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미주 한국일보나 중앙일보, 중앙라디오를 포함한 상당수의 언론사들이 기자를 구하지 못해 매체 제작에 어려움을 겪는 ‘인력난’에 빠져있다. 매체들이 계속해서 모집 공고를 내고 있으나 지원자 자체가 거의 없는 현실이어서 언론사 편집국이나 방송사 보도국 간부들이 한 숨을 쉬고 있다고 한다. 그렇다고 해서 지면을 대폭 줄이거나 방송 시간을 줄이는 것도 매체 특성상 불가능한 일이라는데 이들의 고민이 있다. LA지역에서 한 때 신문 기자나 방송 기자는 선망의 대상이었으나, 기자에 대한 처우가 타 직종에 비해 형편없이 떨어지면서 어느 덧 젊은이들이 기피하는 직종이 되어 버렸다. 처우보다는 언론인으로써의 사명감으로 일해보겠다는 젊은이들을 찾기도 힘들어졌다. 아무리 사명감이 있다고 하더라도, 자신이 하는 일에 대한 보수가 이를 따라 주지 않으면 그 일에 참여하기 어렵다는 것이 이들의 생각이다. 기자들의 처우가 워낙 열악하다 보니 최소한의 생활조차 유지가 안 된다는 것. 이는 한 두 개의 한인 언론사의 일이 아니다. 대부분의 한인 언론들이 처우 문제로 인한 기자수급 문제가 심각한 상황에 처해 있다. 데이빗 김 <객원기자>
낮은 대우로 인해 지망성도 거의 없어
초기 이민세대부터 따지고 본다면 미주 한인언론의 역사가 벌써 1세기가 넘는다. 이민자들이 급속히 늘어 ‘제2의 물결’이라고 불리던 70년대부터 생겨난 한인 일간지는 40년 역사에 가깝다. 현재 LA지역의 중앙일보와 한국일보의 하루 지면 수는 160 페이지에 이르고 있다. 본국과 미주 지역을 모두 합해 이처럼 방대한 지면을 발행하는 한국어 일간지는 LA지역이 유일하다고 볼 수 있다. 이처럼 지면이 많은 이유는 광고지면이 많기 때문이다. 광고지면이 많다는 것은 신문사 수입과도 직결된다. 이들 일간지는 광고 수입(삽지 포함) 이외에도 구독료, 가판대 수입, 그리고 업소록 발간과 문화, 연예 등 행사와 사업 등을 합친다면 엄청난 수익을 올리고 있다. 때문에 일각에서는 이러한 일간지들을 ‘신문’이 아닌 ‘홍보지’라고 비판하기도 한다. 문제는 언론사의 수익이 늘어난다고 해서 언론사 기자들의 처우가 개선되거나 신문 자체에 대한 투자가 늘어나지 않는 다는 것에 있다. 수익을 올리는 만큼 기자들에 대한 처우개선이나 투자가 늘어나지 않는다면 이러한 비판은 계속될 것으로 전문가들은 보고 있다. 현재 미국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한인 일간신문사에 처음 입사한 수습기자가 받는 봉급은 월 2,200 달러 수준이다. 3개월의 수습이 끝나고 정식 기자가 되어도 봉급은 300달러가 더 늘어나는 정도다. 이후 1년이 지나고 소폭 인상되고 그 다음은 3년 정도 지나야 인상 수준이 달라진다. 코리아타운의 물가와 비교해보면 이러한 급여 수준이 얼마나 터무니없는 것인지 드러난다. 현재 코리아타운의 싱글베드 룸은 월 700-1000 달러를 오간다. 이것만해도 급여의 40% 수준이다. 여기에 식비나 통신비, 차량 유지비 등 다른 여타 생활비를 포함하면 여가비나 저축 등은 따로 생각하기 어려운 수준. 이러한 낮은 처우에 아랑곳하지 않고 사측은 더 많은 업무를 부과하고 있으며 ‘싫으면 나가라’는 식의 반응을 보이고 있다.
좋은 신문 만들기보다 수익 창출이 우선
올해 초부터 미주 중앙일보 지면에 실리는 사진수가 대폭 늘어났고 늘어난 사진의 대부분은 인물이 들어간 사진들이었다. 사진양이 늘어나다 보니 사진 기자들은 물론이고 취재기자들도 카메라를 가지고 다니며 촬영을 해야했다. 이렇게 신문 지면이 바뀐 것은 언론사 편집진에서 연구와 논의에 의해서가 아니라, 경영진에서 새해를 맞아 “신문에 여러 사람들이 나오게 하라”는 지시 때문. 한국일보의 상황도 이와 다르지 않다. 자신들이 벌이는 사업에 대한 기사는 특종 기사를 보도하듯 가능한 돋보이게 지면을 할애 하려고 한다. 최근 한국일보는 뉴욕 타임스와의 제휴를 대대적으로 홍보하면서 매주 수요일 뉴욕 타임스에서 발행한 별정의 신문을 ‘뉴욕타임스-한국일보 판’으로 독자들에게 배포하고 있다. 미주한국일보와 세계적인 권위지 뉴욕타임스와의 지면교류 협정은 한인 언론의 사명과 국제화 시대에 걸맞는 구실을 할 수 있게 됐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매우 크다고 볼 수 있다. 특히 뉴욕타임스라는 영문판은 앞으로 한인 1세와 2세들을 잇는 가교역할을 하게 될 뿐 아니라 미 주류사회를 더욱 이해할 수 있고 한인사회 이미지를 한 단계 더 끌어올리는 획기적인 계기를 마련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그러나 ‘미국 최고의 신문과의 만남’이라고 선전하는 이면에는 한국일보가 뉴욕타임스의 지명도를 빌려 사업을 더욱 강화하려는 의도를 엿볼 수 있다. 더 나은 신문을 많들겠다는 의지의 표출이라기보다는 더 많은 돈을 벌겠다는 것이다. 실제로 기사 제휴를 한다고 해서 한국일보의 기사가 뉴욕타임즈에 실리는 것은 아니다. 단지 뉴욕타임즈의 기사를 번역해서 주 1회 독자들에게 전달하는 것뿐이다. 한국일보가 뉴욕타임스의 지명도를 빌리려 했다는 것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미주 한인들의 목소리가 뉴욕타임즈 지면을 통해 미국 사회에 알려질 것을 기대했던 한인들의 기대와는 전혀 다른 것이라 볼 수 있다.
대형광고주 입김에 놀아나고 잇는 한인언론들
이민사회의 언론으로서 한인 언론의 또 다른 취약점은 대형 광고주의 입김에 언론 본래의 사명대로 대항하지 못하는데 있다. 광고주의 입김 때문에 커뮤니티가 반드시 알아야 할 권리를 찾지 못하는 경우가 다반사다. 경영진들은 ‘편집권의 독립’을 외치지만 실제로는 간접적인 영향력을 행사해 원천적으로 대형 광고주나 특정인사에 대한 부정적인 기사를 쓸 수 없도록 분위기를 조성하고 있다. 여기에는 경영진과 밀착한 일부 편집국 간부들의 행태도 문제가 될 수 있다. 커뮤니티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에 대해 제대로 된 검증을 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도 개선되어야 할 점이다. 기자들에 대한 근본적인 처우 개선이 이뤄지지 않고 편집국이 계속해서 광고국의 영향력 아래 있다면 한인 언론의 개혁은 앞으로도 요원한 일이 될 것이다.
언론의 자유를 위시해서 자유는 인간다움과 인간적 삶을 위해 반드시 보장돼야 할 지고의 가치가 아닐 수 없다. 다른 것을 명분으로 해서 자유가 제약될 경우 우리는 비인간적 억압과 유린을 경험하게 된다. 그러나 무제한적이고 무제약적인 자유는 진정한 자유라기보다는 방종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자유에 대한 정당한 제한과 제약은 어디서 오는가. 그것은 바로 자유 그 자체에서 오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자유는 자유 그 자체에 의해서 그리고 자유 그 자체를 위해서 정당하게 제한 혹은 제약될 수 있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나의 자유가 타인의 동등한 자유를 위해 제약되고 제한될 경우 그러한 제한과 제약은 정당화된다는 뜻이다. 이상과 같은 논리에서 자유나 권리는 의무나 책임과 상관개념으로서 성립하며, 그런 점에서 조건부 자유요 조건부 권리라 할 수 있다. 나의 자유나 권리는 타인의 동등한 자유 및 권리와 양립하는 한 인정될 수 있다. 이는 자유를 보장 받고자 하는 나의 권리가 상대방의 동등한 자유에의 권리를 보장할 의무와 책임을 함축한다는 것을 의미하며, 그런 한에서 나의 자유가 일정 정도 제약됨을 의미한다. 이렇게 해서 우리 사회의 성원 모두가 누리는 자유의 전 체계 혹은 자유의 총량이 최대화될 수 있는 것이다. 나아가 언론의 자유가 동시에 언론의 책임을 동반한다는 논거는 언론이 갖는 기능상의 이중성에서 유래되기도 한다. 언론매체는 야누스처럼 2개의 얼굴을 지니고 있다. 하나는 우리가 직접 접근하기 어려운 각종 정보와 사회적 환경을 가능한 한 정직하고 진실되게 보도하고 그에 따른 분석과 시비를 가리는 공기적 기능이다. 언론매체가 지닌 또 하나의 얼굴은 뉴스를 상품으로 이윤추구를 도모할 수밖에 없는 기업적 성격이다. 기업으로서 언론의 성공이 독자적 입장에서 자유로운 판단을 가능하게 하는 까닭에 이 또한 자유언론의 전제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동시에 언론의 기업화는 자본주의적 법칙에서 종속을 뜻하며, 그런 의미에서 언론의 타락을 결과할 수 있는 까닭에 이는 언론의 공기적 기능과 갈등관계에 있게 된다. 나아가 언론매체의 독과점 현상은 다원적 정보, 다각적 시각, 다면적 견해가 밀턴의 이른바 자유롭고 공개적인 아이디어의 시장을 형성하는 기반까지도 허물게 되는 지경에 이르게 된다. 그래서 혹자에 따르면 이제는 언론의 자유 여부가 아니라 언론의 횡포 여부가 문제라는 것이다. 선동적이며 선정적인 무절제한 폭로, 현안들에 대한 과장된 추측과 논평, 정확하지도 않고 심지어 사실무근한 보도와 논평, 사생활의 과도한 침해와 명예훼손 등은 분명 언론 횡포의 대표적 사례라 할 만하다. 자신의 치부나 과오에는 관대하고 남의 경우는 가혹하게 논평하는 관행, 오보나 과장보도가 확인된 경우도 정정에 인색한 것 역시 언론 횡포의 또 다른 사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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