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의 지도자 백범 김구선생님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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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에 이은 연속 3>
임정요인의 변절이탈과 친일파의 암중 활동까지 경계해야만 하는 상황에서 “경무국장이 심문관, 검사, 판사로 (죄인의 사형 등) 집행까지 하게 된다”는 백범 자신의 술회와 같이 임시정부의 경찰 사법권을 전담하다시피 해야만 하였다.

백범은 임시정부가 그래도 활기찼던 초창기를 지나 안팎으로 존립의 위험이 닥칠 무렵 내무총장에 선임되었다. 침체된 독립운동을 활성화시키기 위하여 국민대표회의가 소집된 것이 이 무렵이었다. 독립운동의 새로운 활로를 모색코자 독립운동 사상 최대 규모의 국내외 대표가 그것도 제제창명한 인사들이 모두 상해에 모여 신망있던 안창호와 김동삼 등이 차례로 의장이 되어 개최하였던 국민대표회의가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놓고 개조파와 창조파로 분열하여 이전투구의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백범은 여기서 중대결정을 내렸다. 내무총장의 직권으로 그 회의를 해산시켜 비등하던 정국을 안정시켰던 것이다.

국민대표회의를 그대로 방치하는 것은 임시정부의 법통을 끊는 것이 될 뿐만 아니라 국내외 독립운동을 파국으로 몰고 가는 것으로 판단하였던 까닭이다. 창조파들 만이 모여 만들었던 김규식을 주석으로 한 조선공화국정부도 자괴하고 결국 임시정부는 그 법통을 지킬 수 있었다. 또한 백범은 초대 대통령 이승만의 탄핵면직과 2대 대통령 박은식의 사임 등 정국 변동으로 만주에서 온 이상룡과 진강에서 온 홍진 등이 개정된 헌법에 의하여 국무령으로 선임되었지만 조각도 못 한 채 무정부 상태에 빠졌을 때, 이동녕의 천거로 국무령에 선임되어 윤기섭 오영선 김철 이츄홍 등을 규합하여 조각에 성공함으로써 임시정부의 법통을 이으면서 국무령제로 고치고 윤번 주석제를 채택하여 임시정부를 주도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1920년대 후반기에 접어들어 보다 시련이 가중되면서 임시정부는 단돈 30원에 불과한 임시정부의 청사 조금(租金)이나 20원 미만이던 불가결 용인의 월급도 지불하기 어려운 곤경에 빠져 그 활동이 극히 위축되었다. 겉으로는 문화정치를 표방하던 일제가 속으로는 혹독한 파괴공작을 펴게 됨으로써 임시정부와 국내를 연결하던 연통제가 거의 발각 와해되었고 아울러 국내외를 연결하던 교통국 역시 그 기능을 상실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보다도 일제의 마수에 걸려드는 독립운동의 동지들이 점차 증가하여 그들에게 투항하거나 혹은 피체되어 본국으로 압송 송환되는 사례가 늘어갔다. 예컨대 의정원 부의장 정인과 독립신문사 사장 이광수 군무부 차장 김의선 등이 연이어 일제에 투항 변절하는 판이었다. 더욱이 1930년을 전후해서는 일제는 대륙침략을 가속화시켜 만보산 사건 등 한·중간에 이간책을 쓰면서 관동군을 동원하여 9·28만주사변을 일으켜 남·북 만주를 강점하고 1932년에는 만주국을 세워 그들의 위성국으로 만들었다.
이로써 독립운동의 중요 해외기지가 무너져 적의 수중에 들어간 것이다. 이와 같은 난국에 직면하자 백범은 다음과 같은 활동을 통하여 난국에 대처하고 임시정부의 새 활로를 찾았다. 첫째는 [편지정책]을 통하여 미주 한인사회의 임시정부에 대한 지지를 획득하고 활동자금을 지원 받았다. 뿐만 아니라, 미중 한인사회가 연대하여 항일독립운동을 추진하게 한 것이다.

백범은 이를 위하여 이미 임시정부에서 퇴임 당한 이승만에게 “호형(呼兄)”하면서 그 임시정부의 구미위원부 위원장에 재임명하여 구미외교를 강화시켜 갔다. 또한 미주와 하와이 한인 사회의 유지들인 김경 안창호 현순 김상호 이홍기 임성우 김평 홍언 송종익 등은 물론 멕시코, 쿠바의 김기창 이종오 인천택 박창운 등에게도 임시정부의 어려운 형편과 조국 광복의 경륜을 홍보하여 그들에게 임시정부 지지와 독립운동 자금의 출연을 유도함으로써 적지 않은 송금이 정기 혹은 부정기적으로 답지하게 되었다. 둘째는 백범이 임시정부 재무장의 자격으로 임시정부의 예산의 절반 가량을 투자한 과감한 특무공작을 펴 세기적인 거사인 이봉창과 윤봉길 등의 의거를 결행하게 하였다. 백범은 1931년초 국무회의의 의결을 거쳐 임시정부의 운명을 가늠하는 특수공작의 전권을 위임받고 극비로 열혈 구국청년을 모아 한인 애국단을 결성하였다. 그리고 치밀한 준비를 갖추어 1931년 1월에 일왕 폭사 응징을 위한 이봉창의 동경의거와 그 해 4월에 윤봉길의 홍구공원 의거를 차례로 거사함으로써 한중 양국 인민의 열렬한 환호를 받았다.

그 후 이 거사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하는 한국독립운동의 새 국면을 여는 계기가 되었다. 백범은 홍구공원 의거와 관련하여 1933년 5월 남경에서 장개석을 만나 한·중 항일의 유대를 강화하고 낙양중앙군관학교에 한인군관반을 두어 장래 독립운동을 지휘할 한인 청년 군관 양성을 시작하였다. 만주 독립군의 영장들인 지청천 이범석 오광선 김창환 등을 교관으로 보내어 산해관을 넘어온 독립군 전사와 관내 북경 천진 상해 남경 등지에서 증모한 청년 100여명이 제1차로 입교하여 훈련을 받았다.

-다음주 민족의 지도자 백범 김구선생님 4연속-


<자비원 지안 스님  213-268-29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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