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로운 이국 생활의 적적함과 외로움을 달래주는 그이의 따뜻한 마음씨에 매료되어 우리는 하루가 멀다 하고 데이트를 즐겼고 급기야 아이들이 학교에 가면 그이를 집으로 끌어들여 관계를 가지는 등 이성을 잃고 오직 쾌락에 눈이 멀어 아무것도 판단할 수 없는 환상의 늪 속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그 동안 남편은 내 행동을 의심하고 미국에 와 몰래 방안에 카메라를 설치하여 감시해 왔다는 놀라운 사실과 사설탐정을 시켜 우리들의 관계를 일거수 일투족 모두 보고 받고 있었으며 심지어는 집안에서의 관계 장면을 비디오로 가지고 있을 정도로 상세히 알고 있었습니다. 이제 더 이상 결혼생활을 유지하는데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그 동안 본지에서는 최근 사회적인 문제점으로 대두되고 있는 세칭 ‘기러기 엄마’ 세태에 대한 부작용들에 관한 부정적 내용들을 취재하여 보도되자 본보에는 많은 일부 기러기 엄마들로부터 항의성 전화가 걸려오는가 하면 이와 관련한 일련의 제보가 접수되고 있는 가운데 샌프란시스코에 거주하는 한 ‘기러기 엄마’로부터 가슴 아프고 기막힌 사연의 e-메일이 전달되었다. ‘아현이 엄마’라고 적힌 석장의 그녀의 메일엔 그녀 역시 기러기 엄마 생활을 하던 중 돌이킬 수 없는 일을 저질러 결국 마사지 팔러 생활을 하다 지난 2005년 7월 이민세관국(ICE)과 연방정보국(FBI)의 합동 매춘단속 때 체포될 때까지의 구구절절 한 사연들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그녀는 서두에서 용기를 내어 이런 편지를 보내게 된 것은 LA를 비롯한 전 세계 각지에서 살고 있는 일부 몰지각한 기러기 엄마들에게 경종을 울리기 위해 또 열심히 고생하고 있는 기러기 엄마들과 본국의 기러기 아빠들에게 힘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라고 밝히면서 일부 기러기 엄마들의 보도가 잘못된 부분도 많다는 지적도 빼놓지 않았으며, 한때 자신의 빗나간 애정으로 인한 가정이 파탄되고 치유 불능한 마음의 상처를 받아 생활하고 있을 어린 자녀들에게 용서를 비는 마음에서 편지를 보낸다고 밝혔다. 그녀의 주소나 연락처가 없는 관계상 연락을 취하지는 못했지만 용기 내어 자신의 사연을 보내준 아현이 엄마에게 용기의 박수를 보내며 뒤 늦게라도 새로운 삶을 살아가는 ‘아연이 엄마’에게 용기를 보내며 편지 내용 전문을 공개한다.(일부 내용은 편집부에서 수정, 정리하였음을 양지바랍니다) <편집자 주> |
안녕하세요 저는 현재 샌프란시스코 인근에 거주하고 있는 ‘아현이 엄마’라고 합니다. 제가 이렇게 펜을 들게 된 것은 지난 달 우연히 LA를 방문했다가 선데이 저널에서 보도한 “일그러진 기러기 엄마”들에 대한 기사를 보고 저의 사연을 소개하여 다시는 저와 같은 일들이 없었으면 하는 바램에서 용기를 내어 <선데이저널>에 하소연을 하기로 마음을 먹고 두서없이 e메일을 보내오니 정리하여 주시기를 부탁 드립니다. 또한 이 편지를 통해 한국으로 돌아가 아빠와 함께 생활하며 못난 엄마에게 피 맺힌 원망을 하고 있을 면목없는 어미의 용서를 비는 마음이 뒤늦게 나마 전달되었으면 하는 마음뿐입니다. 그리고 두 아이의 엄마로서 한 순간 그릇된 판단과 욕정에 눈이 멀어 가정까지 파괴하고 결국은 마약과 매춘에 굴에 들어서고 끝내 매춘혐의로 체포되었다가 수사협조를 한 덕에 영주권까지 받게 되는 저의 참담한 사연을 통해 두 번 다시는 저와 같은 불행한 기러기 엄마가 없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글을 보냅니다. 저는 어느 기러기 엄마와 다를 바 없었던 두 아이(아연이 14살, 창수 12살)의 평범한 기러기 엄마였습니다. 내 나이 지금은 40이고 한국의 명문대학에서 정치학을 공부한 후 대 기업에서 직장생활을 하다가 지금은 건설업을 크게 하는 남편을 만나 교제한지 6개월 만에 전격 결혼 아연이와 창수를 낳았고 남 부럽지 않은 부유한 결혼생활을 하였습니다. 성실하기만 남편의 사업은 갈수록 번창해 강남 최고의 T 아파트 80평에서 살 정도로 무엇 하나 부러울 것 없는 윤택한 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다만 점점 힘들어지는 한국의 교육문제로 인해 두 아이들의 장래 진로문제만 제외하고는 걱정할 일이 한가지도 없었습니다. 그런 어느 날 미국에서 건너온 대학 동창생과 상의를 하던 중 아이들을 미국으로 보내기로 맘을 먹고 남편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두 아이와 함께 미국으로 조기유학을 떠나기로 결정했었습니다. 그러나 그 것이 결국 오늘 날 돌이킬 수 없는 수렁에 빠지는 결과가 되어 버린 것입니다. (중략) 처음에는 반대를 하던 남편도 내 설득에 결국 승낙했고 아이들은 유명 사립학교에 입학했으며 베버리 힐스에 고급 주택가에 약 300만 달러의 주택을 구입해주었고 아이들과 나를 위해 벤츠 500 승용차를 사주는 등 물심양면으로 아낌없는 지원을 해 주었습니다. 그렇게 입국해 무엇 하나 부러울 것 없이 시작한 미국 생활은 참으로 꿈만 같았고 오랜만에 남편의 굴레를 벗어나 자유로움을 만끽하며 LA에 사는 친구들과 만나고 생활하면서 자연스럽게 이들의 소개로 LA에서 잘 나간다는 남자들을 소개받고 그들과 함께 어울리며 노래방이며 골프를 하기도 하고 아이들이 ‘휠 츄립’을 갈 때면 이들과 같이 1박 2일 골프여행을 가는 등 정말로 자유로운 생활을 즐기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중 우연히 집을 소개해 준 한 부동산 에이전트를 만나게 되면서 겉 잡을 수 없는 사랑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외로운 이국 생활의 적적함과 외로움을 달래주는 그이의 따뜻한 마음씨에 매료되어 우리는 하루가 멀다 하고 데이트를 즐겼고 급기야 아이들이 학교에 가면 그이를 집으로 끌어들여 관계를 가지는 등 이성을 잃고 오직 쾌락에 눈이 멀어 아무것도 판단할 수 없는 욕정의 늪 속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이래선 안 된다고 몇 번을 되 내이면서 나름대로의 죄책감 때문인지 이성을 찾아보려고 남편에게 전화를 해보기도 했지만 늘 그랬던 것처럼 남편은 힘내라는 말과 함께 그 결정은 당신이 내린 거라는 말만 되풀이되었고 결국 저는 그와 돌이킬 수 없는 깊은 관계에 빠져 들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자연히 아이들의 학교생활에 등한시하게 되었고 사춘기에 접어든 아이들은 점점 학교생활과 멀어져 가면서 오히려 나무라는 나에게 반항으로 일관하며 삐뚤어진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시간이 갈수록 그도 서서히 변하기 시작했습니다. 가끔씩 황당한 프로젝트를 들고와서 함께 부동산 사업을 하면 큰 돈이 남는다고 나를 설득하는가 하면 집을 사서 되팔면 남편 사업 못지 않게 돈을 벌어 쓸 수 있다면서 노골적으로 돈을 요구하기 시작했고, 그 때마다 저는 남편 몰래 가지고 있던 수중의 돈을 주기도하고 한국의 땅이나 내 명의로 된 부동산을 팔아 그에게 주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이는 한번도 신용을 어기지 않았으며 때로는 ‘나 때문에 돈을 벌었다’며 많은 돈을 주기까지 하였습니다. 불륜 관계로 지낸 지 2년 만에 남편도 이상한 느낌을 챘는지 전화를 자주하거나 바쁜 와중에도 아무런 소식도 없이 미국을 오고 가곤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미국에 온 남편은 내게 충격적인 내용의 말을 하며 이혼을 하자고 요구하였습니다. 그 동안 남편은 내 행동을 의심하고 미국에 와 몰래 방안에 비디오를 설치하여 감시해 왔다는 놀라운 사실과 사설탐정을 시켜 우리들의 깊은 관계를 일거수 일투족 모두 보고 받고 있었으며 심지어는 집안에서의 관계 장면을 비디오로 가지고 있을 정도로 상세히 알고 있었습니다. 이제 더 이상 결혼생활을 유지하는데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남편은 ‘아이들을 위해서라도 조용히 끝낼 것을 종용했습니다. 두 아이를 자신이 데리고 가는 조건으로 살고 있는 집만은 내게 주겠다’고 하였습니다. 결국 남편과 합의 이혼을 끝내고 남편이 사준 집에서 그와의 본격적인 동거를 시작했습니다. 그도 유부남이었기 때문에 이혼하는데 시간이 좀 걸린다고 했으나 진정 그를 사랑했기 때문에 기다렸습니다. (중략)
그러나 이것은 제가 겪어야 할 고난을 알리는 첫 신호탄에 불과 했습니다. 마지막 가지고 있던 콘도마저 팔아 그이에게 건네주고 생활고에 몸부림쳐 보았지만 그럴수록 내 자신은 위축되었고 아무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이를 놔두고 이사를 갔다고 소식을 듣게 되어 심한 배신감을 느끼며 무기력증에 6개월을 보냈습니다. 저는 한국에 있는 형제들에게 면목없게도 약간의 돈을 받아 생활하면서 생계를 위해 결국 마사지 팔러에서 일하게 되었습니다. 남편과 헤어진지 불과 1년여 만에 것은 믿기지 않는 일들이었습니다. 맛사지팔러로 전락한 나는 하루에도 5~10명씩 뭇 남성들을 상대해 적지 않은 돈을 벌 수 있었고,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망가진 저가 선택할 수 있었던 것은 한국이 아니라 이곳에서 삼류인생을 살아가는 것뿐이었습니다. 제가 저지른 죄로 인해 어느 누구 하나 저를 돌봐주지 않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마사지 팔러에서 일을 하면서 혹시라도 나를 알아보는 사람들이 올까 두려워 가능하면 한국인들을 받지 않고 미국인이나 남미계 사람들을 받았습니다. 그렇게 1년이 지나고 2005년 7월31일 미국사람으로 보이는 한 남자가 들어왔다가 관계도 같지 않고 사라져서 이상하다 생각했는데 느닷없이 10여명의 이민세관국(ICE)과 FBI수사관 복장의 사람들이 들이 닥쳐 영업장안에 종업원들을 모두 체포하기 시작했습니다. 나중에 정신차리고 보니 FBI에서 나온 수사관들로 지역 경찰관과 함께 왔었습니다. 아마 이 사건에 대해서는 대부분 아실 거로 알고 있지만 이 사건이 미 연방정부차원의 대대적인 매춘 단속인 ‘황금새장’ 작전이었습니다. 매춘혐의로 체포되어 수갑을 차는 순간 참으로 형언할 수 없는 극도의 수치심과 절망감에 쥐구멍이라도 들어가고 싶은 심정이었습니다. 우리 일행은 다행이 1만달러의 보석금을 내고 풀려났지만 재판 후 한국으로 추방될 것을 생각하니 미쳐 돌아버릴 정도로 내 자신이 한심하기만 했습니다. 악몽 같은 하루하루를 보내며 지난 미국 생활을 후회해 보았지만 영원히 돌이킬 수 없는 내 자신의 형벌이라고 생각하며 과거의 실수한 일들을 후회하고 있었습니다. 어찌해서 내가 잘못된 길로 들어서게 되었는지, 도대체 내가 왜 이런 처지까지 오게 되었는지 생각이 꼬리를 물면서 터질 것 같은 답답한 마음을 얼마나 내리쳤는지 모르겠습니다. 결국 저는 조사과정에서 수사가 진행되면서 저는 수사관으로부터 특별한 제의를 받았습니다. 영주권 취득과 형량을 감해 줄 테니 자신들이 알고 싶은 매춘 조직에 관한 정보를 알려주면 된다고 했기 때문입니다. 검찰의 바겐 제의였습니다. 그런 연유로 영주권을 받고 지금은 샌디에고의 한 미국식당에서 웨이츄레스 생활을 하며 지난날 어리석었던 행동과 남편과 자식들에 대한 죄책감에 용서를 구하며 열심히 살아가고 있습니다. 과거의 일들을 뉘우치고 용서받기 위해 그 어느 누구보다도 열심히 살아가고 있습니다. 저와 같은 한심한 기러기 엄마들은 물론 거의 없을 것이겠지만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앞으로 기러기 엄마가 될 분들과 기러기 엄마로 살아가는 분들 모두에게 저 같이 바보 같은 실수를 해서 돌이킬 수 없는 인생의 오점을 남기게 될까봐 염려하는 마음에서 드립니다. 한 순간의 그릇된 선택과 판단으로 인간으로서 마지막 길을 걸어야 했던 한 못난 엄마의 부질없는 욕망과 자만이 준 교훈이라고 생각하고 싶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