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년 北서 숨진 김계용목사 유산 北가족에 전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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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990년 9월 1일 당시 미주 이산가족 북한방문 차 50년 만에 북한(신의주 옆 구성시)을 방문했던 나성 영락교회 김계용 은퇴목사가 평양 도착 사흘 만에 심장마비로 사망한 사건이 벌어졌다. 이후 김 목사의 사망사인을 둘러싸고 20년 가까이 의혹이 계속되고 있는 가운데 최근 김 목사의 재산 중 10만 4천 여 달러가 북한 유족들에게 전달된다는 뉴스가 지난 보도돼 파문이 일고 있다.
1950년 6.25 전쟁 때 인민군으로 남한에 내려온 김계용 목사는 북한에 두고 온 처자식을 만나기 위해 북한을 방문했다가 의문을 죽음을 맞았다. 당시 북한은 김 목사의 사인을 심장마비에 의한 쇼크사로 발표했으나 독극물에 의한 피살설, 또는 행방불명 설이 꾸준히 제기 돼 왔다.
이번 발표 역시 석연치 않은 구석이 많다. 김 목사의 유산 문제를 담당해 온 LA소재 법률사무소 측에 따르면 18년 동안 김 목사 가족을 수소문한 끝에 평북 청주에 살고 있다는 사실이 확인돼 유산전달 절차를 진행 중이라고 밝혔다.
그러나 그 동안 북한을 방문했던 사람들에 다르면 김 목사 가족은 영락교회 관계자들과 계속 만남이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특별기고-배부전 미주통일신문 발행인>


미주동포 사회에서는 북한방문 중 사망한 사람의 경우, 그 유족이 북한에 있으면 사망자의 유산 등이 소정의 법적 절차를 밟으면 지급될 수 있다. 그러나 북한은 아직 미국과 수교가 되지 않았고, 이 같은 사례가 없었기 때문에 황당한 사건으로 치부될 수밖에 없다.
더욱이 김 목사의 재산을 북한가족에게 보내기 위해 18년 간 LA현지 변호사 등을 이용한 ‘세력’이 누구이며, 김 목사의 사망이 확실하지 않은 상황에서 (미주 통일신문 자체 탐문, 취재, 분석결과) 이 같은 사건이 언론에 보도됐다는 점이다.
지난 1일 <연합뉴스>는 ‘김 목사의 유산 처리를 담당해온 로스앤젤레스 소재 미 법률사무소의 배리 실버조사국장은 “지난 18년간 북한 내 가족을 찾으려고 수소문해온 결과 올해 가을 마침내 부인 이진숙(89) 씨와 아들 김광훈(61) 씨가 평북 정주에 살고 있음을 알게 됐다”며 “최근 평양 고려법률사무소로부터 가족증명을 확인하는 제반 서류를 전달받았다’고 보도했다.
상식대로라면 김 목사의 북한가족을 찾는데 걸리는 시간은 불과 몇 시간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다면 어째서 1990년 9월 1일 사건이 2008년 12월 1일에 재론되느냐는 것이다. 이 문제는 미국 법무부 등 주요 당국에서 유권해석을 내릴 예정이다. 하지만 판례가 없는 미국-북한 간의 민법상 상속문제가 불거진 배경을 놓고 갖가지 설들이 난무하고 있다.
현재 미 법률사무소 측은 유산의 45%를 수수료로 뗄 것(유가족 지급액은 55%)을 원하고 있으나 북측은 유가족에게 75%를 지급(미 수수료는 25%)해 줄 것을 요구해 양측이 팽팽히 맞서고 있다.
김 목사의 유산이 북한의 가족에게 전달되는 것은 남북분단 이후 극히 드문 사례다. 유가족들이 거주하는 평북 정주시의 김희숙 인민위원장의 확인서에 따르면 김 목사는 1990년 8월25일 북한 신의주를 방문했다가 9월1일 사망했다. 사인은 급성심장기능 부전증으로 기재돼 있다.
한 관계자는 “일정기간 내 유산상속 가족을 찾지 못하면 유산은 자동으로 미국 정부재산으로 귀속하게 되지만 북한은 폐쇄국가라 접촉할 수 없는 특수사정 때문에 정부에서도 계속 시간을 연기해줬다”고 전했다.



 


김 목사 사망경위와 생사확인 필요














미주통일신문의 자체 판단은 김 목사가 살아있다는 것이다. 현재까지 그의 생존을 장담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1990년 당시는 죽지 않았다는 게 일관된 분석 탐문 결과다.
김계용 목사는 나성영락교회에서 정년 은퇴한 후, 캐나다에서 시무하던 박희민 목사를 청빈, 후임자로 결정하고 소일 하던 중 본국의 노태우 대통령은 소위 ‘우회로를 통한 북한접근 전략’에 따라 해외동포들에 국한, 이산가족 북한방문을 허용했다. 그것이 [7.7 선언]이다.
당시 나성 영락교회에 다니는 교인은 대부분 이북 출신으로 이산가족들이 많았다. 그들은 본국 정부 방침 이전부터 캐나다, 북경을 통해 극비리에 방북해 가족을 만나고 돌아와 방북자들 간의 친목단체도 구성했으며 암묵적으로 북한에 달러 등을 보내 문제가 불거지기도 했다.
이런 가운데 북한에 가족을 둔 이산가족들 중 핵심 프락치들이 북한의 지령을 받아 김 목사에게 접근, 방북을 회유했다. 이들은 “목사의 아들이 군 장성이고, 딸은 의사”라고 속여 마음을 흔들었다. 김 목사는 당시 미주이산가족 방북 등을 주도한 홍동근 목사(사망)팀에게 방북신청서를 제출했다.
1990년 8월 15일경 코리아타운 소재 모 식당 입구에서 김 목사와 우연히 만난 기자는 “목사님, 북한에 가신다던데요. 언제 가십니까?”라고 물었다. 당시 목사는 “아직 오라는 연락이 없다”며 자리를 피했다. 이 대화가 기자와 목사의 마지막 만남이었다.
김 목사는 매년 되면 기자를 불러 200~300달러 격려금을 건네곤 했다. “반공신문을 만든다고 수고 많다”는 뜻의 격려 차원에서의 지원이었다. 이 짧은 만남 뒤 김 목사는 1990년 8월 28일 LA공항을 출발, 평양에 도착했다.
그러다 사흘 뒤인 31일 오후 4시 경 영락교회 집사 정동철 씨가 기자에게 전화를 걸어 충격적인 사실을 알렸다. 당시 본사 비상근 부사장으로 근무하던 정 집사는 “김 목사님이 평양에서 돌아가신 것 같다. 지금 교회 안에서 긴급회의가 열릴 예정이다. 북한에서 목사님을 죽인 것 같다”고 말했다.
그 날 교회 측은 오후 6시경 기자들에게 김 목사의 ‘심장마비 사망’ 소식을 알렸다.


김목사 죽음이 타살로 추정, 탐문 등 취재 착수 


기자는 먼저 김 목사를 방북하도록 유인한 ‘세력’ 확인에 초점을 맞추었다. 그 결과 교회 내 친북세력인 모 장로들이 개입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또 김 목사에게 북한 행 티켓을 제공한 여행사가 영락교회 집사인 당시 LA고려 여행사 사장 A씨 것으로 밝혀졌다.
기자는 A씨에게 김 목사가 당시 어떤 일행과 함께 방북했는지 물었다. 그러나 A씨는 “김 목사 혼자 북한에 들어갔다”고 답했다. 당시 친북한계 1급 목사인 홍동근 목사로부터 이 같은 지령을 받았다는 것이다.
당시 중앙일보 소속으로 신분을 속이고 홍 목사에게 전화를 건 기자에게 홍 목사는 김 목사가 혼자 북한에 머물렀다는 사실을 확인해 줬다.
홍 목사는 “김 목사가 순안 비행장에 내렸을 때 혼자 온 것은 사실이다. 마중 나온 사람이 없어 혼자서 오랫동안 공항에 머물렀다. 그때 해외동포원호 위원회에서 안내자를 보내지 않은 이유는 나도 잘 모른다”고 말했다.
그는 “기자가 북한을 잘 모른다. 북한은 남한처럼 사람들이 마음대로 공항에 나가지 못한다. 당의 지시를 받아야 한다”고 말했다.
기자는 다시 북한 고려호텔에서 김 목사를 만난 것으로 알려진 나성영락교회 김광은 장로에게 전화를 걸었다. 김 장로는 “김 목사를 만났다. 그 때 그가 아주 불안해 보였다. ‘평양에 잘못 온 것 같다’는 말도 했다”고 증언했다.
그러나 김 장로는 북한 간부들이 김일성 수령과의 만남을 이유로 김 목사에게 동행을 명령한 사실에 대해서는 굳게 입을 다물었다. 그는 “더 말할 수 없다. 나도 이북에 친척들이 있어서 내가 말을 잘못하면 그들이 다친다. 그런 말을 얼핏 듣긴 했으나 모르겠다”고 답했다.
본지가 또 다른 제보자를 통해 확인한 김 목사 관련 사항에 따르면 김 목사는 당시 살해됐거나 북한 당국에 의해 행방불명됐을 가능성이 높다.
2004년 LA거주 김구 목사 등이 본지에 제보한 내용 등은 이 같은 주장에 설득력을 높인다. 그는 “김 목사가 죽지 않았다. 신의주에 있는 병원에서 살아나 평양으로 끌려갔다. 중국 한족 신문사 기자들을 통해 신의주 지역엔 이런 소문이 다 퍼져있다. 김 목사 무덤도 가짜다”고 말했다.
이듬해 탈북자 박남진씨 역시 비슷한 제보를 했다. 박씨는 “김 목사가 신의주 군관용 병원에 있었다. 간호원이 김 목사가 있는 병실에 들어갔더니 병원 침대에 수갑으로 손이 묶인 상태로 애처로운 표정을 지었다고 했다”고 말했다.



 


김 목사 생존가능성도


이제와 같은 제보와 진술을 종합할 때 북한은 김계용 목사가 평소 반공설교를 해온 것을 이유로 포섭한 것으로 보인다. 북한 당국은 나성영락교회를 아지트화 하려 했던 목적이 실패하자 제거방침에 따라 심장마비를 가장해 쇼를 했으며, 목사는 평양 정치보위부 등에 압송돼 총살됐거나 수용소에 투옥된 것으로 추측된다.
당시 김 목사가 점심 먹은 후 화장실에 갔다 오자마자 아내의 품에 안겨 쓰러진 것은 심장마비가 아닌 음식물에 투입된 독극물로 인한 것이라는 게 증인들의 일관된 주장이다. 당시 북한을 방문한 미주 한국일보 이모 기자(현재 퇴사)가 직접 김 목사 부인 이진숙씨를 만나 인터뷰한 결과도 같다.
이씨는 이 같은 사실을 기자에게 발설했다는 죄목으로 역시 총살된 것으로 보인다. 김 목사의 점심에 독극물을 투입한 사람은 그의 아들 김광훈씨로, 당의 명령에 따라 ‘미제국주의 물을 먹은 인민군 탈영병’을 처단한다는 명목으로 저질렀을 가능성이 높다.
특히 본지는 김계용 목사가 점심을 먹는 시간에 병원 엠블런스가 집 앞에 대기했었다는 정보도 입수했다.
즉 김 목사 유산 북한 유족 송금 문제는 LA변호사 팀들이 평양에 가서 그 가족들을 직접 만나지 않고 사진-서류만으로 결정하면 안된다는 것이다. 관련 공작이 18년 간 꾸준히 진행된 사실을 볼 때 이 같은 작업을 한 자가 누구인지를 확인할 필요가 있다.
관련 자금은 북한 로동당이 달러착취 차원에서 나성영락교회 내부 친북한 세력을 이용했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김계용 목사는 한국전쟁 때 인민군으로 잡혀갔다가 남한으로 도망, 가족을 북에 두고 독신으로 살아가다 미국으로 건너간 인물이다. 그는 1974년 3월10일 LA 영락교회 담임목사로 부임하면서 신도 5,000여명의 초대형 교회로 성장시켰다. 노태우 대통령 때 재외동포의 북한방문이 허용되자 1990년 방북 길에 올랐다가 8월25일 급성심장기능 부전증으로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지만 지금까지 독살설 또는 생존 가능설이 대두되어 왔다.
김 목사의 유산 처리를 담당해온 로스앤젤레스 소재 미 법률사무소의 배리 실버조사국장은 “지난 18년간 북한 내 가족을 찾으려고 수소문해온 결과 올해 가을 마침내 부인 이진숙(89) 씨와 아들 김광훈(61) 씨가 평북 정주에 살고 있음을 알게 됐다”며 “최근 평양 고려법률사무소로부터 가족증명을 확인하는 제반 서류를 전달받아 오랫동안 미해결로 남아있던 김 목사 유산 정리 문제를 마무리 짓게 됐다”고 밝혔다.
미주 한인 교계에서 선구자적 역할을 했던 고 김 목사의 유산은 현금만 10만 4천 달러이며 그의 몫으로 남아있는 저택에 대해서는 아직 구체적인 언급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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