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한인은행의 새진로 “한인은행들, 청빈정신으로 새로 태어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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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새해 한인경제의 젖줄을 담당하는 한인은행들이 새진로를 모색하고 있다. 하지만 미국을 포함해 전세계에 몰아친 경제위기는 아직 호전될 기미는 보이지 않고 있다. 하지만 커뮤니티 은행으로서 한인은행의 사명은 한인경제의 주춧돌 역활이기에 그 어느 때보다도 중요하다.
2009년 새해에 한인은행이 대대적인‘도전’과‘변화’를 이룩 하지 않고서는 살아 남기가 힘들게 됐다.
한인은행들은 지난 2008년 호된 곤욕을 치루었다. 그러나 이같은 곤욕은 누구나가 당하는 경기 침체기 파장 때문만은 아니라는데 문제가 있다. 바로 한인은행들만이 유독 지니고 있는 문제점이라는데 고민이 있다. 이 문제점은 한인은행권이 신용을 잃고 있다는 것이다. 은행이 신용을 얻지 못하면 한마디로 은행이라고 할 수 없다.
이 중 가장 큰 사건은 한인계 여러은행들에서 발생한 은행금고 현찰 절도사건들이다. 한미은행 지점에서 시작해 도미노식으로 번진 사건은 급기야 새한은행 지점에서 100여만 달러에 달하는 절도 사건은 코리아타운을 크게 놀라게 만들었다. 모든 사람들은 “일어나서는 안될 사건”이라고 말하고 있다. 본보는 2009년 새해 한인은행계의 분골쇄신을 위한 방안의 하나로 한 원로 은행가의 조언을 구했다. 원로 은행가의 조언은 간단 명료했다. “우리민족의 청빈 정신을 거울 삼아 초심과 새로운 창업정신으로 제2의 한인은행 도약을 이끌어 내야한다” 였다.


                                                                                       인터뷰: 성진 취재부 기자
 
지난 60년동안 한결같이 정직한 은행가로 평가를 받아와 “미주 한인은행계의 대부”로 알려진 정원훈 전행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은행장을 지낸 사람으로 먼저 부끄럽습니다”고 말 문을 연 정 전행장은 화제가 은행금고 절도사건에 이르자 “내 60년 은행 생활을 통해 들었던 가장 충격적인 사건”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야기를 나누는 도중에도 여러 번 “충격”이란 단어를 떠올렸다. “아주 충격이었다” “매우 충격적이었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충격이었다”고 말했다. 그만큼 금고절도사건은 그에게는 ‘믿기가 어려웠던’ 사건이었다.
정 전행장은 지난동안 한인은행들에서 발생한 대형부실 사건에서부터 은행창구에서 나타난 소소한 일들까지 모두가 ‘도덕적 불감증’에서 비롯됐다고 단정했다.
미주 최초의 현지은행인 가주한국외환은행장을 포함해, 한미은행장, 새한은행장, 아시아은행장 등을 두루 거치고 지난 2001년에 현직에서 은퇴한 정 전행장은 “은행과 관련된 사건에서 누구보다도 행장들의 책임이 가장 크다”면서 “지금까지 불미스런 사건이 발생해도 책임을 지는 행장이 나타나지 않는다는 점이 가장 문제”라면서 이를 ‘도덕적 해이’라고 지적했다.
지금까지 여러 불미스런 사건이 은행가에서 발생해도 사과표명이나 재발방지에 대한 은행측의 책임있는 자세가 보이지 않은 점도 모두가 ‘도덕적 불감증’이라고 단정했다. 그만큼 은행의 이사회나 경영진들이 제구실을 하지 못하고 있다는 증거라는 의미다.
정 전행장은 오늘날 한인은행의 불법 편법 부정사건들이 연달아 발생할 수 있던 여건에 대해 한인 커뮤니티와 한인 언론에도 책임이 있다고 지적했다. “동포사회가 잘못을 너그럽게 봐주는 것은 이해할 수 있지만 이를 계속 봐주는 것은 결과적으로 은폐를 도와주는 것이 된다”고 그는 말했다. 이어 그는 “다른 분야보다도 금융권의 문제는 단호한 대책이 앞서야 한다”면서 “은행은 신용이 생명이다”라고 강조했다.



행장들의 위선


정 전행장은 대부분 언론들이 사건 발생시 책임이 있는 사람들의 실명을 보도하지 않은 점이 결과적으로 또 다른 범죄를 만드는 계기를 만들고 있다고 지적하면서 “신문이나 방송에서 책임자의 이름을 분명히 밝혀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언론 보도에서 가끔 뱅커들이 ‘손님하고 점심만 먹었다’면서 자신들의 ‘깨끗함’을 강조하는 대목을 읽고 들어왔지만, 결과적으로 부실을 남기고 떠나는 행장이나 고위직들이 과연 ‘깨끗했는가’ 에 의문을 느낀다고 말했다.
은행의 행장이나 고위직들은 행원들을 지도함에 있어 무엇보다도 자기자신들의 도덕성을 확보해야 한다는 것이 원칙이라는 것이다. 그는 “행원들의 움직임을 항상 세밀하게 살펴야 한다”면서 의심의 눈초리가 아니라 배려의 눈길로 행원들이 올바른 몸가짐을 지니는데 관심을 갖는다면 자연히 잘못된 점이 눈에 들어 온다는 것이다. 모든 일에 있어 예방이 가장 좋다는 조언이다.
정 전행장은 대화에서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가장 강조한 것은 ‘도덕적 불감증’을 해소하지 않는한 한인은행의 부조리는 결코 해결되지 않고 되풀이 될 뿐이라는 사실의 강조였다. 그림을 그리며 조용히 살고 있는 그에게까지 “호스트바에 여성 은행 간부들이 드나들고 있다”라는 소문까지 들을 때는 한 때 은행장을 맡았던 자신이 “너무나 부끄러웠다”고 토로하기도 했다.
아이너리컬하게도 정 전행장이 심혈을 기울려 이룩한 은행들이 초심을 잃고 교만에 빠져 오늘날 문제를 일으키고 있다. 한미은행과 새한은행이 본보기다. 한미은행은 한인사회의 최대은행이지만 각종 대형부실사건과 경영문제로 지금 생사기로에 빠져있다. 새한은행은 원래 2009년 올해 상장은행으로 도약하는 계획을 목표로 세워 최근의 경기침체 와중에도 불과 한달여만에 해낸 1,520만달러의 성공적인 자본금 증자로 한인사회의 믿음을 과시했다. 그러나 최근에 터진 은행내부 직원들에 의한 금고 현찰 정도 사건으로 창립 이래 최대위기에 봉착했다.
지난 1974년에 가주한국외환은행장으로 취임한 정 전행장은 설립 2년째부터 이익을 내어 미국 은행가에서도 그의 이름이 화제가 됐다. 이를 본보기로 순수 동포은행을 육성하자는 취지에서 한미은행을 설립하기로 하여 동포실업인들과 의기투합해 3년의 준비기간 동안 심혈을 기울려 1982년에 설립했다. 이 당시 기금을 출연한 이사들은 순전히 정 전행장의 ‘크레딧’을 보고 투자했다.
그는 물러날 때를 잘 아는 은행가였다. 87년에 한미은행을 떠나 88년에 새한은행을 설립, 91년에 초대행장을 맡았다가 기틀을 잡아주고 떠나서 99년 아시아나 은행을 설립해 초대행장을 맡았다가 2001년 은행가에서 완전히 은퇴했다.
지금은 서예와 화폭에 남은 여생을 보내고 있다. 그간 틈틈히 인생역전을 글로 옮겨 최근 은행생활 60년을 회고하는 ‘은행 60년: 거울 앞에 돌아와’를 발간했다. 이번 회고록은 그자신이 몸담았던 미주 한인은행계의 태동과 성장을 기록해 역사적으로도 귀중한 문헌적인 가치가 있는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또 회고록은 그의 인생의 전부라고 할 수 있는 은행 생활을 정리하고 후배 은행인에게는 선배로서의 조언을 해주고 싶었다고 했다.
새해에는 ‘도덕적 불감증’에 빠져있는 한인은행가에서 한번쯤 원로 은행가를 찾아 고견을 듣는 것도 ‘도전’과 ‘변화’를 추구하는 한인은행권이 필요할지도 모른다.






정원훈 ‘한인은행가의 대부’






21세 청년 시절에 은행에 입사해 한국과 미국에서 만60년을 은행가로 활동하다가 지난 2001년 은행권에서 완전히 은퇴한 정원훈(87) 전행장은 행콕팍 자택 화실에서 여유로운 마음가짐으로 그림 그리기에 여념이 없다.
그는 한국에서 은행원으로 근무할 당시는 바쁜 업무 때문에 이를 위핸 시간을 내기 어려웠으나 지난 1973년 LA의 가주외환은행 행장으로 발령을 받아 미국으로 오면서 본격적으로 미술을 배우기 시작했다. 74년에는 UCLA와 오티스 아트 칼리지에 나가 본격적으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요즈음도 주로 자택 아트리에서 그림을 그리고, 때로는 서예도 쓴다. 그리고는 틈틈히 글도 적어 나간다.
80대 노익장을 과시하는 듯 동심까지 얼굴에 어려 있는 정 전 행장은 그이 나이 21세 때1941년에 경성고상(현 서울대 상대의 전신)을 졸업하고 입사한 만주중앙은행이 그의 60년 금융인생의 출발점이었다. 평북 철산 출생인 정 전행장은 한국전쟁 중에는 한국은행으로 자리를 옮겨 전무까지 오르며 한국 은행계의 발전을 위한 초석을 다졌다.
그는73년 미국에 와서 한인사회 최초로 설립되는 가주외환은행의 초대 행장을 맡았다. 지난 74년 자본금 300만달러로 가주외환은행이 설립됐다. 그는 이 은행을 설립 2년만에 이익을 낼 정도로 리더십을 발휘했다. 그러나 가주한국외환은행은 한국정부의 영향력으로 설립된 현지법인으로 동포사회의 이익을 대변하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그가 79년 가주외환은행장을 떠나면서 동포사회에서도 순수동포 은행의 설립을 꿈꾸기 시작했다. 이같은 꿈의 중심에는 정원훈 전행장이 있었기 때문이다. 불과 300만달러로 가주외환은행이 그가 떠날 때 3개의 지점망과 자산 8900만달러에 자본금은 1000만달러가 넘었다.
동포사회는 1968년에 남가주 거류민회 초대회장을 지냈던 조영삼씨 등이 은행설립을 꾀하다가 흐지부지 됐고, 70년대에는 세이빙스& 론을 창설하자고 12명의 인사들이 당시 1500달러씩을 거둬 경제학자를 초빙해 은행 창설을 검토하다가 돈만 떼인적이 있었다. 1973년부터 타운에서 비즈니스를 하던 50명이 ‘나우회’라는 클럽을 하면서 소규모 융자회사 설립을 추진한 적이 있으나 결실을 맺지 못했다.
이러한 환경에서 1979년 정 전행장을 중심으로 동포은행 설립이 본격적으로 추진되어 결국 한미은행의 창설을 이룩했다. 이어 그는 새한, 아시아나 은행 등의 초대 행장을 거치면서 한국에 이어 미주한인사회 은행계의 기반을 다지는데 기여했다. 은퇴 후에는 남가주한인미술가협회와 미주한인서예협회 정회원으로 수차례 개인과 단체전을 갖기도 했다.
 


◆정원훈 전행장 약력


▲20년 평북 철산 출생
▲40년 경성고등상업학교 졸업(서울대 상대 전신)
▲58년 매사추세츠주 클라크대 경제학 석사
▲41년~45년 만주국 중앙은행 근무
▲47년~50년 저축은행(제일은행의 전신) 론 오피서
▲50년~67년 한국은행 조사•국제부장, 전무
▲66년~72년 한국외환은행 창립멤버•전무
▲74년~79년 가주외환은행 설립•초대행장
▲79년~80년 가주외환은행 고문
▲80년~87년 한미은행 설립•초대행장
▲87년~88년 한미은행 고문
▲88년~96년 새한은행 설립•초대행장
▲99년~2001년 아시아나은행 설립•초대행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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