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쪽 같이 파내졌던「트로이의 비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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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 고고학자로 행운 누린 하인리히 슐리만

고대 그리스의 유명한 시인 호메로스의 2대 서사시 <일리어드>와 <오디세이아>에는 BC13세기에 그리스와 지금의 터어키령에 있던 트로이간의 10년간 전쟁이 묘사돼 있다. 현재 이를 상징적으로 가장 널리 알려주는 것이 지난1975년 트로이유적지 근처에 놓여진 높이 10m의 ‘트로이의 목마(木馬)’로서, 터어키가 자랑하는 관광명소가 되었다.

그런데 이 유적지를 발견해 낸 사람이 어릴적 아버지가 사준 어린이용 그림책에 심취하여 장사로 돈을 크게 번후 탐험에 나선 한 독일인이었으니, 그에 대한 세간의 평가여부는 제쳐놓고, 소설과도 같은 문화재 발굴이야기 라고 할만 하다.


트로이유적을 발견한 19세기 탐험가 하인리히 슐리만(1822~1890년)은 결핵에 걸리고 가난에 시달리는등 불우한 청소년시대를 보낸후 러시아와 터어키간의 크리미야전쟁과 미국서부 캘리포니아의 골드러시때 상재를 발휘 거부가 된후 트로이유적 탐사에 적극 나선다.

대서사시 <일리아드>에는 여신들의 ‘황금사과’쟁탈전에 심판관이 된 트로이 왕자 파리스가 당시 스파르타왕 메넬라오스의 왕비인 절세미녀 헬레네를 주겠다고 약속한 아프로디테(비너스)에게 황금사과를 주었다. 트로이에 유인된 헬레네를 되찾으려는 스파르타왕과 아가멤논왕등 그리스연합군이 트로이원정에 나선게 10년전쟁의 발단이었다. 거의 10년만에 미타케왕 오디세우스가 고안해낸 거대한 목마속에 그리스군을 숨겼다가 대승에 취한 트로이군을 무찔러 전쟁은 끝난다.

당시의 많은 학자는 터어키령 소아시아 북서방에 있는 브날바시 언덕이 트로이 옛터라고 주장하였다. 하지만 슐리만은 현지를 둘러본후 바다에 가까운 히사리크 언덕을 점찍어놓고 1871년10월11일 유적발굴에 착수한다. 약 20개월이 지난 1873년6월15일. 그날은 아침부터 무더웠다. 한때는 100명이 넘는 인부를 동원한등 이미 파헤쳐진 고대 성터의 성벽위에서 작업진척을 감시하고 있었다.

그는 자신이 프리아모스왕궁이라고 믿고있던 건물 벽아래에 성당용 궤짝일부가 드러나 보이고 그 부식된 곳이 아침햇살을 받아 금색으로 반사한 광경을 목격케되었다.

“금이다!”라고 옆에 있던 아내에게 속삭인후 그는 발굴작업원들에게 철수를 명했다. 현장에 아내와 둘이 남게되자 그는 지니고있던 나이프로 주위 흙더미를 파내기 시작했다. 옆의 벽이 언제 무너질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그는 공포도 잊은채 열심히 파갔다. 마침내 그 궤안에서 단지, 술잔등 고대토기에 뒤이어 관, 목걸이, 귀걸이, 팔찌, 반지등 금, 은, 상아제의 갖가지 그릇이나 장신구가 차례로 나타난 것이다.

젊은 아내 소피아는 남편이 건네는 물건을 빨간 쇼울에 감추고서는 사람들 눈을 피해 발굴사무실로 날랐다. 그런 왕복이 끝난 후 탁자위에 진열해 보니 어두운 실내서도 황금은 눈부시게 빛났다. 말못할 감동에 휩싸인 슐리만은 발굴품 가운데서 한 세트의 귀걸이와 가슴걸이를 가려내 아직 20세 젊은 아내의 귀와 가슴을 장식해 주고 “ 이쁘다, 소피아. 이세상의 것이라고는 여겨지지않는 아름다음이야…”라고 감탄했다고 한다.

슐리만은 이 건을 이렇게 추산하였다. 아마도 프리아모스왕가의 누군가가 이들 재화를 급히 챙겼을 것이다. 그리고 적군이 성내로 들이닥치니까 궤짝을 성벽밑에 감춰두고 도망쳤을 것. 설사 벽아래 묻지못했다 해도 함락에 따르는 대화재로 왕궁건물의 기와나 벽이 무너져 내리며 파묻히고 말았을 것이라고……이리하여 3천여년전의 이 돈으로는 측량할 길 없는 귀중한 문화재는 슐리만부부의 손에 의해 몰래 국경을 넘어 그리스로 운반되고 아테네에 있는 아내 소피아의 친척집등에 분산 보관되었다.

슐리만은 이 보물발견을 철저히 숨긴 것이다. 왜냐하면 당시 발굴허가를 받으면서 터어키정부측과의 발굴계약서에는 발굴품의 절반은 터어키정부에 내주어야 하고, 자신의 소유가 될 나머지 절반도 국외로 갖고갈 수는 없고 터어키영토내에서 팔아야 되겠기때문이었다.

그러나 세상엔 비밀이란 없는 법. 그 자신이 트로이 보물의 발견사실을 독일신문들에 발표한 탓에 터이키정부가 알게되었다. 정부당국은 당연히 발굴품 제출을 요구했지만, 슐리만이 거부해 이듬해2월 재판이 열렸다. 결국 트로이 유물의 극히 일부를 터어키정부에 돌려주고 그밖에 슐리만이 1만프랑을 배상한다는 조건으로 낙찰되었다. 슐리만은 후에 이스탄블의 엉터리 박물관에 보관시키기 보다는 ‘베를린명예시민’의 칭호를 준 고국에의 반출을 기도했던 것이다. 그는 약속 보다 더많은 5만프랑을 터어키관리에게 주었는데 정부금고에 들어가지 않고 관리들이 횡령했다고 후에 분격하기도 했다.

2차대전후 소련에
반출설, 재판중

이 프리아모스 보물은 그후 베를린 민족박물관에 기증되어 그의 이름을 딴 ‘슐리만특별실’에 전시되었는데 그 특별실 설립자금도 슐리만이 기증하는등 터어키에서는 악당으로 불리웠지만 고국엔 좋은 일을 한 셈이었다.

그런데 2차대전으로 베를린이 함락되면서 이 보물의 행방이 묘연해졌다. 히틀러의 나치스독일정부는 연합군 폭격을 피해 이 보물들을 먼저 프로이센국립은행의 창고에 넣었다가 다시 베를린동물원의 지하방공호로 옮겼었다. 그러나 동물원방공호도 공습으로 철저히 파괴돼 프리아모스 보물은 오리무중이었다. 그러다가 소련군이 지하호에서 발견해 소련으로 옮겨갔다는 소문이 근래 와서 확인되어 현재, 이 보물의 소유권을 에워싸고 터어키, 러시아, 독일 3개국이 재판으로 싸우고 있는중으로 언제 보물이 그 빛을 보게될지는 미지수이다.

그렇긴 해도 프리아모스 보물이 어떤 것이었는지는 소피아가 그중 귀걸이등 황금장신구를 패물로 사용한 사진이 있고 슐리만의 발굴보고서중의 도판등에서 어느 정도 알수 있다. 소피아는 극히 작게 세공된 가슴걸이를 지니고 있다가 그후 아테네고고박물관에 기부하여 세상사람들이 일단 실물을 구경할 수 있게되었다.

그런데 트로이를 공격한 아카이아군의 총대장은 미케네왕이었다. 당시 페로포네소스반도의 동부 아르고스지방에 있던 미케네국은 풍요했다 한다. 호메로스가 이 성을 “황금에 차있었다”고 서사시에서 표현 한 것. 미케네성의 존재는 일찍부터 알려졌고 당시의 위용을 나타낸 ‘사자문’이라는 이름의 문은 지금도 관광명소로 잘 알려져있다. 그렇지만 터어키 영내에 있던 트로이성곽의 존재는 슐리만에 의해 처음 알려지고 또한 “황금에 차있었다”는 설의 미케네에서는 발견되지 않은 3천여년전의 귀중한 보물이 슐리만에 의해 처음 발견되었다는 점에서 세계 고고학상 위대한 발견.발굴로 기록된 것이다.

아가멤논 성과 황금도 발견

프리아모스 보물을 발견한 슐리만은 3년후인 1876년8월7일 이번에는 트로이전쟁의 총수인 아가멤논왕의 성과 황금유물도 찾아내는 개가를 올렸다.

슐리만은 이번에는 AD(서기)2세기의 여행가 파우서니어스의 기록이나 미케네성을 무대로 한 소포크레스, 아이스큐로스, 에우리피데스등의 비극소설을 숙독하여 왕가의 분묘가 성벽안에 있음이 틀림 없다고 판단하기에 이른다. 그는 ‘사자문’으로 들어가 오른 쪽 저지대를 하루 125명가량의 작업원을 동원해 파들기 시작하였다. 4개원후인 1876년12월6일 마침내 슐리만은 최초의 묘소를 발견했다. 그로부터 약 한달간 그는 아내와 둘이서 땅을 기어다니며 손과 나이프만으로 땅을 벗겨갔다. 그리하여 도합 5기의 수혈식 분묘와 17체의 유해를 발굴하기에 이른다.

“ 커다란 기쁨을 갖고 폐하에게 분묘발견을 보고드립니다. 전설이 말해주는것처럼 연회가 한창일 때 왕비 클리타임네스트라와 정부 아이기스토스에 의해 살해된 아가멤논, 카산드라 및 그 한패들의 것입니다.” 슐리만이 그리스국왕에게 보낸 발견 첫보고 내용이다.

호메로스의 서사시에 나온 그리스군 총사령관 아가멤논왕은 전쟁10년만에 트로이를 함락시키고 본국에 개선한 날의 귀국축하연에서 왕비일당에 의해 살해된 것이다.

분묘속의 유해는 문자그대로 황금에 뒤덮여 있었다 한다. 타날문양이나 동물모습의 금 장신구가 머리, 목, 가슴, 팔을 장식하고 있은 것. 유해주위에는 황금 잔이나 상자가 널려있고 남성유체의 대부분은 금.은으로 상감한 청동무기를 지니고 있었다. 5기의 분묘에서 발견되 귀금속은 총무게가 13.5kg을 넘고 태반이 순금이었다.

그중에서 특출한게 유골 얼굴을 가리고 있던 황금가면. 죽은 자에게 영원한 빛냄을 주려는 뜻에서였으리라. 슐리만이 그중 가장 인상적인 유체의 마스크를 걷자 그 얼굴에는 아직 생전의 표정을 엿볼수 있었다 한다. 슐리만은 감동한 나머지 그 자리에 망연하게 선채 “ 나는 지금 아가멤논의 얼굴을 보고있는거야!”라고 소리쳤다고 전해진다.

호메로스의 신화에 끌려 시인이 노래한 트로이 유적을 찾아 헤맨 “아마추어’고고학자 슐리만. 그러나 생전에는 그가 발굴한 히사리크 언덕이 트로이 유적임을 인정않으려는 학자가 많았고 특히 고국 독일에서는 그의 발굴방법이 난폭했다거나 그가 단순한 ‘황금 털이’라는 비난도 있었다. 또 소년시대의 꿈을 실현했다고 자서전에 쓰고있지만, 실제로는 황금이 나오는 곳이면 아무데고 괜찮았다. 그 전에는 이탈리아 각지를 파고 다닌등 우연히 트로이 유적에서 황금을 찾았기에 소년시대의 꿈이라는 얘기를 꾸며냈다고 악담하는 자도 있었다.

1930년대에 트로이유적의 과학적 재조사를 실시한 C.W블레겐은 유적의 상황으로 보아 트로이전쟁이 실제로 있었던 것이라면 , 트로이 제7층 A시(파괴연대 BC 1250 무렵)가 적합하다고 설파한 바가 있다.

슐리만은 전설과 신화의 세계를 현실로 살려내고 고대사 란 문헌만의 세계가 아니라 곡갱이를 갖고 스스로 작업에 나서는 세계임을 몸소 학계에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받을만 하다. 참다운 의미의 고고학은 슐리만에서 시작됐다고 말할수도 있는 것이다.

「트로이의 목마」란?

터어키의 에게해연안에 있는 트로이시 입구에는 1975년 세워진 목마가 있다. 높이 10m가량의 목마 등에 상자모양으로 사람이 열명쯤 들어가 밖을 내다볼수 있게한 창들이 있어, 밑에서 내다보는 얼굴을 찍는 스냅사진에 안성맞춤이다. 신화에서는 장기전에 지친 그리스군이 퇴각하면서 버리고 간 목마를 트로이군측이 성내로 끌고들어갔고 전승파티에 대취한 틈을 타서 목마안에 숨어있던 그리스군이 나와 여기 저기 불을 질러서 밖에 대기했던 우군을 끌어들여 끝내 대승한 것으로 되어있다.

이에 대해 현대 학설에서는 전쟁이 한창일 때 터어키에서는 예부터 빈발하던 지진이 트로이를 엄습했던게 아니냐 고 추정하고 있다.

지진후에 쉽사리 트로이를 정복한 그리스측이 포세이돈(그리스신화에 나오는 바다의 신. 또는 지진. 하천. 말을 관장하는 신. 어원으론 ‘대지의 주(主)’란 뜻)에 감사하고 포세이돈의 심벌이던 말을 거대한 목마로서 재현시켜 바친 것이 아니겠느냐 고 추정되고 있기도 하다.

호메로스의 서사시도 트로이전쟁이 있은지 1천년도 넘은 시점에 나온 문예작품이라 진위 여부는 아리송 할 수밖에 없는 형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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