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주에 이은 연속 7주>
1946년까지는 임시 정부 주석으로 대동 단결을 위하여 정력을 쏟았으나 1947년부터는 백범 자신의 조직과 인력이 필요했다. 1947년은 5월 21일부터 7월 10일까지 열린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 참가 여부의 문제로 정국이 크게 변화하였다.
우파에서 김규식과 한민당이 모스크바 삼상회의 결정을 수용하면서 좌파와 함께 참가 방침을 세웠고, 한독당에 합류해 있던 안재홍도 탈당하여 6월 21일 신한국민당을 결성하고 그에 합류하여 남한의 425개 정당 사회단체(북한 38개)가 조선 임시정부 수립을 위한 공동위원회에 참석하니 백범의 임시 정부와 반탁 운동은 궁지에 몰린 듯했다. 그럴 때 반탁을 고집하던 이승만이 남한 단독 정부 수립을 노골적으로 추진하여 8월 26일에는 총선거대책위원회 위원장 신익희 까지 구성함에 이르러 백범의 반탁 통일 정부수립 계획은 최대 시련을 맞게 되었다.
미국은 이승만의 단정안을 지원하였다. 이승만의 주장을 받아들여 한국 문제를 유엔에 상정시켜 11월 14일 한국 총선거안을 가결하였고 유엔 한국임시위윈단을 설치하였다. 백범은 총선거안에 반대할 이유는 없었지만 단독 정부로 몰고 갈 것을 막기 위해 12월 22일 남한 단독 정부 수립을 반대하는 성명을 발표하고 이후 통일 정부 수립을 위하여 혼신의 힘을 경주하였다. 1946년 후반부터 전국에서 폭력과 폭동이 난무하더니 1947년 7월 19일에는 근로 인민당의 여운형이, 12월 2일에는 한국 민주당의 장덕수가 암살 당한 비극이 연출되어 이러한 비극은 통일 정부 수립으로서만 극복될 수 있다고 백범은 전망하였다. 아니면 민족의 대 참극이 일어날 것이라고 전망한 백범이었다. 대 참극이란 말할 것도 없이 6.25와 같은 것을 말한다. 그래서 12윌 20일 결성한 민족자주연맹이 제기한 남북 지도자 회담에 동의하여 남북 협상의 길을 열어간 것이다.
1948년은 연초부터 단독 정부 수립안이 기세를 올렸다. 1월 8일에 입국한 유엔 한국위원단의 입북을 소련 측이 거절하자 미군정과 이승만과 한민당이 합작하여 단정 수립을 추진하였다. 이에 대하여 백범은 김규식과 합작하여 단정 반대 운동에 발벗고 나섰다. 1월 27일 : 김구 김규식. 유엔한국위원단 면담에서 단독선거 반대 / 2월 03일 : 이승만, 단독선거 촉구 성명(이승만. 단독선거를 위한 다양한 교섭에 2월 26일 유엔한국위원단 메논 위원장의 보고를 심의한 유엔소총회가 단선을 결의했고, 3월 1일 하지 사령관이 단선 실시를 발표) / 2월 04일 : 김구 김규식, 남북협상에 합의 2월 10일 : 김구, ‘삼천만 동포에 읍고함’ 의 단독 정부 수립 반대 성명 / 2월 16일 : 김구 김규식, 북측의 김일성 김두봉에게 남북 협상 제의 / 2월 27일 : 김규식을 비롯한 단선 반대자 20여명 입법 의원 탈퇴 3월 12일 : 김구 김규식 김창숙 조소앙 조성환 조완구 홍명희, 단선 불참 공동성명 / 3월 25일 : 북한, 남북 회담안 수락 발표 / 3월 31일 : 김구 김규식, 남북 왕복 문서 공개 / 4월 03일 :유림이 주도한 통일 독립 운동자 협의회 결성, 남북협상지원 / 4월 18일 : 문인 108명, 남북 협상 지지 성명 / 4월 19일 : 김구, 평양 남북 대표자 회의 참석차 출발 (김규식 21일 출발) / 5월 05일 : 김구 김규식, 서울 귀환. 북한측에서 6월 2차 회담을 해주에서 열자고 제의해 왔으나 이번에는 “북측에서 홍명희를 대표로 보내라”고 회신하고 응하지 않았다. 결국 그 해 8월 15일과 9월 9일에 남북에서 각각 단정이 수립되어 백범의 통일 노력은 봉쇄되고 말았다. 그리하여 백범은 남북 정부 모두의 냉대를 받았고 이승만 정권으로부터 건국실천원양성소 활동까지 탄압을 받다가 1949년 6월 26일 12시 45분, 안두희의 흉탄에 맞아 운명하였다. 하늘이 무너지는 민족의 비극이 아니던가. 백범이 마지막 맞던 새해, 1949년 1월 1일 신년사에서 “유일한 최고의 염원은 조국의 자주적 민주적 통일뿐이다. 소련식의 민주주의가 아무리 좋다고 해도 공산 독재정권을 세우는 것은 싫다.
미국식 민주주의가 아무리 좋다해도 독점 자본주의로 무산자를 괴롭힐 뿐 아니라 낙후한 국가를 자기 상품 시장화하는데는 찬성할 수 없다”라고 했다. 이는 민족의 영원한 교훈으로 기억될 것이다. 민족의 지도자 큰 별 백범 김구선생이 가신지 올해로 56주기다. 백범 김구선생은 참으로 큰사람이다. 그 크신 특징은 무엇일까? 인물로서의 백범의 가장 큰 특징을 들라고 한다면, 가장 먼저 들어야 할 것은 그의 지고지순한 애국성과 애국심이라고 할 것이다. 그는 청년으로 민족 의식이 정립된 이후 모든 것을 다 희생해 가면서 전 생애를 일제의 침략 하에 신음하는 조국과 민족을 구하고 나라와 겨레의 크기만큼 영구히 그를 역사에 기릴 큰사람으로 만든 것이라고 생각한다. 백범의 나라 사랑과 겨레 사랑은 일제의 고문으로 의식이 거의 희미해진 죽음 한 걸음 앞에서도 강철같은 힘으로 솟아오르고 있다. 육신의 아파서 괴로워하는 것이 아니라 나라를 더 사랑하지 못한 것에 대해 괴로워하고 반성하신 지도자다.
<다음주 민족의 지도자 백범 김구선생님 8 연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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