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5월 24일 오렌지카운티의 사랑의 교회의 담임 황성기 목사는 한 전직 월남군 소령 투우엔 리의 방문을 받았다. 그 월남군 소령은 한 베트남 신문을 황 목사에게 보여주면서 ‘누엔’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그 신문에는 한국에서 체포된 누엔의 석방을 요구하는 ‘리틀 사이공’의 베트남인들의 시위 장면과 기사들이 보였다. 그리고 한국에 천정배 법무장관에게 청원한 베트남 인사들의 글도 실려 있었다. 다음 날인 5월 25일 그 월남군 소령은 전직 월남군 장군인 투 리와 함께 다시 황 목사를 찾아와 누엔 석방을 위한 한인 커뮤니티의 도움을 호소했다. 그로부터 황 목사는 누엔에 대해 알아보기 시작했다. ‘리틀 사이공’을 방문해 누엔이 어떤 인물인가를 직접 조사했다. 누엔의 반공주의자라는 점과 그가 공산 베트남정권에 대항해 자유민주주의 운동을 펼쳤다는 사실들을 알게된 황 목사는 누엔의 장남 빈 누엔 등을 만나 위로의 말을 전했다. 지난 6월 11일 ‘리틀 사이공’의 자유베트남방송국 앞에서는 그의 석방을 요구하는 시위가 열렸다. 이 자리에 황 목사가 초청되었다. 황 목사는 약 2000명이 모인 시위대 앞에서 “나는 한국정부가 만약 누엔을 베트남으로 송환하게 된다면, 그은 반드시 처형당할 것이란 점에 수치심을 느낀다”면서 “그의 석방을 위해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이 말을 들은 베트남 시위대들은 자유월남기, 성조기, 태극기를 흔들며 환호했다. 이어 6월 22일 황 목사가 주도한 한-베트남 시위대 1천여명은 LA 코리아타운 올림픽가에서부터 버몬트 애비뉴를 따라 북상해 LA총영사관 앞에서 “한국정부는 누엔을 석방하라”며 인권시위를 벌였다. 이날의 시위대 일부 참가자는 24시간 단식농성도 벌였다. 한인 커뮤니티와 베트남 커뮤니티가 인권운동을 위해 한국공관 앞에서 태극기와 자유월남기 그리고 성조기를 흔들며 대대적 시위를 벌이기는 이날이 처음이었다.
베트남 커뮤니티는 누엔이 서울서 체포된 다음날 4월 11일 약 300명의 시위대들이 LA총영사관 앞에서 그의 즉각 석방을 촉구하는 시위를 벌였다. 이후 4월 15일에는 ‘리틀 사이공’은 비롯해 워싱턴DC 등 15개 도시에서 약 1만명이 참가해 촟불시위와 함께 대대적인 캠페인을 벌였다. 시위대들은 “누엔은 테러리스트가 아니다”면서 “공산 베트남이 테러리스트 집단이다”라고 외쳤다. 이후로 베트남 커뮤니티는 한인 커뮤니티와 합동으로 오렌지카운티 ‘리틀 사이공’과 한인타운 거리에서 수차례 대규모 시위와 기도회를 개최해 누엔의 석방을 기원해왔다. 그리고 베트남 컴뮤니티는 주미한국대사관을 통해 노무현 대통령에게 탄원서도 보냈으며, 전세계 각국의 베트남 단체들도 한국법원과 행정부에 그의 석방 탄원서를 보냈다. 또한 누엔의 구명을 위한 사이트(www.freechanhnguyen.com)도 개설해 전세계에 ‘누엔 사건’을 알려 도움을 호소해왔다. 지난 4월 5일 누엔이 서울을 방문하게 된 것은 사이판에 고아원을 건립하기 위한 기금모금 때문이었다. 그는 US인터내서널 미션 대표로 기업가를 만나기 위해 한국에 입국해 그린 리프 플라자 호텔에 여장을 풀었다. 항상 그를 감시해왔던 공산베트남 정부는 한국정부에 통보해 그를 체포해 베트남으로 인도해 줄 것을 요청했다. 한국 경찰은 누엔이 묵고 있는 객실 옆방에 베트남어 통역관을 두고 그를 체포해 사전 계획 작전이란 인상을 받고 있다. 또한 그의 서울 방문에는 이탈리아 국적의 베트남 여인이 안내한 것으로 보여 기금모금을 위장한 미인계 체포작전이 아닌가라는 의혹도 제기되고 있다. 한국정보 관계자들은 누엔이 베트남 정보기관의 덫에 걸린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른바 ‘미인계’에 속았다고 보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누엔은 2005년 4월 발효된 한국정부와의 범인인도조약에 따라 주한 베트남 대사관을 통해 그에 대한 체포를 한국경찰에 요청한 데 따른 것이다. 한국 재판부는 결정문에서 ‘범죄인 인도조약에 따르면 누엔은 정치범으로 인정되며 따라서 정치범에 대한 인도를 거절할 수 있는 사유에 해당된다’고 밝히고 테러범으로 볼 수 있는 아무런 구체적인 정황이나 예비 음모에 대한 증거가 없고 피해자가 발생하지 않아 석방한다’고 석방이유를 설명하고 누엔의 희망대로 미국으로 보내졌다.
첸 후 누엔은 누구인가?
베트남 정부의 공적 1호?95년 망명정부 성격의 ‘자유 베트남정부’결성 뛰어난 사업가로 활동하며 인권운동하며 병원, 학교 등 건립하는데 앞장 절대적인 신망 속에 전 세계적으로 약 20만명의 회원 세계 최대 조직으로 발전 베트남인들 “누엔은 베트남의 김구선생 같은 존재” 신앙과도 같은 인물로 추앙
누엔은 1949년 베트남의 빈틴에서 태어나 1972년 푸토 대학 공학과를 졸업했다. 그는 1975년 월남이 패망할 당시 미군의 탈출 권고에도 불구하고 사이공에 남았다. 당시 그의 나이는 26세. 사이공을 함락한 공산 월맹군은 대대적인 체포작전을 벌였다. 누엔도 체포되어 정치범 수용소 A-40으로 보내졌다. 그은 수 차례 탈옥을 시도했으나 그 때마다 체포되어 고문을 당했다. 1982년 그는 다시 탈출해 가족과 함께 “보트피플”로 필리핀으로 가는데 성공했다. 다시 미국으로 건너가 오렌지카운티에 정착했다. ‘리틀 사이공’이 형성되어 가는 도중 그는 베트남 커뮤니티에서 최초로 대형건설회사를 설립해 주목을 받았다. 그는 저소득층을 위한 병원도 설립하고, Pacific Technical School 등을 건립하는 등 베트남인들의 정착사업을 지원했다. 또한 그는 인권운동에도 관심을 가져 캄보디아의 어린 소녀들이 국제매춘조직에 의해 성노리개로 미국에 유입되는 것을 방지하는 운동에도 앞장 서왔다. 이러한 그는 1995년부터 본격적으로 공산 베트남의 자유선거와 민주주의 그리고 인권증진을 위한 운동에 뛰어 들었다. 말하자면 적화통일된 베트남 정부에 대한 비폭력반대운동이었다. 그는 1995년에 ‘자유베트남정부’(Government of Free Vietnam)라는 망명정부 성격의 운동체를 수립했다. 1997년부터는 “베트남의 평화와 인권운동”을 펼치기 시작했으며 그 해 8월15일에는 “자유베트남국민당”을 결성했다. 이어 2년 후, 1997년 8월 15일에 ‘자유베트남방송국’을 설립해 공산 베트남 정권에 대한 목소리를 더욱 높였다. 누엔은 2001년에 오렌지카운티 애나하임 컨벤션 센터에서 “자유베트남 세계청년대회”를 개최했는데 전세계 각국에 퍼져있는 베트남 커뮤니티 대표 등 6천여명이 참가하는 성공을 걷우었다. 이 대회는 지난해까지 계속되어 공산 베트남정권을 반대하는 해외 최대 조직으로 성장했다. 현재 그의 지도하에 ‘자유베트남국민당’ 소속 회원만도 전세계적으로 20여만 명으로 알려지고 있다. 공산베트남의 자유와 민주주의를 회복하기 위한 그의 신망은 “리틀 사이공”에서는 물론 미국 등 캐나다 호주 등 전세계적으로 퍼져있는 베트남인들에게는 거의 절대적이다. 따라서 미국과 외교관계를 맺은 공산 베트남정부는 그를 “공적 1호”로 점찍어 그의 일거수 일투족을 감시해와 그의 제거를 시도해왔다. 그의 체포는 과거 한국이 군사독재하에 있을 당시 일본에서 망명생활을 하면서 한국의 민주화와 인권회복을 외쳤던 김대중 납치사건’을 떠올리게 된다. 한편 이번 구명운동에 나선 한인들은 그는 상하이 임시정부 주석을 지낸 김구의 독립운동과 일맥상통 한다고 말하고 있다. 이번에 베트남 커뮤니티가 한인 커뮤니티와 함께 그의 구명운동을 펼치면서 구호로 “누엔은 베트남의 김구입니다” 라고 적기도 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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