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아 잊으랴! 어찌 그날을! 1992년4월2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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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4월 29일은 미주한인 이민역사상 최악의 수난을 당한 ‘4.29LA폭동’ 14주년이 된다. 웨스턴 애비뉴와 6가의 한인 상가는 지금 잘 단장되어 있지만 14년전 그날 시뻘건 불기둥이 올라가면서 불타버렸다. 지금 코리아타운의 6가 거리는 한인 젊은이들로 생동감이 넘치고 있다. 그러나 이들 젊은이들 중 많은 사람들이 ‘4.29’의 진실을 모르고 있다. 4.29의 피해를 당했던 한인들도 그 때의 일을 말하기 싫어하고, 기억하려고도 하지 않는 사람들이 많다. 4.29는 결코 잊어서는 안되는 날이다. 왜 4.29에서 한인들이 최대수난을 당해야 했는지 그 진상을 파해칠 과제가 우리 한인 커뮤니티가 해야할 일이다. 진상을 규명하고 한인들이 명예를 회복해야만 한다. 그리고 마땅히 피해보상이 따라야 한다. 4.29폭동 14주년을 맞아 원로 언론인 이경원 선생의 글(2003년 작성)을 게재한다.


-편집자


















1980년의 일이다. 필자가 당시 미국의 여러 도시에서 형성되고있던 한인 커뮤니티를 대상으로 로스엔젤리스에서 전국판 영자 주간지 ‘코리아타운 위클리 (Koreatown Weekly)’을 창간하고 1년 동안 자동차로 2만5천마일을 달리며 취재여행을 다녀온 해였다.
필자는 미 대륙 곳곳의 한인 거주지를 찾아다니며 영어는 잘 못하지만 부글부글 끓는, 위험한 대도시 한복판에서 자리잡고 생활하던 배짱 좋은 한인 이민자 수백 명과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
필자는 그때 놀랄만한 현상을 목격했다. 그것은 우리 한인들은 어려울수록 불평하지 않고, 묵묵히 뻗어 나가는 끈기있는 민족이라는 사실이었다. 활기차고 대담하고 실패와 좌절 속에서도 굴하지 않는 것이 한인들의 모습이었다. 더욱 대단한 것은 수많은 이민 1세들이 미국에서 교육을 받고 의사, 교수, 엔지니어, 과학자, 변호사, 회계사, 기업인, 공무원으로 살아가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이들의 눈부신 개인적 성공사례에 고무된 것만큼이나 필자를 악령처럼 괴롭힌 우울한 사실이 있었다. 분열되고 힘없는 코리아타운, 그 코리아타운의 엘리트 그룹인 이들에게 커뮤니티 봉사와 참여 정신이 없었다는 점이었다. 놀랍고도 아찔한 사실이었다.
필자는 ‘코리아타운 위크’ 1980년 9월 8일자 호에 다음과 같이 썼다.


“(생존을 위해) 발버둥치며 비틀거리는 한인이민사회를 위해 가장 많은 일을 할 수 있는 위치에 있는 이들에게 ‘노블리스 오블리제 (noblesse oblige)’ 정신은 이질적인 것처럼 보인다.


“미국에서 성공한 이들에게는 공통점이 있다. 거의 풍자만화 수준에 가까운, 거창한 학위, 직함, 직위와 물질적인 부이다.


“우리의 사회적 지평은 황폐하고 커뮤니티 발전의식과 협력을 위한 노력은 전무하다. 절대다수가 이민자로 구성된 우리 이민사회에서 역사는 미국에서 교육받은 이민 1세 엘리트들을 비껴 간 것 같다.


“이제는 미국에서 교육받은, 이민자들의 자녀들이 그 공백을 메워야한다.”


그 이후의 일은 역사로 남았다.












12년 후 LA의 도심은 미국역사상 가장 큰 도시폭동(4.29)의 소용돌이에 파묻혔다. 사우스 센트럴과 코리아타운은 불타고 질식하고 통곡했다. 2천3백개의 한인 비즈니스와 수만 명 이민자들의 생활이 파괴되었다. 재산피해만도 LA시 전체 피해액수인 십억불의 절반에 달했다.
오늘날 코리아타운은 여전히 제 목소리도 내지 못하고 무기력한 모습으로 남아있다. ‘우물안 개구리’라는 속담 마냥 여전히 분열되고 고립되어 있다. 다음에 일어날 화재에 대처할 준비가 전혀 되어있지 않고, 대화와 합의와 방향성을 잃고 있다.
그런데도 지도자라는 사람들은 4.29의 비극은 아예 없었다는 듯 행동하고 있다. 사실 놀랄 일도 아니다. 아이비리그 대학생을 포함한 우리의 자녀들 중, 100년 한인 이민역사에서 가장 어두웠던 시간이라고 할 수 있는 4.29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아는 이는 거의 없다.
‘네오 만달리즘’ 틀에 매인 우리의 미국산 엘리트들은 한인 이민 100주년의 해에도 자신들의 개인적 성취를 축하하고 있다. 하지만 이런 그들은 다음과 같은 상항에 대해 모른다.


-수십 년 동안 사우스 센트럴LA를 유린하고 핍박한 구조적, 인종적 차별에 대한 희생양으로 왜 100여 민족 중에서 유독 한인들이(4.29폭동에서) 공격을 받았는지,


-뉴욕과 LA의 노동조합들이 파업과 불매운동의 대상으로 여러 인종 중에 왜 한인들이 운영하는 가게들을 가장 선호했는지,


-미국의 수도 워싱턴의 저소득층 거주지역에서 왜 한인상인들과 다른 아시아계 상인들 및 흑인, 라티노 주민들과의 마찰이 더 심화되고 있었는지,


-이 이민자의 나라에서 가장 많이 곡해되고 공격당하고 오해받는 민족 중의 하나인 한인들이 왜 자신들을 보호할 전국규모의 민권단체나 반 비방(anti-defamation) 단체를 만들지 못하고 있었는지.


-우수한 학력을 지닌 소수민족들 중 하나인 한인들이, 왜 외부인들, 특히 흑인과 라티노 이웃들로부터 ‘심술궂고 탐욕스럽고 인종차별적인 코리언’이라는 고정관념을 받게되었는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정당한 모습을 대변할 수  있는 영자 주간지나 일간지가 하나도 없는 것인지,


-영어를 말하는 한인2세들이 영어를 모르는 부모세대를 위해 영어로 대변인 역할을 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왜 코리아타운의 1세와 2세들은 야간에 신호 교환도 없이 지나쳐버리는 두 척의 선박처럼 서로 진정한 교류가 없는지,





이경원 원로기자는 누구인가


“아시안 아메리칸 저널리즘의 학장”이라 불리는 이경원 선생(77)은 45년간 미 주류사회에서 신문기자로 활약한 격동의 미 현대사와 한인사회 변천사의 산 증인이다.












1950년에 도미하여 웨스트 버지니아 대학과 일리노이 주립대에서 저널리즘 학사 및 석사학위를 받은 그는 1955년 테네시의 ‘킹스포트 타임즈 (Kingsport Times)지 에서 사건기자로 시작하여 1958년부터 1970년까지는 웨스트 버지니아의 ‘찰스턴 가제트 (Charleston Gazette)’지에서 일하며 50년대와 60년대의 흑인 민권운동, 아팔레치안 산맥의 빈민 탄광촌, 남부 웨스트 버지니아의 부패한 선거운동에 대해 많은 기사들을 남겼다.
그는 1970년부터 20여 년 동안 캘리포니아의 ‘세크라멘토 유니온 (The Sacramento Union)’지에서 추적탐문기자로 활동하면서, 한인 이민역사에 길이 남을 업적을 남긴다. 바로 1973년 샌프란시스코 차이나타운의 갱  살해사건의 용의자로 체포된 한인청년 이철수 사건이었다. 그는 6개월간 이철수 사건을 취재하여 1978년 1월 29일 ‘차이나타운의 앨리스’라는 특종기획기사로 이철수 재판의 부당성을 고발했다.
이철수 기사로 미전국에서 ‘이철수 구명위원회’가 결성되었다. 이후 그는 5년 동안 120여 개의 기사를 통해 이철수에 대해 경찰과 검찰의 수사기록과 재판과정에서 나타난 의문점들을 제기하였고 샌퀸틴 감옥소에서 사형을 기다리고 있던 이철수는 재심에서 무죄를 선고받고 1983년 석방되었다.
미국의 주류 언론계에서 이경원은 유색인종과 소수민족에 대해 남다른 통찰력을 가졌던 언론인으로 알려져 있다. 워싱턴DC에 자리잡은 언론박물관 ‘뉴지엄'(Neseum)에는 ’20세기를 빛낸 언론인’ 중에 유일한 동양인으로 등재되어 있다. 그는 주류 언론계에서 수많은 수상경력이 있으며 한인사회를 위해서도 영자신문 창간, 한인사회와 흑인 및 라티노사회의 우호적 관계를 위해 노력을 기울였다. 현재 세크라멘토에 거주하는 그는 아직도 정열적으로 기고와 강연활동을 하고있으며 ‘이철수 사건’ 등을 포함, 한인 이민사에 관한 두 권의 저서를 집필중이다. 


-한인사회의 구성원인 도심지의 저소득층 거주자 (다운타운 코리언), 교외지역의 전문직 부유층과 중산층 (업타운 코리언), 입양인과 혼혈인, 전직미군과 결혼한 한인여성들 및 그들의 자녀와 친척들, 그리고 이미 주류사회로 흡수된 초기 이민자들의 자손들 등등으로 점점 다양해지는 구성원들을 어떻게 포용하고 대화를 이끌어내고 방향을 제시할지,


파란만장했던 지난 한 세기 이민역사를 마감하는 오늘날, 한인사회(Korean America)는 출신과 지역과 종교와 심지어는 인종까지도 초월할 것이다. 한인사회는 우리의 마음속에 있는 것이다.
4.29가 우리에게 증명한 것이 한가지 있다면 그것은 한인들이 그토록 자랑하는 수많은 빛나는 개인적 명예와 업적을 합친다 해도 경쟁관계와 이해집단으로 점철된 이 나라에서는 아무 가치가 없다는 것, 어쩌면 오히려 마이너스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개인적 업적의 합산에는) 우리의 다원적 정치 공동체를 연결하고 통합하는 공동체 의식, 즉 커뮤니티 의식이라는 것이 완연히 결여되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것은 우리의 관료주의적 엘리트들에게는 아직 이질적인 개념이다.
미국이란 ‘신세계’에서 ‘한’을 지닌 민족인 우리 한인들이 공동체 의식을 창출하고 공유하기에는 수십 년, 아니 여러 세대가 소요될지도 모른다. 다시 불거진 북한의 핵 위협과 이라크와의 전쟁으로 어지러운 이 포스트 4.29 시대의 역사적인 주역은 ‘1992년 4월 29’ 교훈으로 다시 태어나서, 사회 정치력 신장과 타민족과의 연대를 강조하면서 앞장서고 있는 소숭의 한인 운동가들이다.
지금은 미국 땅의 순례자로서의 우리 존재를 결정짓는 시간이다. 지금은 태고적부터 끊임없이 한민족이, 한반도와 외지의 코리언들이 감내해 온 고난의 역사에 붙은 최후의 한 장(章)이다.
그리고 점점 가까워져 가는 환태평양 시대에 이 ‘4.29의 자녀'(Children of 4.29)들은 한민족의 역사에서 ‘한’의 사슬에서 해방되는 첫 세대가 될지도 모른다. 그들은 더 나은 세상을 위해 우리의 꿈과 희망을 안고 강을 건널 것이다. 우리의 ‘한’은 이쪽 강가에 남겨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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