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의 민간사찰길 열려 이렇게 하여 하루아침에 대정부, 대기업조정 업무를 물려 받은 보안사령부에서는 늘어난 근무처의 요원 충당을 위해 갓 훈련 받은 신병들을 대거 충원 받아 정부기관과 대기업체에 투입하였으니, 젊은 홍안의 병사들이 막중한 임무를 띠고 각 기관에 출입하는 광경을 보는 국민들의 눈에는 어떻게 비쳐졌을까?
김형욱의 성격상 대 간첩통제권을 상실한 틈에 북한의 무장공비가 청와대 언저리까지 침투하는 것을 책임자인 윤필용이 몰랐으니 이 얼마나 좋은 기회인가! 군부대들이 침투를 모르고 오직 자신의 휘하 인 내가 ‘무장공비 출현’을 알아냈으니 말이다. 아마도 김형욱은 “각하, 보십시오. 대 간첩작전은 역시 중정이 맡아야 합니다”라고 소리 치고 싶었을 것이다. 그래서 김형욱은 나에게 ‘무장공비 출현’을 비밀에 부치도록 명령했던 것이다.
박 대통령이 ‘대통령 훈령 18호’로 김형욱을 제친 것은 대통령 특유의 통치 스타일인 ‘견제론’의 일환인 것으로 보여진다. 이런 통치 스타일을 제대로 익히지 못했던 김형욱은 ‘못된 개가 주인을 물듯’ 해외로 망명해 ‘독재타도’라는 명분으로 ‘청문회 증언’이나 ‘회고록 발행’ 등등을 하다가 끝내 미스테리한 죽음으로 아직까지 언론에 회자되고 있다.
소위 ‘김신조 일당 청와대 기습 사건’은 당시 서울 시민은 물론 전국민을 경악케 했으며 한편, 우리 국방정책과 대북 군사대비태세를 다시 검토하고 점검해보는 중요한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사건의 발단은 1968년 1월21일 밤 10시경, 31명의 북괴 무장게릴라가 청와대를 습격하기 위해 서울 세검정까지 침입하였다. 이들은 북한군이 1967년 4월 창설한 민족 보위성 정찰국 직속 124군 부대의 습격·파괴·살상 전문 특수교육을 받은 요원들로서 31명 전원 25세 전후의 함경도 출신들이었다. 이들은 남파 직전까지 황해도 사리원에 청와대 모형을 만들어 놓고 예행연습을 해왔으며 남파 시엔 개인별로 기관단총, 권총, 대전차수류탄 및 방어용 수류탄 등 중무장을 한 상태였다.
이 사건은 당시 경제개발에 총 매진하던 우리에게 대북 경각심을 제고한 좋은 계기가 되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미 대통령특사가 내한하여 한·미간 안전보장을 위한 공동성명이 발표되었으며 무엇보다도 정부는 `싸우면서 일하고, 일하면서 싸운다’는 향토예비군을 창설(68년 4월1일)했다.
또한 그 해 5월 워싱턴에서는 `한국의 국방력 강화와 극동에서의 자유진영 방위문제’를 주제로 제1차 `한·미 연례안보회의’가 개최되었으며 이후 방위산업육성, 한국군의 현대화, 자주국방태세에 대한 전면적인 계획을 수립하였고 그 일환에 의하여 대비 정규전 전담부대 편성, 해안경찰의 전투경찰화, 해안초소 통신설비 보강, 철책선 설치, 팬텀전투기 인수, 미 공군력 증원 등 군의 현대화에 박차를 가하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1·21청와대기습사태는 우리의 방위태세와 자주국방의 내실화를 촉진시키는 기폭제가 되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국민들의 대북 경각심 제고로 간첩신고 정신이 고양되었으며 강력한 군사력만이 북한의 재도발을 막는 길임을 자각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 사건이 발생한 지 38년이 되었지만 북한의 대남적화통일이란 기본목표는 예나 지금이나 단 한치도 변하지 않고 있다. 때문에 유비무환, 이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친 말이 아닌 것이다.
(다음호는 ‘제주도 4.3 사건’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