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옥 대령의 타계와 관련해 그의 일대기가 출간되어 화제를 모으고 있다. 그의 일대기를 펴낸 재미저널리스트 한우성(49·뉴아메리카 미디어 한국부장)은 최근 오마이뉴스와의 인터뷰에서 “독자들은 이 책을 통해 소설에서나 있을 것 같은 용감하고 비상하며 인간미 넘치는 한 한국인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그는 암울한 시대에 태어나 세계를 무대로 기상을 떨치고, 사회적 약자를 위해 평생을 바친, 실존하는 자랑스러운 한국인입니다.”라고 소개하고 있다. 그리고 오마이뉴스는 인터뷰 기사를 통해 김 대령의 면모를 소개했다. 미국이나 유럽에서 김영옥은 말 그대로 ‘영웅’이다. 김영옥은 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43년 9월, 충성심이 의심되는 적대국가 일본계 2세들로 편성된 이른바 ‘100대대’를 이끌고 이탈리아 상륙작전에 참가, 예상을 깨고 연전연승을 거듭하며 로마 해방의 주역이 된다. 김영옥은 피사도 해방시켰다. 제갈공명을 무색케 하는 기상천외한 작전으로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피사를 해방시킨 후 연합군 최초로 피사의 사탑 꼭대기에 올라간 군인이었다. 당시 그의 전과를 증명하는 일화 한 토막. 김영옥이 로마 점령에 큰 공을 세우자 별이 세 개나 되는 사령관이 그에게 왜 계급이 중위냐고 물었다. 다섯 번이나 진급 신청을 했지만 번번이 거절당했다는 김영옥의 대답을 들은 사령관은 버럭 화를 내면서 옆에 있던 부관의 대위 계급장을 떼어 그에게 달아주면서 즉석에서 대위로 진급시켰다. 이후 그는 또 독일 치하에 있던 프랑스 브뤼에르 지방을 해방시키는 등 천재 군인으로서의 능력을 유감없이 발휘하며 전장에서 전설적인 인물로 통했고, 오늘날 미국의 군사 교본을 다시 쓰게 만드는 장본인이 된다. 그의 진가는 예편했다가 한국에서 전쟁이 일어나자 다시 자원입대하여 대대장으로 한국전쟁에 참전하면서 세운 혁혁한 전공에서도 그대로 나타난다. 특히 그는 38선 이남에 형성돼 있던 전선이 60Km나 북상하는 데는 그가 이룬 불패신화에 힘입은 바 크고, 이 사실은 우리 국방부도 인정하는 공식 전사다.
인생의 반은 사회봉사
이쯤 되면 그는 ‘전쟁영웅’이기에 충분하다. 그러나 저자 한우성은 김영옥의 삶을 ‘전쟁영웅’으로만 보아서는 안 된다고 강조한다. “사실 김영옥에 대한 취재를 시작했을 때만 해도 저 역시 그를 2차 대전 전쟁영웅으로만 알았습니다. 그가 한국전쟁에 참가해 그런 전공을 세운 인물인지 몰랐었죠. 그러나 그는 삶의 절반을 사회봉사활동으로 채운 ‘봉사 영웅’이었습니다. 한국전쟁 당시 이미 수백 명의 전쟁고아를 돌본 휴머니스트였던 김영옥은 1972년 장군이 되지 못하고 대령으로 예편했다. 그가 장군이 되지 못한 것에 대해 한편에서는 한국전쟁에서 입은 부상이 너무 심했고, 그로 인한 심한 후유증이라고도 했고, 또 한편에서는 아시아계, 다시 말해 유색인이란 점이 중요한 장애물이었을 것이라고 한다. ‘만일 내가 이 전쟁에서 살아남는다면 내가 속한 사회를 보다 나은 곳으로 만드는 일에 평생을 바칠 것이다.’라고 한 말처럼 군복을 벗기 오래 전부터 일단 군을 떠나면 지난날의 영광을 되돌아보지 않겠다고 생각했던 김영옥은 여성·아동·청소년·노인·장애인·빈민·소수자 등 사회적 약자의 편에서 이들의 권익을 지키고 신장시키는데 많은 힘을 쏟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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