혀 종교재판을 받은 후 마녀 라는 낙인이 찍혀 처형대의 이슬로 사라질 운명에 처해진 것이었다. 그녀가 높은 말뚝에 꽁꽁 매이고 높이 쌓은 땔감에 불이 붙자 군중속에서 비명소리가 울렸다. 거대한 불길에 싸여 가련한 단말마의 비명이 주위에 울려퍼질 때, 믿기지않는 일이 일어났다. 활활 타오르는 화염속에 돌연 <예수>라는 글자가 떠올랐던 것이다.

또 화염속에서 한 마리 흰 비둘기가 날아오른가 싶더니 프랑스 국왕이 있는 성 쪽으로 날아갔다. 잠시 멍청하던 군중사이에서 몇몇이 무릎을 꿇더니 기도소리가 흘러나온다. “ 성녀다. 역시 장느는 성녀였다…” “ 무섭다. 우린 성녀를 태워죽이고 만거야..” 주위에 있던 영국인들도 당황하여 가슴을 긁어대는 사람도 있었다고 한다.

하나님의 고지로
무얼 했던가


장다르크는 프랑스동부의 동레미 라는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다. 가난한 농부의 딸이었지만 매우 신앙심이 두터워 13세되던 어느 여름날 집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들었다고 한다. “바르게 행세하고 진지하게 성당에 다녀 하나님의 말씀에 따르라.” 그후도 신의 소리를 몇번 들었으며 17세때 신의 소리는 고전중인 왕세자를 도와 영국군을 내몰고 프랑스를 살리라는 명을 받았다는 것이다.

왕세자 샤르르는 국왕 샤르르6세의 장남이면서도 모친 이자보왕비가 불륜 끝에 낳은 자식으로 의심 받아 왕위계승권을 뺏겨 당시 파리남부의 브르쥬에 쫓겨난 신세였다. 과거의 혈연을 내세우며 영국왕은 프랑스의 왕위계승권을 차지하려고 오르레안에 군대를 파견해, 프랑스국내는 왕세자를 미는 아르마냐크파와 영국왕과 짠 브르고뉴파로 분열하고 있었다.

장느가 왕세자에게로 가려하자, 가족들 특히 아버지가 젊은 딸이 전쟁터에 가려한다고 노발대발, 어떻게든 막으려고 마을 청년에게 ‘혼약 불이행’죄로 고발케 한등 막간도 벌어졌었다.

그러나 1429년2월 장다르크는 마을 영주의 호의로 말과 호위병사 6명의 도움으로 떠나서, 도중의 보크르르 라는 곳에서 기다리기 9개월만에 겨우 왕세자를 만나게 된다.

장느가 브르쥬의 왕세자 궁전에 나타날 때 왕세자는 일부러 허술한 옷을 입고 가신들 틈에 끼어있었다. 장느가 진짜 하나님의 사자인지를 테스트하려 했던 것. 그런데 장다르크는 아무런 망서림 없이 그에게 다가갔다. 이때 장다르크는 샤르르에게 몇마디 말을 걸었고 그걸 듣고 샤르르왕세자의 얼굴이 확 하니 환해졌었다 한다. 무엇을 예기했는지는 모르나 이때부터 샤르르는 자신이 정통의 왕위계승자임을 확신케되었다는 것이다.

장다르크의 출생비밀이란..

그래서 이런 가설도 나왔었다. 이때 장느가 왕세자에게 소근거린 내용은 그가 틀림없는 샤르르6세의 아들임을 증명하는 증거(육체적특징은 무엇인가?)라는 것이다.

왜, 한낱 농부딸에 지나지않는 장느가 그런 중대비밀을 알고있었는가에 대해서는 흥미있는 설도 있다. 장다르크가 단순한 농부의 딸이 아니라, 실은 왕가의 혈연자 라는 설이다.

왕세자의 아버지인 샤르르6세에게는 당시 오데트 라는 애인이 있었다. 그녀가 1406년에 국왕과의 딸을 낳았다. 헌데 묘하게도 그 딸에 대한 기록은 하나도 남아있지 않다. 실은 장다르크가 낳은 해도 1406년이다. 그래서 애인이 낳은 국왕의 사생아가 아니냐는 말이 돌았던 것. 물론 이는 단순한 추측이지 아무런 증거가 없다. 그러나 이밖에도 남자관계가 많았던 왕비 이자보가 불륜 끝에 낳은 딸이 아니냐 는등 여러 가지 가설이 있다.

어찌되었건 가난한 농부의 딸이 프랑스군인들에 의해 신처럼 숭배받을 리가 없다, 그리고 유명한 장군도 아닌 평범한 딸인데 그토록 간단히 포위망을 풀고 영국군이 간단하게 오르레앙에서 쫓겨 날 리가 없다….라는 셈이다. 그 반대로 장느가 왕가의 혈통을 이어받았다면 그럴 수도 있지 하는 것이 된다.

성녀서 마녀로 전락하기도

처음에는 반신반의 하던 왕세자도 차츰 이 이상한 딸에게 이용가치가 있음을 깨달았던 것 같다. 가득이나 패전으로 비관하던 왕세자에게 하나님의 사자라 칭하는 이 영감소녀의 출현은 힘있는 원군이 었던 셈. 그래도 일단은 신부등에게 장느의 신용도를 테스트시키고 그녀가 진짜 처녀인지 여부를 확인하는 신체검사까지 시켰다. 당시는 여성의 처녀성이 순결의 심볼이었다. 장느는 이 테스트에 무사합격하고 백마에 올라타고 왕세자에게서 맡겨진 3천병력을 이끌고 출진한다. 18세 촌아가씨가 어떻게 싸우겠느냐 의아해 하던 자들도 생각을 바꾸쯤 돼간다.

오르레앙해방전에서 장느는 남자라도 이틀간 입고있으면 녹초가 된다는 20여kg의 갑주를 6일동안이나 태연히 착용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게다가 군인으로서의 천부적인 재능도 있었던 듯, 그때까지 1대1의 기사 싸움방식을 취하던 프랑스군에 집단전투 라는 전혀 새로운 전법을 도입했다 한다.

당시의 전사들에게는 전쟁의 주요목적이 적으로부터 값 나가는 걸 뺐거나 포로에게서 인질금을 받아내는 등에 열중하다 보니 싸움의 승패여부에는 신경을 안쓰던게 보통이었다.

허나, 장느는 적을 때려부셔 승리를 거둘 때까지 온갖 곤란을 무릅쓰고 철저하게 적을 공격하여 쉬임없이 추격했다. 그리하여 장다르크는 오르레앙을 해방하고 여세를 몰아 랑스도 함락시키자, 그 성에서 예언대로 왕세자를 샤르르7세로 즉위시켰다. 이제 그녀의 명성은 왕국내뿐 아니라, 외국에도 널리 퍼져 웬만한 영국군인은 장느의 이름만 들어도 전의를 상실했다고 한다. 1429년9월4일, 마침내 장느군은 파리 입구에 도착했다. 성벽안쪽은 물이 찬 개울이 돼있고 거길 넘으면 성안이다.

그런데 그때 화살 한 개가 장느의 대퇴부를 관통하고 말았다. 예상외로 영국군의 수비가 완강해 부상한 장느는 철퇴하지않을수 없었다.

그로부터 장느군은 어찌된 셈인지 연패를 거듭해 1430년 마침내 영국군에게 잡히고 말았다.

장느는 보통의 전쟁포로가 아니라 마녀로서 종교재판을 받게쯤 되었다. 그녀가 하나님의 소리를 들었다는게 유죄의 근거가 되었다.

가톨릭에서는 인간은 성당을 통해서 만이 하나님과 통하고 있으며, 그 성당을 제쳐놓고 직접 하나님의 소리를 듣다니 어불성설이 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장느가 들었다는 것은 하나님의 소리가 아니라 악마의 소리다, 라는게 되어버렸다. 남장을 하고있었던 것도 하니님이 정한 성별의 신성함을 범한 것이라 하여 마녀의 레텔이 붙어 화형이 선고되었다.
그녀 덕에 왕위에 오른 샤르르7세는 그녀가 필요없게 되자 도우려고도 하지않았다.

화형대서 장느의 옷이 다 타버리자, 사형집행인은 일단 불길을 낮춘후 그녀의 육체가운데 가장 여자다운 부분을 꺼내서 군중들에게 보였다고 한다. 단순한 여자에 지나지 않다는 점을 알리기 위해서였다.

그후 4시간에 걸쳐 완전히 태운후 뼈가루는 세느강에 버렸다고 한다.
고향을 떠나온지 경우 2년도 못되어 가난한 농부의 딸이던 장다르크는 순식간에 성녀에서 마녀로 전락되어 불쌍한 짧은 생애를 마쳤다.

그로부터 15년후에 명예회복을 위한 재판이 열려 ‘마녀’의 오명은 벗겨졌지만, 그녀가 “구국의 성소녀”로서 숭앙을 받게되기는 영웅 나폴레온의 등장으로 유럽일원에 영웅주의가 풍미하던 19세기까지 기다려야만 됐었다.

죽었을 장느가 되살아나다!

그런데 장다르크가 처형된지 5년후의 1436년 묘한 사건이 일어났다. 그녀가 태어났던 동레미촌에서 그다지 멀지않은 로레느지방의 메츠시가에 25세쯤의 아가씨가 나타나 자기는 성처녀 장느 라고 광고하고 나선 것이다.

뉴스는 당장 메츠근교에 살고있던 장느의 두 남동생도 전해들었다. 어떤 사기녀의 소행이겠지 하고 노기에 차서 동생들은 달려갔다.

여기까지는 괜찮았는데 그다음부터 묘하게 전개된다. 두 동생이나 전의 장느를 잘 알고있는 고향 사람들도 모두 그녀를 진짜 장느로 인정하고 재회의 기쁨에 들떴다 한다.

그후 장느는 룩셈부르크공비(公妃)나 울텐베르크백작(伯爵)등 고귀한 사람들의 빈객으로 대접받고 나아가 룩셈부르크공비의 저택에서 알게된 청년귀족과 사랑에 빠져 결혼까지 한다.

2년후의 여름 어엿한 귀부인이 된 장느는 전에 장다르크가 영국군을 내쫓은 오르레앙시를 방문했다. 거리의 유력자들은 그녀에게 꽃다발을 바치고 환영만찬회를 열었으며 전의 장다르크의 공적에 대한 210르블의 공로금과 포도주를 선물했다고 한다.

여기까지는 대성공이었다.
하지만, 다음해 전에 장다르크가 랑스에서 대관시켰던 국왕 샤르르7세를 배열한 장느는 처음으로 쓴 맛을 본다. 국왕이 그녀를 가짜로 판정하는 것이다.

이때 국왕은 10년전 처음으로 장다르크를 만났을 때처럼 같은 수법을 썼다. 시종의 하나가 국왕이 되고 진짜 국왕은 허술한 옷을 입고 시종들 사이에 섞였던 것. 그러나 전 처럼 이번의 장느도 망서림 없이 국왕에게 다가가서 그앞에 무릎을 꿇었다 한다. 그런데 이렇게 잘 해냈는데도 장느는 그 직후 체포돼 재판에 회부되어 다른 사람의 이름을 사칭한 악인이었음을 공중앞에서 인정케 된다.

끝내 정체가 탄로났나…싶었는데 기묘하게도 그후 장느는 또 메츠에 돌아와서는 다시 이때까지 처럼 성처녀 장다르크로써 받아들여 진다. 장느의 동생들도 그녀를 누나라 부르고 다르크가문의 친척들도 항상 장느를 가족모임에 잘 초대하곤 했다는 것이다.

역시 장느는 살아있었다!?

그러면 역시 장다르크는 진짜였을까?
‘진짜설’을 지지하는 작가 코린 윌슨은 당시 국왕만이 장느를 가짜로 판정한 이유에 대하여 이러한 설을 내놓고 있다.

당시는 장느가 처형되고 나서 아직 8년도 안된 시점이라 명예회복도 되지않았고 이단(異端)에 엄격한 파리대학도 로마교황청도 장느에 대해서는 여전히 비판적이었다. 그러던 차의 장느의 재등장은 여간 곤혹스러운 것이 아니어서 국왕은 사회적 배려에서 그녀를 가짜라고 판정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라 했다.

장느는 자기가 어떻게 화형대로부터 도망쳤는지는 설명하지 않았으며, 단지 자기대신에 처형된 것은 다른 누구이며, 아마도 다른 ‘마녀’일것이라고 치부하였다.

윌슨에 의하면, 장다르크는 이상한 매력을 지닌 여성으로서 샤르르7세를 비롯 처음에 그녀를 정신이상자 취급하던 사람들의 다수가 후에 그녀의 열렬한 신자가 됐다. 영국군에 잡히고서도 장느는 몇명의 신자를 얻었다한다.

이런 일로 미루어 윌슨은 영국포로로 있을 당시 장느를 구출하려던 음모가 계획되어 그것이 실행되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밝히고 있다. 그에 따르면 장느가 르앙서 화형이 될 때 영국측이 800명이나 되는 병사들을 동원해 구경온 군중을 화형대로부터 꽤나 먼 거리로 머물게한 것도 처형되는 여자의 얼굴을 모르도록 하기위한 것이 아니었을까 라는 것이다.
도대체 진상은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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