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간25주년 특집 – 2편. ‘4·29를 넘어서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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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9폭동이 발생한 후 10년째 되던 지난 2002년 4월 29일 ‘4·29 폭동백서’라는 귀중한 책이 발간됐다. ‘LA소요사태의 조사 및 진실규명’이라는 부제가 달린 이 책은 4·29협회 홍사일 회장이 사재를 들여 발간했다. 이 책은 4·29 폭동의 진실을 규명하는데 교과서로 불릴 만큼 중요한 기록들이 담겨 있으며 당시 일들을 기록하기 위해 한인사회가 만든 유일한 보고서라고도 볼 수 있다.
홍사일 회장은 ‘4·29폭동백서’의 발간 목적에 대해 ▲4·29폭동에 대한 정확한 인식으로 동포사회의 단합과 화합 ▲한국정부와 미국정부에 대해 한인들에 대한 바람직한 정책의 자료로 제시 ▲미국사회와 타인종들에게 4·29폭동의 진실을 제대로 알리고 ▲우리 후세들에게 이민1세들의 노력과 가치관을 알리고, 그들이 미주류사회에서 올바르게 뿌리를 내리게 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러한 홍회장의 의도와는 다르게 여전히 ‘4·29’의 진상은 밝혀지지 않고 있다. 미국정부와 주류언론은 물론, 미국 내의 양심세력도 유독 4·29폭동에 대해서만큼은 침묵을 지키고 있다. 해마다 4·29 폭동일이 돌아오면 갖가지 기념행사가 벌어지지만 이 날은 기억하는 것은 당일뿐이다.
폭동 당시 이민 역사상 1100만여 달러라는 어마어마한 폭동 성금이 모아졌으나 이마저도 어떻게 사용됐는지 흔적조차 찾을 수 없다.
4·29폭동 당시 UCLA병원에 입원해있던 이경원(79) 원로기자는 TV중계로 비쳐지는 코리아타운의 불길을 보면서 1년 전 자신이 예언했던 인종폭동이 현실로 나타나는 모습을 보면서 눈물을 흘려야 했다. 당시 간에 이상이 있었으나 이식 수술의 기적적 성공으로 다시 세상 밖으로 나온 그는 언론인으로서 ‘4·29의 진실’을 규명하는 과제가 자신이 해야 하는 마지막 일임을 정했다. 그것이 이 땅에 살아가는 한인들의 정체성 확립에도 가치관을 심어 주리라 믿음 때문이다.                                                          
성진 <취재부 기자>













4.29폭동이 발생한 이후 지난 15년 동안 이경원 원로기자는 70대 고령임에도 젊은 학생들이 초청하는 곳이면 어디든지 달려갔다. 그는 학생들 앞에서 미주 땅의 한인 이민100년 역사를 30분 정도 간략하게 설명하면서 절반의 시간을 4.29폭동 관련 이야기에 할애한다. 그는 4.29폭동의 역사가 바로 한인들의 역사인양 목소리를 높인다.
“여러분! 당신들의 부모들이 이룩한 코리아타운이 불타고 있었는데, 소위 배웠다고 하는 양반들은 무엇을 했습니까! 하버드, 예일 또는 UCLA 등등에서 박사를 받은 그 많은 한인들은 어디에서 무엇을 했습니까!” “미국에서 고등교육을 받은 한인 엘리트들은 자신들의 학위와 명예 그리고 경제적 부를 추구하면서 자신의 가족에 대해서 생각하면서도, 한인 커뮤니티에 대해서는 무관심 했습니다”
결론을 내린다. “왜, 한인들이 4.29폭동에서 희생양이 됐는지 알아야 하는 것이 아닙니까. 그 진상을 알아야 다시 그 같은 수난을 당하지 않을 것이 아닌가!. 1세들은 언어도 불편하고, 이민와서 여러분을 교육시키고, 키우는데 희생하느라 주위를 돌 볼 겨를이 없지 않는가. 이제는 여러분이 나서야 할 때입니다”
그가 이러한 강연을 통해 강조하는 것은 한인 1세의 미래가 바로 강연을 듣는 2세라는 점이다.













인생을 바꾼 젊은이


이 원로기자가 하버드 대학에서 열린 학생모임에서 강연을 하던 때의 일이다. 당시 이 기자  앞 쪽에는 김도형 (Do Kim)이란 학생이 자리 잡고 있었다. 그는 3세 때 부모 따라 이민해 LA코리아타운에서 자랐다. 부모가 햄버거 가게에서 일하며 어려운 이민생활을 영위해 갈 때 그는 코리아타운에서 흑인과 라티노 학생 갱들을 보면서 자랐다.
코리아타운에서 중고등학교를 지내고 미국 최고의 명문대의 하나인 하버드 대학에 입학한  그는 주위의 학생이 대부분 백인 부유층이고, LA 지역의 저소득층 가정에서 온 입학생이 자신을 포함해 고작 4명이라는 사실에 큰 충격을 받았다.
그는 대학에서 ‘소수민족 사회학’ 강의를 듣던 중 이 원로기자의 강연을 듣게 됐다. 그 날 밤 김 씨는 이 원로기자를 자신의 기숙사 방으로 초청하여 밤새도록 토론을 벌였다. 이후 그는 하버드 대학에서 1993년 소수민족학 연구로 학사학위를 받았으며, LA로 돌아와 UCLA법대에서 2003년에 법학박사 학위를 받고, 캘리포니아 변호사 시험에도 합격했다.  하버드 대학 기숙사에서 TV로 4·29 폭동 장면을 시청했던 그는 UCLA법대를 다니면서 폭동피해자들의 재활을 위한 위원회에서 봉사활동을 했다. 또한 고등학생과 대학생을 상대로 재미한인 청소년리더십 프로그램을 운영했으며, 타인종과의 유대를 위한 ‘다인종 청소년 리더십 협회’도 창설해 사우스 센트럴의 흑인, 피코유니언의 라티노들과 연대하는 운동을 벌였다. 그는 또 한인상인들과 흑인고객들과의 분쟁을 해소하는 한·흑연맹의 위원으로도 활동했다.
그는 직업적으로도 감옥에서 부당하게 대우를 받는 수감자들의 인권 문제, 저소득층들이 기업들로부터 당하는 고용차별, 성적학대 등등 인권문제를 다루는 변호사로 활동하고 있다. 이경원 원로기자의 강연 소리가 언제나 김 변호사의 귓가에서 쟁쟁하게 들렸기 때문이다.
지난 2005년 김 변호사는 자신과 뜻이 맞는 3명의 젊은이들과 함께 ‘이경원 리더십 센터’를 창설했다. 젊은 학생들에게 한인 정체성으로 지도력을 향상시켜 장차 한인 커뮤니티와 미국사회에서 지도력을 발휘케 하려는 취지였다. 올해까지 3차 리더십 코스를 진행시켰다. 고등학생과 대학생들을 대상으로 선발한 리더십 코스는 매년 방학 중 8주간 동안 주로 코리아타운의 문제점을 직접 체험하면서 한인 정체성을 터득한다. 물론 이들은 4.29폭동에 대해서도 공부한다.
이경원 원로기자로부터 영향을 받아 커뮤니티 봉사에 관심을 갖는 젊은이들이 지난 15년 동안에 하나 둘 생겨났다. 김도형 변호사도 이 중의 하나이다. 시카고, 뉴욕, 샌프란시스코, 휴스턴, 샌디에이고 등등에서 김 변호사와 같은 젊은이들이 커뮤니티를 위해 남모르게 봉사하고 있다. 이경원 기자는 “이제는 전국에 퍼져있는 한인 젊은이들이 하나의 네트워크를 구축한다면 미주 한인들은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위치에 오를 수 있다”면서 “4.29의 진실을 규명하는데 이들이 큰 역할을 할 것”이라며 기대감을 나타냈다. 













미국의 모습은













 ▲ 김대실 감독
4.29폭동을 잊지 못하는 여성이 있다. 미국에서 활동하는 독립영화인 김대실 감독(69)이다. 그녀는 4.29폭동 관련 다큐멘타리만 2편을 제작했다. 김 감독은 93년에 제작한 ‘사이구’ 1편에서 한인 여성 피해자들을 중심으로 조명했고, 4.29폭동 10주년을 기념해 “젖은 모래”라는 제목으로 2편을 제작했다. 2편은 폭동 10년 후의 한인과 흑인, 한인과 라틴계, 흑인과 라틴계의 변화와 갈등, 해결방안을 심층적으로 다룬 작품이다.
지난 93년 PBS를 통해 방영됐던 ‘사이구’ 1편은 폭동 피해 여성들과 인터뷰를 통해 미국 사회의 인종 및 계급갈등, 경제관계 등 복잡한 문제들과 법 시행상의 모순 등을 고발해 미 주류사회에 커다란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김 감독은 1962년 미국에 유학 간 이후 박사학위를 받고 마운트홀리케 대학 교수, 미 연방 인류국가기금과 뉴욕주 예술위원회에서 프로그램 디렉터로 일하다가 지난 88년부터 사재를 털어 독립영화인으로 활동하고 있다. 김 감독이 제작한 다큐멘타리의 특성은 ‘잊혀져 가는 역사를 우리 앞에 내놓는 것’이다. 지난 99년에는 한국위안부 기록 영화 `침묵의 소리’를 제작했고, 95년에는 강제징용된 사할린 동포 할아버지들의 삶을 그린 `잊혀진 사람들’을 만들었다. ‘사이구’ 영화도 마찬가지이다. 우리들이 쉽게 잊어 가는 역사를 알려 주기 위해서다.
그녀에게 ‘한민족 리포트’에서 ‘왜 다큐멘터리 영화를 만드는가’를 물었다.
“나와 같이 숨을 쉬고 피가 흐르고.. 살고 있는 그 분들이 인간이라는 것, 압박받는 사람들이 가난한 사람들이 다 똑같은 인간이라는 것.. 나에게 모든 어떤 것보다 중요해요” “이 사회의 주류인 백인들은 당시 비벌리 힐즈의 뒤뜰에서 우리가 다툼을 벌이고 있는 것을 보고만 있었습니다. 그것이 제 마음을 가장 아프게 하는 부분입니다. 이래서는 안됩니다. 새로운 이민자들, 유색인종들, 그리고 흑인계 미국인들 모두가 뭉쳐야 합니다. 뭉쳐서 지금과는 다른 모습의 미국을 만들어내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가 깨닫지 못한 미국의 이면을 인식해야만 합니다”


누가 ‘한’을


LA라티노 커뮤니티에서 자란 안토니오 비야라이고사 LA시장은 한마디로 산전수전을 겪고 미주류 정치에 화려하게 입문한 정치인이다. 그가 시장 선거에 나서면서 한인사회에서 열린 한 모금파티에서 이민역사상 최대 수난이었던 4·29 폭동에 대해 “한인들의 피해 보상에 관심을 갖겠다”고 공약했다.
4·29폭동 당시 LA경찰국은 폭도들이 코리아타운을 공격한다는 정보를 입수하고도, 이를 무시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또한 베버리 힐즈나 웨스트 LA백인 거주지를 보호하기 위해 코리아타운을 방패막으로 삼았다는 의혹도 받고 있다. 당시 LA카운티세리프 셔먼 블럭 국장과 FBI 등은 한인들을 공격한 폭도들을 인권범죄로 기소하겠다고 공언했지만 그 후 흐지부지 되고 말았다.
폭동이 있기 전 LA타임스와 KABC 방송 등 주류언론들은 한인과 흑인간의 갈등을 필요이상으로 과장시켜 보도해 흑인들의 불만을 한곳으로 분출시키는 고도의 언론플레이를 했다는 의혹도 있다.
폭동후 연방비상재난청(FEMA)이 한인피해자들을 제도적으로 구제하지 못했다는 의혹도 있다.
이 같은 의혹들이 진실로 밝혀지지 못한다면 우리는 4.29폭동 그늘에서 영영 헤어나지 못하게 된다.
4.29의 피해자의 한사람인 김동찬씨는 4.29폭동 10주년 때 이런 글을 적었다.
“모든 TV 방송국에서 생중계 했던 폭동의 현장 중에는 나에게 잊혀지지 않는 장면들이 많다. 한 폭도가 전자상점에서 커다란 텔레비전을 훔쳐 나와 너무 무거운 나머지 차에 옮겨 싣지 못하자 경찰이 함께 들어주는 모습을 보고 나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물론 물건을 훔치는 걸 어차피 막지 못할 바에는 교통이라도 소통시키자는 ‘민중의 지팡이’가 가졌던 소박한 사명감을 이해해줄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그렇게 가볍게 보아 넘길 일이 아니다. 공권력이 폭동에 어떤 자세로 대처 했었던가를 보여주는 대단히 상징적인 사건이다. 그 순간, 그 혼란 속에서 일어났던 모든 범죄는 면죄부를 받았다고 나는 생각한다. 아니면 공권력은 폭동의 공범으로 비난 받아야만 한다”
누가 이 ‘한’을 풀어 주어야 한다고 생각하는가? LA시장도 “보상에 관심을 갖겠다” 했는데 정작 한인사회는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다. 진정 우리 한인사회가 ‘4.29’를 넘어서 가지 못하면 우리에게는 또 다른 폭동이 다가 온다는 역사의 교훈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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