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데이저널에 최추봉 회장의 ‘제주4.3 사건’이 연재되면서 동포사회에서도 ‘4.3사건’에 대한 의견이 분분해지고 있다. 올해 6.25는 한국전쟁 발발 55주년이 된다. 최근까지도 북한은 “6.25전쟁은 북침에서 야기됐다”고 주장해왔다.
그러다가 소련이 붕괴되고 러시아로 다시 편성되어 구소련 비밀문서들이 공개되면서 북한의 남침이 역사적 사실로 다시 증명되었다. 한때 미국의 진보학자로 자처하는 부르킹스가 “북침설”을 펴내자 남쪽의 어리석은 학자들이 이를 침소봉대하기에 이른 적도 있었다. ‘제주 4.3 사건’을 야기시킨 공산 프락치들은 김일성의 남침계획을 뒷받침하기 위한 전초전이었던 것이다.
<편집자 주 : 정리- 성진 기자 >
필자의 “이제는 말할 수 있다”가 연재되면서 일부 피해자들이나 유족들은 ‘4.3 사건은 과거 정부가 벌인 학살극’이라고 항변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있다. 실지로 제주4.3 사건 진압작전에 참여했던 본인은 공산주의자들로부터나 또는 국군, 경찰들의 진압작전 중에 피치못할 상황으로 본의 아니게 피해를 입은 선량한 주민들에 대해서는 심심한 애도를 드린다. 하지만 필자는 이 순간에도 4.3 사건의 원인은 공산주의자들의 책동으로 야기된 역사적 사건이란 점에는 이의가 없다. 지난호에서도 언급했지만 군법재판에서 사형을 당한 사람들의 시신을 유족에게 통보나 인계치 않았다는 점은 도덕적으로도 잘못된 점이었다고 생각한다.
이 같은 4.3 사건 등은 김일성의 남침 야욕을 정당화시키는 조건이 됐다. 6.25전쟁을 일으키기 위해 스탈린과 모택동에게 남침을 할 경우 “남한의 민중봉기”는 당연하다고 설득했기 때문이다. 1949년 3월 5일부터 김일성과 스탈린은 단독비밀회담을 시작하여 3월 17일에는 드디어 1) 소련이 북조선의 전력증강을 돕고 2) 북한군 장교들을 소련에서 훈련시키며 3) 북한에 대한 경제원조로 4억 루블의 무상원조라는 3가지 협약을 맺게 되었다.
‘제주 4.3 사건을 포함해 여수.순천 반란사건, 대구폭동사건 등 수많은 반란과 폭동이 6.25전쟁의 전초전이었던 동시에 남침시에 남반부 인민들이 봉기하여 혁명전선이 자연적으로 형성됨으로써 적화통일이 용이할 것이라고 김일성은 판단했던 것이다. 실지로 4.3시건 등 반란과 폭동이 시기와 장소는 각각 달라도 북한 공산주의자들의 적화통일 야욕을 채우기 위하여 오래 전부터 계획한 도발이었음은 말할 필요도 없다.
하여간 스탈린은 김일성 일행이 평양으로 돌아간 뒤에도 평양 주재 소련대사 스토코브에게 “김일성의 남침 전쟁 준비동향을 은밀히 파악하여 수시로 비밀리에 보고하라”고 훈령했었으니 남침시의 미군의 개입을 예측하고 있었던 것은 사실인 것 같다. 하여간 김일성은 스탈린의 지시에 따라서 중국의 모택동을 찾아가서 스탈린과의 협약을 밝히고 남침계획을 도와 줄 것을 요청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모택동도 전쟁개시의 시기성이 좋지 않다고 타이르면서 중국의 내전이 아직 마무리가 안됐고 평정지역의 전후복구사업이 시급함으로 북한의 남침계획을 당장 도와줄 수 없다고 일단 반대를 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