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브라질’ 앞에 무너진 네덜란드의 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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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년 7월 9일 미국 텍사스, 댈러스의 코튼 볼 경기장에는 브라질과 네델란드의 경기를 보기위해63,500명의 관중들이 몰려들었다. 월드컵 우승국의 전통을 지닌 브라질이 미국 땅을 밟은 목적은 단 하나, FIFA 월드컵 우승이었다. 월드컵 3회 우승에 빛났지만 당시 20년 이상 우승컵을 손에 쥐지 못한 상태였던 브라질은 1994 FIFA 월드컵 미국™에 임하면서 전 세대 선배들의 화려하고 즐기는 플레이 대신 탄탄한 전술과 냉철한 판단력을 발휘하자는 데 기꺼이 동의했다.
이전 모습과는 상당히 다른 브라질 팀에서 호마리우와 베베토는 날카로운 공격을 이끄는 쌍두마차였으며 네덜란드는 조별 경기는 순조로웠으나 16강전에서 아일랜드를 꺾는 동안 수비에서 불안한 모습을 보였다. 또한 대체적으로 네덜란드 팀은 이전에 비해 조직력이 약한 것으로 평가됐다.


-편집자


















어쨌든 강력한 우승 후보로 꼽히는 두 팀은 1974년 독일 월드컵 준결승 이후 처음으로 맞붙게 됐다.. 74년 준결승전은 적어도 승자인 네덜란드 입장에서는 더할 나위 없이 정열적이고 멋진 경기였지만 브라질로서는 20년 간 그들의 명성에 비추어 볼 때 만족스럽지 못한 성적을 냈던 침체의 계기가 된 경기였다.
떡 벌어진 어깨의 위협적인 호마리우와 그의 공격 파트너 베베토는 완벽한 한 쌍이었다. 마른 체구의 베베토는 하의를 바짝 올려 입은 모습이 마치 가냘픈 어린아이처럼 보여 ‘베이비’라는 별명이 딱 어울렸다. 그와 대조적으로 네덜란드의 건장한 최종 수비수 중에는 탄탄한 체격의 노장 로날드 쿠에만이 버티고 있었다. 쿠에만은 1988년 유럽축구선수권대회 당시 네덜란드의 우승 멤버였다.
경기 초반 호마리우는 미드필드에서 제대로 공을 공급하지 못하자 성급히 적진 깊숙이 뛰어들어 첫 슛을 날렸지만 네덜란드 골키퍼 에 데 고이가 손쉽게 막아냈다. 반대 진영에서는 기량이 절정에 달한 마르크 오베르마스가 재치 있고 화려한 왼쪽 측면 공격으로 브라질 풀백들을 괴롭혔다.
호마리우는 킁킁거리며 먹이를 찾는 사냥개처럼 쉴새 없이 움직이며 골을 향해 조금이라도 유리한 위치를 잡기 위해서라면 스탐 발크스의 발이라도 밟을 태세였다. 호마리우는 리우데자네이루의 거친 뒷골목에서 단련된 사냥꾼 그 자체였다.
전반전이 아무 성과없이 끝나갈 쯤 베베토와 호마리우가 멋지게 호흡을 맞춘 플레이를 선보였다. 몇 번의 빠른 패스에 이은 한 번의 찔러 넣는 패스로 네덜란드의 수비가 거의 무너질 뻔했다. 상대방을 괴롭히는 ‘전통의’ 브라질 축구가 잠깐 빛을 발한 것이다. 하지만 골로 연결되지는 않았고 결국 전반전은 양팀 득점 없이 종료됐다.
그러나 이 공격이 이후 경기 양상의 예고편이라도 되는 듯 후반전 시작과 동시에 브라질 선수들은 맹렬한 공격을 퍼붓기 시작했다.경기 시작 53분, 네덜란드 수비가 일순 무너졌다. 라이카르트의 부주의한 패스를 가로챈 브라질은 쏜살같이 공격에 나섰다. 베베토가 왼쪽에서 공을 받은 다음 수비수를 따돌리고 호마리우에게 낮게 깔린 크로스를 연결했다. 호마리우는 노쇠한 쿠에만을 제치고 골대 바로 앞에서 발리 슛으로 골 네트를 흔들었다. 호마리우는 포효하며 코너 플래그 쪽으로 달려가 무릎을 꿇고 환호했는데, 이때 벤치에서는 앳된 호나우두가 이 모습을 유심히 지켜보고 있었다.
부지런히 뛴 반 보센은 역할을 다하고 교체되어 침울한 표정으로 경기장을 빠져나갔다. 이제 오렌지 군단의 운명은 크루이프와 반 바스텐의 후계자인 베르캄프에게 달렸다. 굳은 얼굴 표정에서 드러났듯이, 신중한 스트라이커인 베르캄프 자신도 이 사실을 잘 알았다.












네덜란드는 맥없이 무너지는 듯 보였고 전통의 응원가 ‘성자의 행진’도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브라질 팬들의 북소리가 맹렬하게 울려 퍼지면서 두 스트라이커의 공격도 더욱 거세졌다. 수비를 돌파한 베베토의 슛이 골 포스트를 스치듯 벗어나자 관중석에서는 아쉬움의 탄성이 터져 나왔다. 불과 몇 분 후, 이번에는 호마리우가 돌파했지만 데 고이가 제때 달려 나와 기회를 무산시켰다.
예전과 같은 삼바 축구는 아닐지 몰라도 확실히 리드미컬하고 효과적인 플레이였다. 브라질의 두 스트라이커는 마치 피 냄새를 맡은 상어처럼 기회를 포착했다. 경기 시작 63분, 이번에는 베베토가 영웅이 될 차례였다. 데 고이가 쳐낸 공이 경기장 안쪽으로 흘렀는데, 오프사이드 위치에 서있던 호마리우는 패스하는 척하며 수비수들을 속였다. 심판의 휘슬을 기대했던 수비수들은 꼼짝없이 당했다. 뒤에서 쏜살같이 달려 나온 베베토가 화려한 발재간으로 골키퍼를 따돌리고 텅 빈 골대 안으로 공을 밀어 넣었다. 2-0으로 브라질이 준결승에 한 걸음 더 다가선 가운데 베베토는 코너로 달려가 새로 태어난 아들을 위한 특유의 요람을 흔드는 골 세레모니를 펼쳤다.
네덜란드 선수들은 전의를 상실한 듯 했다. 하지만 브라질의 두 번째 골이 터진 직후, 네덜란드의 긴 스로우가 패널티 박스 안쪽으로 침투하던 베르캄프에게 연결됐다. 두 명의 수비수를 제친 베르캄프는 타파렐 뒤로 공을 미끄러뜨리듯 골을 성공시켜 한 점을 만회했고 골 세레모니 없이 센터 서클로 묵묵히 돌아왔다. 2-0으로 리드할 때 골을 허용할 위험이 가장 높다는 말이 입증된 셈이다.
갑자기 네덜란드 선수들의 전의가 되살아났다. 질 때 지더라도 그들이 맞선 거대한 브라질을 힘껏 후려치고 지겠다는 투지였다. 전의를 되찾고 경기장을 누비던 베르캄프는 코너 밖으로 공이 흘러나가자 주심이 페널티 박스 안에서의 핸들링을 놓쳤다면서 거칠게 항의했다. 코너킥 선언을 받아 오베르마스가 킥을 올렸고 아론 빈터가 뛰어 오르며 타파렐을 피해 동점 골을 터뜨렸다. 네덜란드 선수들은 코너 플래그 주변에서 목이 터지도록 환호하며 4강의 꿈을 불태웠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텍사스 댈러스에서 이렇게 극적인 축구를 구경하기는 처음이라는 사실이다.











하지만 새로운 브라질 팀은 냉정함을 잃지 않았다. 브라질의 플레이는 이전까지의 감성적이고 유리알처럼 섬세한 모습이 아니었다. 브랑코, 둥가 등의 노장들이 튀지는 않지만 탄탄하게 경기를 이끌기 시작했다. 그 동안의 고난을 승리로 보상받아야 한다는 생각으로 뭉친 이들은 정면 공격을 개시했다.
이겨야겠다는 생각에 1986년 멕시코 월드컵에 출전했던 노장 브랑코는 팔꿈치로 오베르마스를 가격했다가 분개한 빔 용크의 앙갚음으로 고통스러워하며 잔디 위를 나뒹굴었다. 분노의 불길이 양팀을 휘감았다. 밀치고 잡아 끄는 등 반칙이 속출했고 어느 쪽도 양보하지 않았다. 결국 브라질이 프리킥 기회를 얻었지만 골대에서 너무 멀어 별다른 위협은 되지 않았다. 하지만 브랑코가 긴 돌파 이후 25미터 거리에서 때린 슛이 골대 안쪽으로 파고 들며 불과 경기 종료 9분 여를 남겨 둔 상황에서 브라질이 다시 앞섰다.
브라질은 이 경기에서 승리했고 결국 1970년 줄리메컵을 손에 넣은 이후 처음으로 FIFA 월드컵 우승을 차지하기에 이르렀다. 준결승에서 스웨덴을 일축한 브라질은 이탈리아와의 결승에서 수비에 치중하는 재미없는 경기를 펼친 끝에 승부차기로 우승을 확정했다. FIFA 월드컵 결승전 사상 이렇게 애매한 방법으로 승부가 나기는 처음이었고 다행히 지금까지 이와 동일한 사태는 벌어지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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