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과의 의심스런 행적들 곳곳서 드러나 황장엽씨, 「DJ·임동원 북과 결탁관계」증언
金대중 정권(1998-2002)이 들어서기 전, 임동원의 역할이 막중하게 되리라고 짐작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金대중 정권에서, 대북정책에 관한한 임동원씨 는 과히 무소불위의 힘을 자랑하였다. 그는 청와대 외교 안보수석에서 시작하여, 통일부장관, 국정원장, 다시 통일부장관, 그리고 탄핵을 받고서도 다시 외교안보통일특보로 청와대로 재입성하는 저력을 발휘하였다. 안보관련 수장을 완전히 한바퀴 사이클링한 것이다.
그는 통일부 장관으로 되돌아간 이후에도 국정원의 대북 부서를 마치 제 부하 다루듯 취급했다. 그 힘의 원천은 도대체 어디에서 나온 것일까? 북한과의 ‘특별한 관계’가 아니면 설명이 되지 않는 일일 것이다. 황장엽씨도 김대중과 임동원을 “북한과 깊숙히 결탁한 관계”라고 증언하고 있다. 미국에 망명 신청한 金기삼씨의 ‘임동원 간첩 의혹’ 증언을 계속한다.
<편집자주>
![]() 金대중 정권 초기 이종찬 원장과 나종일 차장은 햇볕정책에 대해 다소 회의적인 시각을 보여 임동원씨와 눈에 보이지 않는 갈등을 보이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얼마 가지 않아 안보라인에서 완전히 배제되고 말았습니다. 이들을 제거하고 난 후, 임동원씨는 아무런 견제도 받지 않고, 이른바 햇볕정책이라는 허울아래 가히 굴욕적이라고 할 대북정책을 일관되게 추진하였습니다. 박재규, 홍순영, 정세현 등 역대 통일원 장관뿐 아니라 모든 안보관련 수장들을 자기 사람으로 임명하면서 절대적인 힘을 보여 주었습니다. 지난 2000년 4월, 엄익준 차장이 죽기 전, 임동원씨는 엄차장의 손을 잡으며, “이 다음에 장관으로 천거하려 생각했는데, 이렇게 가면 어떻하느냐?”고 말했다고 합니다. 그는 장관자리 하나 정도는 언제든지 임명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었던 것입니다. 金대중 정권 초기, 대북 첩보수집 부서에서는 “남북관계가 잘 풀릴려면, 임동원이 책임 있는 자리에 나서야 한다.”는 북한쪽의 첩보가 수시로 입수되었습니다. 북한이 남쪽과 대화할 때, 남쪽 대표가 북한 출신이기를 선호한다는 것은 오래 전부터 잘 알려진 사실이지만, 이렇게까지 노골적으로 자신들의 의사를 전달하는 것은 아주 의외의 일이었습니다. 사전에 북한과 입을 맞추지 않고는 있을 수 없는 일인 것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임동원씨가 간첩이 아니면 설명되지 않는 일입니다. 잠시 시계를 꺼꾸로 돌려, 임동원씨의 옛날 행적을 몇 가지만 더듬어 보겠습니다. 임동원씨는 지난 91년 남북합의서 체결시, 우리측 실무 대표로 북한을 십여차례 방문한 적이 있는데, 그 때 북한측에서 그에게 누이와의 만남을 몰래 주선해 주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저는 이 때부터 임동원씨의 심경에 무슨 변화가 있었을 것이라고 추측하며, 임동원과 북한간에 모종의 합의가 이루어진 것으로 판단합니다. 그 후 임동원씨는 이른바 남북회담 훈령조작사건을 언론에 흘려, 대북 강경론자인 이동복 특보를 낙마시킨 것은 우리가 모두 아는 대로 입니다. 94년 초, 임동원은 김대중이 설립한 아태재단의 제2대 사무총장으로 앉았습니다. 94년 7월, 북한의 김용순은 마치 이에 화답이라도 하듯이 ‘아시아 태평양 평화 위원회’라는 것을 발족시키고 공개적으로 아태재단과의 교류를 요청하기도 했습니다. 저는 북한이 이러한 용어를 선택한 점에 주목합니다. 왜냐하면, 이 때만 하더라도 북한은 주체사상을 주장하던 시절로, ‘아시아 태평양’이라는 용어는 그들에게는 생경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왜 하필이면 “아시아 태평양”일까요? 사전에 서로 입을 맞추지 않고는 붙이기 힘든 명칭이 아닐까요? 임동원이 아태재단의 사무총장으로서 비밀리에 북한과 접촉한 것은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습니다. 임동원과 김용순은 95년에서 97년까지 매우 긴밀한 관계를 유지한 것으로 추측되고 있습니다. 임동원과 김용순은 동갑 나이이지만 서로 개인적인 스타일은 판이합니다. 그런데도 둘 사이는 대화가 아주 잘 통합니다. 저는 또한 임동원씨가 북한의 대남문제를 실질적으로 총괄하고 있는 임동옥(춘길) 아태위원회 제1부위원장과도 모종의 관계가 있을 것이란 의심을 짙게 가지고 있습니다. 임동옥은 임동원씨보다 나이가 한 살 아래입니다. 저는 이 시기의 임동원씨의 대북 커넥션을 밝히는 것이, 그의 간첩혐의를 입증하는 데 결정적인 중요성을 가진다고 생각합니다. 김대중 정권 초 이종찬 원장 시절, 임동원씨는 이상스럽게도 손발을 맞추어야 할 안보관련 고위 인사들에게 자신의 속내를 드러내지 않고 석연치 못한 행동을 할 때가 많았습니다. 허심탄회하게 의견을 교환해야 할 안보 장관들이 자신의 의견을 정확히 드러내지 않는 이상한 광경이 벌어진 것입니다. 이 때부터 김보현 대북전략국장은 직속 상관인 나종일 차장과 이종찬 원장을 제치고, 임동원 청와대 외교안보 수석과 직거래하는 일이 잦아 졌습니다. 명령과 복종을 중시하는 국정원의 분위기로 볼 때, 이러한 일은 아주 이례적인 것이었습니다. 어찌하여 이러한 일이 일어날 수 있었던 것일까요? 미국방문시 의혹 1999년 하반기 천용택 원장 시절, 당시 통일부 장관이었던 임동원은 미국을 방문하여 페리 전 장관 등 미측 인사들을 만나 한반도 문제 등을 논의했습니다. 그 때에도 임동원씨는 자신의 행적과 협의내용을 극비에 부치고, 국정원 파견관을 의도적으로 따돌렸습니다. 당시 최덕O 샌프란시스코 파견관은 임동원의 방미 활동을 제대로 파악, 보고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천용택으로부터 “철수하라.”라는 질책까지 받아야만 했습니다. 그 당시 임동원씨는 자신의 통역관에게 “누구에게도 통역내용을 발설하지 말하.”고 엄명을 내렸다고 합니다. 여담입니다만, 최덕O 영사는 해외조사국 (1국) 북미과장시절 일을 너무 깐깐히, 열심히 하는 탓에 부하 직원에게 인기가 없던 사람이었습니다. 지난 2001년, 저는 그 분이 위장암으로 별세했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는데, ‘직업병으로 돌아가셨구나’ 하고 생각했을 정도였습니다. 왜 그런 분이 동향을 파악하지 못할 정도로 임동원씨는 극비리에 행동해야만 했을까요? 2000년 초, 임동원은 국정원장으로 부임하자마자, 모든 해외 파견관들에게 대북 비선 접촉라인을 개척하라고 특별 지시하였습니다. 그 당시 북경에 파견된 통일부 직원(통일관)이 국정원 몰래 대북 비선라인 구축을 시도하고 있었습니다. 그 통일관은 대북 브로커인 최수진 흑민경 사장이란 자를 통해 아태위의 김완수 참사와 연계해 일을 진행했었습니다. 이때 이러한 동향을 보고받은 임동원씨는 필요 이상으로 격노 했었습니다. 한 달 전까지만해도 자신의 부하 직원이었던 통일부 직원이 당연히 해야할 일을 했을 뿐인데 말입니다. 임동원씨의 그러한 과잉 반응은 도무지 의아스러울 뿐이었습니다. <다음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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