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분, 저가 이렇게 시퍼렇게 살아있는데 일본 놈들 어떻게 거짓말을 하는지 너무 분해요. 일본 총리가 내 앞에 무릎 꿇고 사죄하기 전까지는 100년이고 200년이고 절대로 눈을 감을 수가 없어요” 지난 13일 밤, 코리아타운 JJ Grand 호텔에서 개최된 ‘정신대 결의안’ 통과를 위한 후원의 밤에서 일본군 위안부 생활에서 극적으로 살아난 이용수(79) 할머니의 피맺힌 절규가 터져 나오자 이 자리에 참석한 300여 청중들은 한동안 숨을 멈추어야 했다.
이용수 할머니는 “일본군은 내가 어린 나이로 육체적.정신적 고통을 감당하지 못해 실신하면 주사를 놓고 물을 뿌려 깨워가며 계속 만행을 저질렀다”며 “지금도 그 때의 성병 후유증으로 고생하고 있다”고 말했다. 3년 동안 성 학대를 당한 후 1946년 만신창이가 된 몸으로 돌아왔는데 가족들은 이미 딸이 실종돼 죽은 줄 알고 제사를 지내고 있었다. “엄마야! 나 왔다”고 말하는 딸의 모습을 보고 그녀의 어머니는 귀신이 되어 돌아왔다며 그 자리에서 실신했다. 그 후 이용수 할머니는 가족들에게 조차 모든 사실을 숨긴 채 결혼도 하지 않고 혼자 살았다. 죄책감과 위안부 생활로 얻은 성병 때문이었다. 그녀는 “가족에게도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내가 어디에 가서 무엇을 했는지. 아버지는 딸 하나 있는게 시집도 못 간다고 한탄을 하시다 돌아가셨다” 라면서 눈물을 흘렸다. 이용수 할머니는 “나는 조선의 자랑스런 딸이라는 심정으로 일본의 악행을 세상에 고발하기로 했다”면서 “지금 세상에 만연된 성폭행 범죄를 업에기 위해서라도 일본의 성 노예 만행의 사죄를 죽을 때까지 펼칠 것”이라고 힘주어 말했다. 그녀는 “내가 왜 위안부인가? 내가 왜 일본군을 따라 다니면서 일본군을 즐겁게 해주고 섹스를 해줬다는 것인가? ‘종군 위안부’가 아닌 ’ 일본군 강제 위안부 피해자’로 써야 한다”고 주장했다. 자의로 몸을 팔았다는 뜻을 지닌 ‘위안부’라는 호칭은 가당치도 않다는 것이다. 이용수 할머니는 지난1992년부터 16년간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해 일본 대사관 앞에서 열리는 ‘수요시위’에도 매주 빠지지 않고 참석하며 일에 앞장서왔다. 이용수 할머니의 증언이 끝나자 참석한 모든 사람들이 일제히 일어나 박수로 존경을 나타냈다. 이날 HR121 가주연대가 주최한 후원의 밤은 김성희씨와 김현정씨의 공동사회로 진행됐는데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증언’이라는 영상물 상영에 이어 돌아가신 위안부 피해자를 위한 묵념이 있었다. 이어 국군포로송환위원회 회장 토마스 정 박사는 격려사를 통해 “위안부 피해자를 위한 운동은 인간의 양심의 행동”이라고 강조했다. 그리고 일본의 과거사 범죄행위를 위해 법정투쟁에 나섰던 배리 피셔 변호사는 일본의 잔학한 범죄행위를 고발했다. 이어 가주연대의 코오디네이터인 이승호 변호사는 미의회의 정신대 결의안 추진 현항과 가주연대의 활동상을 소개하면서 본회의 통과를 위한 성원과 모금에 동참해 줄 것을 호소했다. 이날 이용수 할머니와 함께 한국에서 온 강주혜 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사무처장은 “미국에서 이처럼 결의안 추진에 열성적인 운동을 해줌에 감사를 표한다”고 말했다. 이날 이용수 할머님의 피맺힌 증언이 끝나자 한 여고생 “다슬”은 “할머님의 용기에 감사 드려요”라는 글을 낭독했으며, 일본에서 유학 온 2세 여대생은 ‘나의 살던 고향’을 애절한 음정으로 불러 이용수 할머니의 눈시울을 붉히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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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청춘을 돌려 다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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