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구잡이 「납치극」 자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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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아시아타임즈에 북한정권의 외국인 납치사건에 대한 분석기사가 게재되 관심을 모았다. 필자는 현재 호주 국립대에서 동양학을 담당하는 안드레이 랑코프 박사인데 과거 레닌그라드 국립대학에서 이조 당쟁사를 연구해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는 이번 아시아타임즈에 기고한 글에서 납북자 문제뿐 만이 아니라 남한의 친북 좌익들 움직임까지도 언급하고 있다.

랑코프 박사는 한국과 북아시아에 관한 저서를 여러 권 출판했는데, 현재 서울에 소재한 국민대학에서 가르치고 있다. 영문기사를 북한인권 국제연대 미주대표 남신우씨의 번역문을 게재한다.

<편집자주>


지난 1974년에 찍은 낡은 사진이 최근 북한에서 밀반출됐다. 이 사진은 20대, 30대 청년들이 북한의 명소, 묘향산을 배경으로 그룹 촬영을 한 것이다. 사진에 나오는 이 청년들은 위대한 수령 아바이 김일성에게 충성하고 열심히 일한 대가로 정부에서 상으로 관광을 보내준 “모범 일꾼”들로 보인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가 않다: 이들은 바다에 고기를 잡으러 나갔다가 북한에 잡혀온 남한 어부들이다.

요즈음 요상하게 북한에게 추파를 던지고 있는 남한정부는 이 사진을 보고도 아무런 논평이 없었다. 이런 사진을 보고 비판적 논평을 하면 북한과의 미묘한 관계에 큰 파장이 있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북한은 남한에서  바닷가에 놀러온 10대 아이들, 인권운동가들, 중국에 갔던 목사, 학교 선생님, 그리고 최소한 외교관 한 명 등을 포함해 수많은 남한 국민들을 납치해갔다. 북한 첩보원들은 납치를 좋아한다.

물론 딴 나라 정보요원들도 사람을 한둘 납치하는 것은 보통이다. 그러나 거의 대부분, 그런 극단적 조치를 취하는 까닭에는 급한 사유가 있게 마련이다. 납치 당해가는 사람이 반대세력의 거물급이라든가, 정상 채널로는 체포해갈 수없는 악질 범법자라든가, 아니면 재수없기는 하겠지만, 비밀을 너무 많이 알고 떠버리기 좋아하는 사람들이라든가, 무슨 이유가 있기 마련이다.

그런데 북한요원들이 사람을 납치해가는 것은 좀 다르다: 이들은 아무나 마구잡이로 보통 사람들을 납치해간다. 북한은 이렇게 마구잡이로 사람들을 납치해갔기 때문에, 전에는 “서울 정권이 날조한” 납치극이라는 말도 돌기까지 했었다.

사실, 북한같은 스탈린 국가의 보안요원들이 왜 돈 드리고 시간 쓰면서, 일본인 국수 요리사나 테니스광 10대 아이를 납치해갔을까? 그러나 2002년, 딴 사람도 아니고 바로 친애하는 령도자 김정일 자신이 아무런 이유없이 일본인 남녀들을 납치해갔다는 사실을 인정했다.물론 북한첩자들이 일본 국민들만 납치해간 것은 아니다.


















북한요원들은 1950년대와 1960년대, 소련이나 딴 공산국가에서 자국의 반대세력들도 납치해갔다. 그리곤 재미가 들렸는지, 그 다음부터는 범위를 넓혀서 남한 국민들을 납치해갔다.

그동안 최소한 486명의 남한 국민들이 납치 당했고, 그들은 다시 고향 땅을 밟지 못했다. 그리고 이런 통계에는, 북한이 최근 중국에서 자국민 탈북자들을 납치해간 숫자는 포함되어 있지않다. 남한에서 납북 당해 간 사람들을 몇 그룹으로 나눌 수 있다:

어부들, 해군 장병들, 하이재크 당한 여객기의 여객들과 승무원들이다. 그리고 이 납북자들에는 비밀 작전에 희생당한 사람들도 섞여있다. 그런 사람들이 17명이라고 추정한다는데, 실제 숫자는 이보다 훨씬 많으리란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납치 작전은 거의 완전무결해서, 희생자들은 불시에 사라지고 시일이 좀 흐르면 사망으로 간주되곤 한다.

그 본보기 예가 바로 1977-78년에  남한의 한 섬 해안에서 사라진 6명의 남한 고등학생들이다. 그들은 지난 20년간, 모두 물에 빠져 죽은 것으로 알고 들 있었는데, 1990년대 말, 이들은 북한에서 남한 밀파 간첩들에게 남한의 문화나 생활습성을 교습해주는 교사로 일하고 있다는 것이 드러났다. 이 납북사건을 주의해서 분석해보면, 이들은 일본 국민들이 납북 당했을 때와 거의 비슷한 시기에 사라졌었다. 남한과 일본에서 납치당해간 이들은 거의 모두가10대 아이들이었고, 북한에서 모두들 남파 간첩들의 교육을 담당하고 있었다.

10대들만 납치해간 이유는 아마 이들이 아직도 어려서 세뇌교육이 잘 되고, 아직 남한이나 일본 문화생활을 잘 알고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남한에서 물에 빠져죽은 아이들, 산에서 없어진 아이들이 얼마나 많이 북한으로 잡혀갔을까? 그리고 그들 중 아직까지 살아남은 아이들은 몇 명이나 될까? 그동안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외국에서 납치당해 갔다.

1979년 4월, 한 젊은 청년이 오슬로 주재 북한대사관에 걸어 들어갔다. 이름이 고상무란 그 청년은 학교 교사였는데,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는 확실치 않다. 북한 쪽은 예의, 이 청년이 북한으로 망명했다고 주장했고, 남한 쪽은 이 청년이 실수로 북한대사관에 들어갔다고 주장했다. 이 청년은 택시를 잡아타고 운전기사에게, “한국대사관에 갑시다” 했는데, 택시 기사가 잘못 알아듣고 이 청년을 북쪽 한국대사관으로 데려간 것이었다.

당시 몹시 시끄러웠던 이 사건이 납치였는지, 망명이었는지, 아니면 둘 다 아니었는지, 이제는 진상을 가릴 수가 없다. 그러나 1994년 이 고라는 청년이 북한 정치범수용소에 갇혀있다는 소식이 알려졌다. 고 청년은 북한방송에 나와서 자신은 자유로우며, 행복하게 결혼했고, 그의 발표문은 상투적인 美제국주의자들 들과 그들의 꼭두각시 남한정권에 대한 적대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

우리는 이 청년이 방송을 맞춘 뒤, 어디로 갔는지 모른다. 평양 아파트로 갔는지, 아니면 정치범 수용소 땅굴로 갔는지, 아무도 모르지만 그 청년은 아마 수용소에 갇혀있을 확률이 높다. 고 청년의 부인은 남한에서 이 비극을 이기지 못하여 자살하고 말았다.

그리고 북한이 필요에 의해서 납치해간 사건도 있다: 중요한 정보를 소지한 사람을 납치해간 것이다. 1971년 서독 한국대사관에서 근무하던 외교관 유성근 씨는 서 베를린 시에서 그의 부인, 두 아이들과 함께 납치당했다. 1970대 유럽에서 실종된 여러 남한 관리들은 북한요원에 의하여 납치되었을 가능성이 높지만, 유씨의 납치극만이 분명한 사실이다.







1990년대에는 주로 중국에서 납치사건이 일어났다. 납치된 사람들은 정치운동가들, 전교사들, 그리고 진짜든 가짜든 남한의 첩보요원으로 지목 받은 사람들이 납치되었다. 이 모든 납치사건은 중국의 동북부, 북한과의 접경지역에서 일어났다. 남한정부는 최근에야, 중국에서 탈북 난민들을 돕던 김동식 목사가 2000년 1월에 북한요원들에 의하여 납북되었다는 것을 인정했다. 김목사는 북한으로 끌려가서 보위부 요원들에게 스탈린 식의 취조와 고문을 당했을 것이다.

김목사는 감옥에서 사망했다. 그러나 납치사건의 486명 납북자들 중 435명은 북한해군에게 바다에서 잡혀간 어선들에 타고있던 어부들이다. 이런 일이 있을 때마다 북한은 이 어부들이 일부러 경계선을 넘었다고 주장했고, 남한에서는 이런 북한의 주장을 부인하던지, 아니면 어부들이 실수로 넘어간 것이라고 변명해왔다. 1960년대, 70년대의 남한어선 항해술은 아주 초보적이었기 때문에, 이 어선들이 경계선을 넘어갔는지 어땠는지는 가릴 수가 없다.

북한은 어떤 경우에는 어부들을 돌려보냈지만, 평양정권은 많은 경우, 이 어부들이 “사회주의 천국에 머물러 살고싶어 하고, 자본주의 생지옥 남한에는 돌아가기 싫어한다”고 주장했다. 어떤 경우 북한의 이런 주장이 사실이었는지 모르겠으나 대부분은 새빨간 거짓말이었다.  납치나 망명을 확실히 가린다는 것은 항상 문제점이 있었다.

납치사건이 일어나면 남한정부나 납북자 가족들은 납치라고 주장했고, 북한은 그들이 자진해서 북한으로 왔다고 주장했다. 앞으로도 납치였는지 망명이었는지 절대적으로 확실히 가리기는 어려울 것이다. 김정일이 죽은 뒤에는 더욱 가리기가 힘들 것이, 이 납북자들이 자진해서 스탈린 국가로 망명했다고 말하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남한 어선이 납치되어간 첫 사건은 1955년 5월이었다. 가장 최근의 납치사건은 1987년, 12명이 북한에 포로로 잡혀간 사건이다. 그 후에는 북한은 납치해간 사람들을 모두 다시 보내줬다.1969년 대한항공 여객기가 공중에서 하이재크 당했다. 북한은 승객 대부분을 남한으로 보내줬지만, 승무원과 여객 12명은 북한에 붙잡아두었다.

나중에 알려졌지만, 승무원 2명은 북한의 대남 선전방송의 방송요원이 되었는데, 많은 납북자들이 이런 식으로 라디오 방송국에서도 이용되었다는 것이다.
북한 당국은 보통 납북자들의 지식과 기술을 써먹으려 한다. 납북되어간 어부들이 무슨 중요한 정보를 갖고 있을 리 없으나, 북한은 이들을 훈련시켜서 남한에 간첩으로 밀파하고 있다. 그리고 북한은 이들을 이용하여 남파 간첩들의 교육에 써먹고 있다. 남한에서 교육을 받은 납북자들은 대남선전기관, 방송들에 써먹고 있다.

북한에서 납북자 대부분은 시골로 보낸다. 납북자들 중 어떤 사람들은 평상 생활을 영위할 수도 있다. 예를 들자면, 1974년 11월 납치되어간 김평도 씨란 어부 납북자는 북한에서 공장일꾼이 되었다. 그는 나중에 십장이 되었고, 일을 잘한다 해서 훈장까지 받아서 딴 북한사람들과 별로 다르지 않은 생활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2003년 그는 중국으로 탈출해서 남한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이렇게 운이 좋은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납북자들은 “가면을 벗은 스파이”나 반동이라는 낙인이 찍혀서 정치범 수용소에 간 사람들이 많다.고상무 씨가 바로 그런 예다.

그러나 서울에서는 왜 납북자들에 관한 얘기를 전혀 못 들을까? 일본에서 납북 당한 사람들은 아주 제일 많은 숫자로 추정해도 60명이 넘질 않는다. 그런데도 일본에서 는 납북자 문제로 정치권이 시끄럽고 동경이 이 문제로 벌집 쑤신 듯 야단들이다. 그런데 남한에서는 납북자 가족들이나 우익 몇몇이 이 일에 관심을 보일 뿐이다. 도무지 어떻게 된 일인가? 바로 현재 남한 전체의 대북관 때문이다. 1960년, 70년대 군사정부에서는 납북자 문제를 선전으로 써먹었기 때문에 남한의 중년층들은 이런 선전에 알레르기 반응을 보인다. 지금 남한의 정치를 잡고있는 좌익들은 북한에 매우 우호적이다.

그들의 논리는 간단하다: 북한의 비위를 거슬리면 좋을 것 하나도 없고 일만 꼬일 것이란 주장들이다. 요즈음 남한의 좌익 언론이 즐겨 쓰는 말은, “발전이 우선이고  인권은 나중이다.”


이로써 지난 92년 2월 제14대 대선을 앞둔 시점에서 당시 본보의 자매지였던 LA 매일신문이 3회에 걸쳐 당시 ‘집권당인 민자당의 대표였던 김영삼 씨에게 30년 전 버려진 딸이 있다’고 기사화함으로써 촉발된 ‘김영삼 씨의 숨겨놓은 딸 공방전’과 관련 진위여부에 종지부를 찍을 계기가 마련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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