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 촌로 이 후락 봄나들이 며칠 전 모 주간지에 위와 같은 제목의 기사가 있었습니다. 이 후락 씨는 박 정희 정권이었던 제3공화국 시절 대통령 비서실장과 중앙정보부장을 역임하였고 당시 실세 중에 실세였으며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던 분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3공화국 시절의 비화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인물일 것입니다. 이 후락 씨는 1972년 ‘7.4 남북공동성명’을 전후해서 평양에 박 정희 전 대통령 밀사로 파견되었습니다. 그 당시 밀사로 파견됐을 때 김일성 주석과 나눈 밀담내용과 밀사 파견과정 등은 아직까지 베일에 가려져 있습니다. 또한 중앙정보부장 시절인 1972년 박 정희 전 대통령의 장기 집권을 위한 유신 개헌을 주도했으며. 이에 대한 비화도 아직까지 수수께끼로 남아있습니다. 1973년 12월 해임된 이 후락 씨는 3공화국의 극비 문서를 챙겨 한때 해외로 도주했었습니다. 이후 박 정희 대통령과의 타협으로 국내에 다시 들어오긴 했지만 당시 들고 나갔던 3공화국 극비 문서의 내용은 아직도 의문으로 남아 있습니다. 이밖에도 ‘정 인숙 여인 피살 사건’ ‘김 형욱 전 중앙정보부장 실종사건’등 3공화국시절 미궁에 빠진 각종 사건의 열쇄를 쥐고 있는 장본인입니다. 이처럼 3공화국 시절 최고 권력의 핵심이었던 이 후락 씨는 역사의 산증인입니다. 특히 몇 년 전 김 종필 자민련 명예 총재는 “1973년 일본에서의 김 대중 납치사건은 당시 중앙정보부장인 이 후락의 단독 범행이었고 나와 박 정희 대통령은 전혀 몰랐다”고 주장한 바 있습니다. 하지만 이에 대해서도 이 후락 씨는 입을 열지 않고 있습니다. 어찌 되었건 이 후락 씨는 오랫동안 언론과의 접촉을 극도로 피해 왔습니다. |
한방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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