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走近朝鮮 : 조선에 접근하다]
10월 상순, 나는 여행객의 일원으로 우리의 이웃인 그 익숙하고 낯선 비밀국가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의 땅을 밟았다. 그것은 내가 프리랜서 사진작가가 된 이래 경험한 가장 독특한 촬영 경험이었다. 카메라 앞에서 북한사람들은 본능적으로 두려워하고, 경계하고, 배제하는 눈치다. 그들은 여행객들의 촬영에 아주 이상한 규정이 있었다. 더욱이 당국에서 주민에 이르기까지 렌즈에 대한 반응은 내 마음에서 떠나지 않는 두려움과 강박감을 주었다. (중략) 이전에 듣자니 북한은 마음대로 사진을 못 찍게 한다고 했다. 더욱이 ‘신축성 렌즈사진기’(고성능 줌 기능이 있는 사진기 – 편집자 주)는 휴대하고 입국하지 못하게 한다고 했다. 그래서 나는 특별히 여행사에 물어봤다. 대답은 현재는 어떤 사진기라도 다 가지고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도 다시 망설이다가 ‘XGP’를 가지고 가려던 생각을 포기하고, 렌즈를 조절할 수 있는 ‘24-85’ 사진기를 가지고 갔다. 만일에 대비해 ‘里光GX8’ 한 대를 준비해 몰래 찍기로 결심했다. 결과적으로 나의 결심이 아주 현명했다는 것이 증명됐다.
[북한은 ‘유리병’]
방문 4일 동안, 나는 혼신의 재주를 다 부려 GX8의 기능을 최대한 이용하여, 절반은 오작동했고, 다른 절반중의 절반은 불안에 떨며 몰래 찍었고, 나머지만 허락을 받고 찍었다. 카메라의 각도로 봐서 대부분의 사진들은 모두 쓸모가 없었다. 하지만 열심히 정리해보았다. 나는 여러분들이 내 사진을 기록으로만 보기 바라며, 나도 될수록 객관적인 시각으로 본 북한을 반영하고자 한다. 동시에 어떻게 제목을 달 것인가도 오랫동안 궁리했다. 여행을 가기 전에 결심했던 ‘조선에 들어가다’는 이 사진과 적합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나는 북한에 있는 동안 격리되어 주민들의 생활을 보지 못했다. 느낌에는 내가 하나의 유리병에 갇히어 조선을 한 바퀴 돌았다는 느낌이고, 아예 가보지 못했다고 해야 옳을 것이다. 생각다 못해 ‘조선에 접근해보다’는 제목이 더 적당할 것 같아 보인다
. 아침 8시, 차에 오르기 전에 물론 필요한 수속을 했고, 세관 통과도 순리대로 됐다. 대략 9시쯤 우리는 열차에 올라 ‘웅규규기앙앙과과압록강 ; 위풍당당하게 압록강을 넘어가자는 뜻으로 한국전쟁 당시 중공군이 압록강을 건너며 불렀던 노래 – 편집자 주) 했다. 단둥 역전승강대에서 나는 몇 개의 화환을 보았다. 자세히 보니 여행사 측에서 조선노동당 총비서 김정일 장군님에게 드리는 꽃바구니인데, “위대한 영수 김정일 장군님의 만수무강을 축원합니다”, “위대한 영도자 김정일 장군님께 드립니다”라고 씌여 있었다. 가이드에게 물어서야 10월 10일이 조선노동당창건 60돌이 되는 날이며 이런 꽃바구니를 선물로 가져 간다는 것이다. 가이드는 “우린 아주 행운이다. 큰 명절이 끼어있어 평양은 볼거리가 많을 것”이라고 말했다. 기차가 막 다리를 건너서자 기차 끝에서 두 명의 북한 변방군인이 뛰어 올랐다. 우리를 놀란 이유는 어떻게 달리고 있는 기차에 뛰어오를 수 있는가 하는 것이었다. 철도 유격대인가? 북한 변방군인의 얼굴은 보기가 안 좋았고, 눈은 좀 충혈되어 어디가 좋은지 말하기가 어려웠다.
[이상한 검사]
기차가 신의주 역에 멈췄었을 때 변방과 세관에서 검열을 시작했다. 매일 중국인들을 검사하는 사람들이라 중국어를 어느 정도 할 텐데, 한마디밖에 모르는 것 같았다. 일반적으로 중국인에게는 호의, 서양인은 주머니까지 뒤집어 검사과정은 좀 우습고 비참했다. 처음 여성 세관원 한 명이 여자 여행객들의 손짐을 일일이 검사하고, 모든 짐을 열어 빠짐없이 물건을 만져보고, 이상한 물건들은 꺼내 보았다. 생김새가 비교적 이상한 립스틱을 보고는 한참 동안 살펴보다가 입에 바르는 동작을 해서야 알아 보고 자기도 웃으며 돌아갔다. 여성 세관원은 남자들의 짐은 검사하지 않았다. 조금 있으니 남자 세관원이 나타나 ‘醬菜!(절인 채소)’라고 호령했다. 아마 ‘검사!’라는 소리를 “짱차이”로 잘못 말한 것 같았다. (‘검사’를 중국어로 하면 ‘찌엔차’인데, 잘못 발음해 ‘짱차이’라고 하여 ‘절인 채소’라는 뜻으로 들렸다 – 편집자 주) 남자들이 급히 짐을 풀자 다 보지 않았다. 그제서야 우리는 검사할 때 성별을 갈라 검사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차 안에는 영국, 러시아, 독일, 프랑스 등 유럽인들도 있었다. 이 사람들은 아주 참혹하게 검사 당했다. 바지 뒤에 있는 주머니까지 다 뒤져 보여야 했다. 그 상황은 우리가 영화에서 본 것 중 적들이 하는 검사보다 못하지 않았다. 서방식으로 보면 엄중한 인권침해 검사방법이다. 서양사람들도 이런 행위에 심중하겠지만, 한 사람도 불평하는 사람이 없었다. 우리보다 더 성실하게 임했고, 서양인들이 공산당을 더 무서워하는 것 같았다. 한마디 더 한다면 북한에 갈 때 핸드폰과 망원경을 휴대하지 못하게 되어있다. 중국전신통신망이 이미 신의주에 설치되었는데도 말이다. 검사를 마친 다음 우리는 신의주에서 평양으로 가는 열차에 갈아타게 되었다. 신의주 역전은 겉보기에도 이미 중국과 다른 분위기가 시작되었다. 사람들의 표정은 엄숙했고, 가로지른 구호에는 “위대한 김정일 장군 만세”라고 씌어져 있었다. [외국인 칸, “6열차”]
이 전용열차는 북한 열차다. 시설은 좋았지만, 좌석손잡이와 의자 등받이에 기름때가 반질반질 했다. 좌석의자에는 응당 커버가 있어야 하는데 없다. 우리측 가이드의 말에 의하면 북한 열차, 버스에는 모두 없다고 한다. 결국 천이 없어 그러는 것 같았다. 정상 출발시간은 북경시간 오전 10시반 인데 어찌 된 일인지 10시 10분에 발차했다. 가이드는 아주 놀라 우리에게 이렇게 말했다. 이건 아주 비정상이다. 정상적인 상황은 열차가 연착되는 것인데, 제시간에 출발하는 것이 오히려 비정상이라는 것이다. 하물며 ‘미리’ 출발하기까지 하다니……. 가는 길에 보니 벌판의 벼들은 수확을 기다리고 있었다. 듣자니 이번에 대풍작을 이뤘다고 한다. 그래서 주민들이 매월 제정된 배급을 제때에 받는다고 한다. 그러나 북한의 벼 생산은 아주 적다. 듣자니 매 무(10×10m)에서 삼백 근의 쌀을 걷어들인다고 한다. 나는 열차 칸의 차창에 앉아 양손으로 팔짱을 끼고 오른손으로 GX8을 잡고 내의로 등뒤를 가렸다. 그리고 양쪽 팔 소매를 앞으로 떨어뜨려 사진기 앞을 가렸다. 다만 작은 렌즈만을 남겨두었다. 창문을 재빨리 누르고 한편으로 몰래 찍었다. 한편 복도에 서있던 친구들은 망을 봐주었다. 이 집들은 북한농민들의 주택이다. 국가의 통일적인 구획에 따라 하나의 설계로 건설해 농민들에게 무상으로 분배한다. 북한 주택정책은 전민이 무상으로 공급받는 제도다. 배분되는 표준은 인구수에 따라, 직급의 높낮이와 국가에 얼마나 공헌하는가에 따라 80평방미터, 120~150평방미터(중국기준)로 달라진다. 한가지 특기할 것은, 북한의 주택계획이 마치 원칙이 있는 것 같지만 땅을 차지할 수 없으며, 산이나 작은 언덕이라 할지라도 주택은 반드시 기슭에 지어야 한다. 이 원칙은 중국보다 더 강하다. 작년 용천역에서 폭발사고가 발생해 76명의 어린이를 포함하여 161명이 죽었고, 1300명이 부상당했다. 김정일이 중국을 방문하고 돌아간 지 9시간만에 폭발사고가 있었는데, 북한주민들은 “미국이 끝내 전쟁을 일으켰구나”하고 생각했다고 한다. 지금까지 들어보지 못한 폭음과 연기를 미국이 원자탄을 투하한 것으로 알았던 것이다. 북한당국은 이틀 동안 이 소식을 묻어두었다가 “두 개의 천연가스통과 암모니아 가스통이 서로 충돌하면서 폭발이 일어났다”고 보도했다. 중국은 인민폐 1000만원 어치의 구호물자를 무상으로 제공해주었다. 이 주택은 용천폭발사건 이후 새로 건설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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