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보는 그때 그 기사
본보 자매지 LA 매일신문
1992년 2월 20일자 관련기사 「노컷 시리즈 전재」
‘부패씨앗’ 품은 김영삼의 두 얼굴
버려진 딸 현재 “뉴욕”서 살고 있다.
1962년 생 가오리 양의 “통한의 30년”
인륜 천륜마저 저버린 희대의 변절자 김영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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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보 자매지였던 LA 매일신문 1992년 2월 20일 자 1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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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를 다시 전재하는 특성상 시대를 고려하지 않고 원문 그대로 옮겼음을 밝혀 드립니다
현재 한국 정치사에 있어서 차기 대권주자로 꼽히고 있는 김영삼 최고 대표위원은 과연 ‘민주화의 화신인가 시대의 변절자인가’. 이러한 질문에 대해 숨겨진 그의 비화를 들추어 보는 것은 인간 김영삼을 재평가하는 데 중요한 자료로 남을 것이다.
한국 정치사에서 최고의 암흑가로 불리우는 유신시절 독재에 항거 단식 투쟁을 벌이며 민주화의 화신으로 김대중 씨와 함께 한국민주화의 양대 산맥으로 꼽히는 김영삼 대표는 그가 말한 대로 중학시절부터 꿈꾸어 온 이란 야망을 불태우기 위해 국민을 위한 헌신적인 노력을 기울여 왔는 것인가 하는 의문에 반증적인 사실 하나로도 앞으로 한국의 운명을 거머지게 될지도 모르는 김 대표를 이해하는 방편으로 국민의 의사를 인간 김영삼과 인륜과 천륜을 동시에 저버린 또 다른 이면의 인간 김영삼을 실제적인 접근을 통해 찾아보기로 한다.
‘한국 민주주의의 양대산맥’ 혹은 ‘희대의 변절자’로 불리우고 있는 김영삼 민자당 최고 대표위원과 관련해 그의 도덕성에 치명적인 약점으로 나타날 수 있는 사실이 속속 밝혀 지면서 충격을 던져주고 있다.
약관의 나이로 정계에 진출해 국회사상 최연소 당선의 기록을 세우며 입신양명의 길을 달려온 김대표에 의해 의도적으로 철저하게 버려진 딸이 현재 뉴욕에서 거주하고 있는 사실이 최근 밝혀져 그의 정치적인 사상과 신념이 허구였다는 것이 새롭게 재조명되고 있다.
현재 부친인 김영삼 대표에게는 잊혀진 딸로 모친인 이경선 씨에게는 외동딸로서 외조모와 함께 살고 있는 가네다 가오리 양(당시 92년 보도에는 가네꼬 가오리가 아닌 가네다 가오리로 보도 되었음을 밝혀둠)은 올해 나이 30세로 그녀의 출신내력은 대략 다음과 같이 알려졌다.
김영삼 대표가 약관의 나이로 정계에 진출, 재선의 고비를 넘겼을 무렵인 60년 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김 대표는 종로에 위치한 ‘호수그릴’ 주변에 산재한 요정(당시 정치인들이 즐겨찾던 요정에는 선운각, 청운각 등이 있었다) 중에 S 요정에서 가네다 가오리 양의 모친인 이경선 씨를 만났다고 당시를 회고하는 측근은 증언했다.
즉 가네다 가오리 양의 모친인 이경선 씨는 당시 요정 가에서는 인기 절정의 기생으로서 젊은 김 대표를 만난 것이다.
이 씨는 김 대표를 만나기 전 당시 서울에서 유력 기업으로 손꼽히던 독립산업 함청희 회장 소실로 그와 사이에 함영준(현재 32세) 씨라는 아들을 두었으며 함영준 씨가 출생하자마자 함 회장은 작고해 이 씨는 계속 기적에 머무를 수 밖에 없었다고.
함 회장이 유명을 달리한 뒤 이경선 씨는 김 대표를 만난 것이고 김 대표와 연분을 갖던 중 김 대표에게는 있어서는 안될 씨앗이 잉태된 것이며, 그 씨앗이 기생 이 씨의 몸에서 자라 났다.
물론 김 대표는 자신의 정치생명에 지장을 줄 수 있는 불행의 씨앗을 없애기 위해 이경선 씨에게 몇 차례에 걸쳐 임신 중절을 강요했으나 김 대표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1962년 서울에서 출생한 그 사람이 바로 현재 일본명으로 알려진 가네다 가오리 양 (미국 명은 현재 그녀가 살고 있는 지역이 뉴욕 한인 사회 속에 속해 있어 개인 사생활 보호측면에서 밝힐 수 없음) 인 것이다.
가네다 가오리양은 출생 직후 어머니인 이 씨를 따라 일본으로 건너 갔으며 이 씨는 일본에서 서울과 마찬가지로 게이샤로 일했으며 때론 계주로 활동해 돈을 모은 것으로 알려 졌다. 이 씨의 도일 배경은 가네다 가오리 양이 한국에 있을 경우 사생아로 호적에 오르기 때문이었다는 설도 있다.
당시는 故 박정희 대통령이 집권하고 있는 때였으며 이때의 일화로 일본으로 건너가 이경선 씨를 찾은 김 대표는 이 씨에게 “내가 대통령이 당선되면 당신에게 비원(秘苑)을 주겠다” 고 말했으며 그때까지도 김 대표를 사랑한 이 씨는 빚을 내서 김 대표에게 당시 돈으로 5백 만엔 을 준 것으로 밝혀졌다.
그러나 김 대표가 이경선 씨에게 사랑고백을 한 것도 잠시일 뿐 한국으로 다시 건너 간 김 대표는 자신이 중학교 시절부터 꿈꾸어온 ‘대통령 김영삼’이란 야망을 향해 돌진했다. 김 대표는 자신의 딸의 장래에 대해서는 관심 밖이었다는 것이 이경선 씨가 일본에서 거주할 때 주변인들의 증언이다.
물론 김 대표에 의해 버려진 이경선 씨에게는 당시 공인회계사이자 재일 거류 민단장을 지낸 윤 모 씨 (현재 작고)가 배경으로 등장했다. 윤 단장은 이경선 씨에게 일본 마포(麻布)에 집을 사주는 등 김 대표와 달리 두 모녀에게 따뜻하게 대했다고 당시를 기억하는 재일교포들은 술회했다. (그러나 그 집마저 나중에는 김 대표의 정치자금으로 쓰여졌다) 한번은 윤 모 씨가 이경선 씨에게 김 대표를 매몰차게 대하지 않았냐는 힐책성 말에 이 씨는 “딸의 아버지에게 어떻게 그렇게 하겠느냐”고 말했다는 일화도 있다.
가네다 가오리 양의 이름은 이 씨가 가네다 양이 학교에 들어갈 무렵 일본인의 호적에 얹어 이와 같은 이름을 얻었다고 한다. 김영삼 대표가 천륜(天倫)과 인륜(人倫)을 저버린 대표적인 사례로 가네다 가오리 양이 생면부지의 아버지를 첫 대면한 대목에서 잘 살펴볼 수 있다.
가네다 가오리 양이 15세 되던 해인 1977년 일본제국 호텔에서 이 씨와 함께 김 대표를 만난 자리에서 가네다 양이 김 대표를 가리키면서 “저 아저씨가 누구냐” 고 어머니인 이 씨에게 묻자 김 대표가 “잘 논다. 지 애비 보고 아저씨라고 말하니 딸 교육 잘 시켰다”고 이 씨를 힐책 했다는 것이다.
김대표와 이빈화 씨 사이의 염문설이 일반에게 알려지고 난 뒤 이 씨와 김 대표와의 관계는 멀어졌으며 이후 가네다 가오리 양은 미국의 외조모에 의탁하며 생활해온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비단 가네다 가오리 양의 실존 사실이 그 동안 정치적인 역경을 겪어온 김영삼 대표에게는 그의 정치적인 목표와는 무관한 것인지 모르나 (적어도 그의 생각에서) 소위 정치적인 도덕성을 최고의 가치로 삼고있는 현대 민주주의 사회에서 그의 이면적인 사실이 김 대표의 사상과 신념을 믿고 따랐던 사람들이 한번 당한 배신감 위에 인간 김영삼의 배덕(背德)을 어떻게 바라볼지 궁금하다.
또 한국 기독교회 중 최대규모를 자랑하는 충현 교회의 장로라는 직분을 갖고 잇는 김 대표에게 과연 가네다 가오리 양은 어떠한 종교적인 양심으로 비추어지는지 또 하나의 의문으로 떠오르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