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부신 ‘흑진주’, 북한의 도발 제압

이 뉴스를 공유하기





1966년 영국 월드컵대회에서 북한축구는 전세계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강호 이태리를 깨고8강에 올랐기 때문이다. 당시 아시아 국가팀으로 월드컵 8강에 오른 나라는 북한이 유일했다. 북한의 박두익은 조별 마지막 경기에서 이탈리아를 상대로 골을 기록, 1-0 승리를 이끌어 팀을 8강까지 올렸다. 이탈리아는 고국으로 돌아가 팬들로부터 썩은 토마토 세례를 받아야 했다. 그런 북한이 구디슨 파크 경기장에서 포르투갈과 맞붙게 됐다. 51,000명의 관중이 몰려들었다. 포르투갈에는 벤피카의 단짝인 에우제비오, 호세 토레스와 같이 익숙한 이름들이 있었으나, 대조적으로 혜성처럼 나타난 북한 선수들의 이름은 하나같이 낯설었으며 서양 사람들의 귀로는 구별하기도 어려웠다. 이들은 다른 세계와는 완전히 격리된, 비밀에 싸인 곳에서 온 선수들이었다.


-편집자



















 


포르투갈은 투지로 뭉친 똘똘 북한 선수들이 아주리 군단을 상대로 승리를 거둔 만큼 조심해야 할 상대라는 것을 인식해야 했다. 하지만 포르투갈 선수들이 채 몸을 풀기도 전에 북한은 토너먼트에 이변을 일으킨 주역답게 깜짝 놀랄만한 공격을 시작했다. 강력한 압박을 가하면서 날린 슛은 굴절되면서 오른쪽으로 흘렀다. 하지만 페널티 박스를 재빠르게 가로지르던 박승진이 이 공을 잡아 오른쪽 발로 힘껏 차 넣었다. 놀랍게도, 그리고 필연적으로 공은 빠른 속도로 호세 페레이라를 지나 날아 올라 크로스 바 아래쪽을 맞고 골대 안으로 떨어졌다.
경기 시작 겨우 1분, 북한의 원대한 꿈이 현실로 다가왔다. 선취 골로 한 점 앞서게 된 흰색 유니폼의 북한은 득점한 선수를 축하하고 큰 소리로 환호하며 센터 서클로 돌아왔다. 아직 갈 길은 멀었고 경기가 열린 머지사이드 관중들의 정중하고 조용한 환호 역시 이를 나타내는 듯 했다. 조별 경기에서 북한의 단호하고 공격적인 스타일에 반한 미들즈브러의 열광적인 팬 3,000여명이 8강전에서도 이들을 응원하기 위해 리버풀로 왔다. 많이 뛰는 구식 축구를 구사하는 기민한 북한 선수들의 잠재력을 아는 이들은 어느 관중들보다 큰 소리로 이들을 응원했다.
하지만 포르투갈 선수들은 FIFA 월드컵에 처음 출전했음에도 동요하지 않는 것 같았다. 유럽축구선수권대회에서 두 번 우승한 벤피카 소속의 선수들이 포진하고 있는 포르투갈 팀은 강력한 우승 후보였다. 강팀 벤피카 클럽은 3년 연속으로 포르투갈 클럽 리그에서 우승했으며 1966년 이전까지 다섯 번의 유럽축구선수권대회에서 네 차례 결승에 오른 바 있다.


포르투갈의 병기














안토니오 시모에스가 화려한 기량으로 왼쪽 측면을 돌파, 공격을 개시했다. 그는 언제나처럼 장대같이 솟아 오른, 호리호리하고 촌스러운 모습의 센터 포워드 토레스를 찾았다. 토레스의 공중볼을 다루는 능력은 대부분의 팀에게 위협적이었지만 신장이 열세인 작은 북한 선수들에게는 특히 그랬다. 토레스의 제공권을 활용한 공격 외의 모든 공격은 ‘흑진주’ 에우제비오를 통해 이루어졌다. 1965년 유럽 올해의 축구 선수인 에우제비오는 기묘하다 못해 서툴러 보이는 발기술과 항상 화난 듯한 모습, 흐느적거리는 움직임으로 눈길을 끌었다. 관중석의 앞줄에 앉은 어린이들은 에우제비오가 터치 라인 가까이 올 때마다 즐거워하며 소곤거렸다. 하지만 경기 초반 그는 북한 선수들에게 둘러싸여 제대로 경기를 펼치지 못했다.
포르투갈이 만들어 낸 몇 번의 기회는 작지만 스프링처럼 탄력적인 북한 골키퍼 이찬명에 의해 수포로 돌아갔다. 머리에서 발끝까지 위협적인 검은 색 유니폼을 입은 이찬명은 굳건한 수문장이었다.
경기 시작 22분, 곤경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던 에우제비오가 문전에서 초라한 발리슛을 날렸지만 이는 북한에 맹렬한 역습의 빌미를 제공했다. 페레이라는 오른쪽에서 올라온 크로스를 놓쳤으며 본선에서 등장한 혜성 가운데 한 명인 양성국이 왼쪽 골 포스트 앞에서 이를 받아 골대의 정면을 가로지르는 낮고 위력적인 크로스로 연결했다. 골키퍼가 서둘러 몸을 날렸지만 이동운이 돌진하며 하프 발리 킥으로 반쯤 열린 골대 안에 공을 차 넣었다. 주장은 쑥스러워하면서 동료들의 열광적인 포옹을 받았고 골 세레모니 후 북한 선수들에게는 자신감이 넘쳤다.
경기가 속개되고 에우제비오는 상황을 반전시키기 위해 화난 듯 프리킥을 찼지만 이 공은 골 포스트를 지나쳤다. 쉴새 없이 움직이는 북한 선수들은 자신감에 차 경기장을 누비며 모든 기회를 활용했다. 양성국은 역시 위협적인 선수였다. 왼쪽 측면을 돌파한 양성국이 이탈리아를 침몰시킨 주인공 박두익을 향해 안쪽으로 살짝 패스하자 이를 받은 박두익이 골대를 향해 슛을 날렸다. 행운은 용기 있는 자의 편이라는 말처럼 박두익의 빗나간 슛은 계속 달려 들어온 양성국의 발끝에 떨어졌다. 몇 번의 빠른 볼 터치 이후 양성국은 이윽고 반대편 골 포스트 방향으로 공을 밀어 넣었다. 관중들은 마침내 영국식의 점잖은 태도를 벗어 던지고 먼 동쪽 아시아에서 온 작고 용맹한 선수들에게 너나 할 것 없이 우뢰와 같은 갈채를 보냈다.
25분 만에 포르투갈은 3-0으로 뒤쳐지게 됐고 세 번째 골을 허용한 페레이라는 망연자실해 손으로 머리를 감싸고 있었다. 포르투갈 선수들은 경기의 재개를 준비하며 서로를 비난하듯 쳐다봤다. 포르투갈은 이탈리아보다 더 가혹한 운명을 맞이하게 될까? 북한 선수들은 득점한 측면 공격수 양성국을 둘러싸고 키스와 축하 세례를 퍼부었다.


포르투갈의 부활














 

경기가 다시 시작되자 마침내 에우제비오가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높이 뜬 볼이 천천히 경기장을 가로질러 안토니오 시모에스의 발 앞으로 떨어졌다. 그는 공을 잡아 챈 다음 수비수를 지나 그림자처럼 침투하는 에우제비오를 발견하고 빈 공간으로 멋진 스루 패스를 찔러 넣었다. 모잠비크 태생의 포워드 에우제비오는 페널티 박스 안으로 돌진, 골키퍼를 따돌리고 골대 위쪽으로 강력한 슛을 차 넣었다. 관중은 환호했다. 강팀으로 꼽힌 포르투갈을 향해 마침내 갈채를 보낼 수 있게 된 것이다.
전반전이 끝나 갈 무렵 북한 선수들에게 피로와 함께 현실이 들이닥쳤다. 토레스가 완벽한 골 찬스를 만들자 페널티 박스 안의 북한 수비수는 실점을 막기 위해 뒤에서 거친 태클로 그를 저지했다. 에우제비오가 페널티 킥을 찰 준비를 했다. 그는 위쪽 구석으로 공을 차 넣었다.
후반전으로 접어들어서도 에우제비오는 경기를 완전히 지배했다. 포르투갈 진영 깊숙한 지점에서 골을 알리는 심판의 깃발이 올라갔고 에우제비오는 다시 공을 주어서 미드필드 근처로 가지고 나왔고, 곧 만족할 줄 모르는 골 사냥에 나섰다. 전담 수비수는 성큼성큼 뛰는 그를 따라잡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시모에스가 다시 빈틈으로 정교한 스루 패스를 찔러 넣었다. 수비수를 교묘하게 따돌린 에우제비오는 반대쪽 골대를 향해 대포알 같은 강슛을 때렸다.
해트 트릭의 영웅 에우제비오가 페널티 박스 안으로 돌진하다 반칙을 당해 나뒹굴자 북한 선수들은 좌절감과 수치심에 빠졌다. 두 개의 명백한 반칙을 당한 에우제비오가 고통스럽게 쓰러져 있는 상태에서 주심은 다시 페널티 킥을 선언할 수 밖에 없었다. ‘흑진주’는 진정한 투사의 정신에 힘을 얻어 다시 일어섰으며 절룩거리면서 킥 위치로 걸어가 불운한 이찬명을 피해 또 한 골을 추가했다. 관중들은 기립 박수를 보냈다. 포르투갈은 5 대 3으로 북한을 제압했다.
경기 종료 휘슬이 울리자 리버풀 관중들은 모잠비크 출신의 축구 영웅과 용맹한 북한 선수들 모두에게 길고 우렁찬 갈채를 보냈다. 마지막 장면에서는 영국 소년이 신문을 흔들면서 에우제비오를 쫓아다니며 사인을 해달라고 졸랐다. 영웅 에우제비오는 먼저 주심 및 두 명의 부심과 악수를 나눈 다음에 물론 소년의 부탁을 들어줬다. 용맹한 북한 선수들은 어깨가 축 처진 채 경기장을 빠져 나갔지만 이들의 위업은 FIFA 월드컵의 한 일화로 오랜 시간 동안 기억되고 있다.




@SundayJournalUSA (www.sundayjournalusa.com),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뉴스를 공유하기

선데이-핫이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