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씬함을 추구하는 외모 지상주의와 풍요로운 먹거리, 이로 인해 현대인에게 먹는 일은 ‘기쁨’과 ‘걱정’의 양면성을 가진다. 따라서 맛난 음식을 배불리 먹고 싶은 원초적 본능과 멋진 외모를 뽐내고 싶다는 호모 사피엔스적 욕망은 절묘한 조화를 이루며 공존해야 한다. 식이장애(Eating Disorder)는 바로 이 둘 간의 조화가 깨질 때 나타나는 병이다. 발병 시기도 이성을 느끼고 외모에 신경을 쓰기 시작하는 사춘기부터 나타나며, 외모가 중시되는 여성환자가 남성보다 10배 이상 많다.
신경성 거식증 =말 그대로 음식을 거부하는 병이다. 유병률은 15~30세 여성의 1% 정도다. 사춘기 여학생에게 흔하지만 초등학교 고학년, 여대생 등에서도 드물지 않게 나타난다. 환자들은 완벽을 추구하는 성격상 공통점을 지닌다.
키 1m55㎝, 체중 52㎏의 K양(16). 어느 날 친구에게서 ‘통통해 보인다’는 말을 듣고 살빼기에 돌입했다. 42㎏ 체중을 목표로 시작한 다이어트는 이내 A양의 식욕을 없앤 뒤 급기야 음식을 혐오하는 상태로 만들었다. A양은 급속한 체중 감소와 함께 생리가 없어졌지만 굶다시피하는 생활이 계속됐다.
K양이 병원을 찾았을 때는 일상생활이 불가능한 영양실조 상태였다. 몸무게 26㎏으로 길을 걷다 사망할 위험성도 있다는 것이 담당의사의 설명이다.
의사는 K양에게 입원을 권했고, 절대안정과 함께 1주일에 1㎏ 정도 체중 증가를 목표로 영양공급을 시작했다. 동시에 심리치료도 병행했다. 입원 10주가 지난 지금 K양의 몸무게는 37㎏. 이전 체중을 유지하기 위해선 앞으로도 넉 달 정도의 지속적인 치료가 필요하다. 통상 거식증 환자에겐 ‘4-3-2-1’의 법칙이 적용된다.
백상 신경정신과 강희천 원장은 “거식증 환자를 15년간 추적 관찰해 보면 40%는 회복, 30%는 증상 호전, 20%는 만성거식증, 10%는 자살.영양실조 등으로 사망한다”고 설명한다.
거식증은 초기 증상 (표 참조)이 의심될 때부터 조치를 취해야 치료 효과가 좋다.
치료의 첫걸음은 영양실조 상태를 개선시키는 일. 심할 땐 입원 후 튜브를 통해서라도 억지로 음식을 먹여야 한다. 건강상태가 개선되더라도 몇 달간은 다이어트.몸매 등에 대한 잘못된 생각을 바로잡는 심리치료와 가족과 함께하는 행동치료.약물치료 등을 받아 재발을 막아야 한다.
신경성 폭식증 =음식의 양과 속도를 스스로 조절하지 못한 채 배가 아프고 구역질이 날 정도로 빨리 많이 먹는 병이다.
폭식 뒤엔 살찔 것에 대한 두려움이 밀려와 손가락을 넣어 구토를 유발하거나, 하제(변비약) 등 살빼기를 위한 극단적 행동을 취한다. 환자는 이런 자신의 행동에 대해 수치심.혐오감.죄책감 등을 느끼면서 우울증에 쉽게 빠지는 게 특징이다.
어릴 때부터 통통하고 예쁘다는 말을 줄곧 들어온 A양(21). 대학생이 된 뒤 식습관이 불규칙해지면서 살이 찌기 시작했다. 그녀의 폭식증은 굶다시피한 살빼기 다이어트가 계기가 됐다. 남자 친구가 “요즘 살쪄 보인다”는 말을 한 뒤부터 혹독하게 음식 제한을 한 것이다.
문제는 배고픔을 참지 못해 발생하는 폭식이었다. 물론 폭식 뒤엔 살찌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곧바로 엄습했다. 억지로 구토를 하면서 이내 안도감을 느꼈다. 이후 식욕이 당기면 폭식을 한 뒤 얼른 화장실에서 구토해 버리는 일이 A양에게 일상이 됐다. 많이 먹고도 정상 체중을 유지할 수는 있었지만 자신의 무력한 행동에 대해 무력감.자책감 등 우울증이 찾아왔다. 그녀의 자살 가능성을 눈치 챈 부모가 그녀를 강제로 병원에 데려갔다.
폭식증은 정신뿐 아니라 신체 손상도 초래한다. 우선 구토로 인해 앞니 안쪽 치아가 잘 손상된다. 침샘이 붓거나 식도 염증으로 목이 아프고 쉬는 경우가 흔하다. 때론 심한 구토로 식도 벽이 손상돼 출혈이 발생하기도 한다. 또 구토.하제.이뇨제 등을 남용하다 탈수.전해질 장애를 일으켜 심각한 상태에 빠지기도 한다. 따라서 폭식증이 의심될 땐 (표 참조) 즉시 잘못된 생각을 바로잡고 충동을 조절할 수 있도록 약물치료.정신치료.행동치료를 병행해야 한다.
황세희 의학전문기자.의사 [email protect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