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여권의 화두는 단연 ‘박근혜’다. 4·29 재보선 패배 후 한나라당 지도부는 ‘김무성 원내대표 카드’를 앞세워 ‘구애’ 작전을 폈지만 박근혜 전 대표의 반응은 싸늘했다. 당 화합책으로 내놓은 김무성 카드는 외려 갈등을 증폭시키는 매개체가 됐고, 결과적으로 친이·친박계의 오랜 상처만 헤집어 놓은 셈이 됐다. 박 전 대표는 지난주 미국 현지에서 가진 기자 간담회에서 “친박이 당에 발목을 잡은 일을 한 게 뭐가 있느냐”고 직격탄을 날렸고, 이 한 마디로 당은 발칵 뒤집혔다. 지도부 책임론에 이어 조기 전당대회론, 원내대표 경선 연기론까지 불거졌다. 박 전 대표의 위력이 다시 한 번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박 전 대표가 주류계에 대립각을 세운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지난해 공천 파동 때 “국민도 속았고 나도 속았다”, 올 초 ‘입법 전쟁’ 때는 “국민을 위한다는 법안이 오히려 국민에게 고통을 주고 있다”, 이상득 의원의 ‘사퇴 종용’ 파문 때는 “우리 정치의 수치”라고 했다. 결국 한나라당의 열쇠는 ‘이심(李心)’과 ‘박심(朴心)’인 셈이다. 박 전 대표가 대립각을 세운 것은 청와대와 주류계에 대한 뿌리 깊은 불신 탓이라는 게 정설이다. 하지만 어떤 화해의 제스처를 취하더라도 박 전 대표가 주류계와 손을 맞잡기는 어려울 것이라는 관측도 적지 않다. <한국지사 = 박희민 기자>

박근혜의 몽니
이는 물론 차기 대권 행보와 연관된 해석이다. 차기를 보장받지 않는 이상 당 주류계와는 함께 할 수 없는 ‘2인자의 숙명’이 아니겠느냐는 것이다. 이에 대해 정치권에선 “조기 레임덕에 빠질 이 대통령이나 언젠가 모래성처럼 무너질 친이그룹과 동행하지 않아도 집권할 수 있다”는 박 전 대표의 강한 자신감이 이번에 확실하게 드러난 것이라고 분석한다. 정치권에서는 여의도 정치에 관한 한 언제나 마뜩치 않게 생각해오던 이명박 대통령이 4·29 재보선 참패 뒤 박희태 대표와의 회동에서 “선거(재보선 참패)는 이번에 우리 여당에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겸허하게 받아들여야 한다”라며 자신의 몸을 바짝 낮춘 것을 상당히 이례적으로 보고 있다. 특히 이 대통령이 ‘이번 선거에서 친이 주류와 박 전 대표 진영 간의 분열이 참패의 원인이고 그 원인을 치유하지 않고 방치할 경우 국정을 진전시키기 어렵다’는 인식을 드러냈다는 점에서 향후 대 친박그룹 전략에 대폭 수정이 있을 것임을 시사하는 대목으로 받아들이고 있기도 하다. 이런 관점에서 ‘김무성 원내대표 추대안’ 수용은 이 대통령 인식 전환의 첫 번째 사례로 볼 수 있다. 하지만 여전히 이 대통령의 ‘진정성’이라는 문제가 남는다. 이 대통령이 불과 며칠 사이에 그동안 취해왔던 친박그룹에 대한 ‘고집’을 꺾었는지에 대해선 회의적인 반응이 압도적이다. 오히려 어떻게 해서든 4·29 재보선 패배로 촉발된 ‘봉기’ 수준의 당내 반란을 최대한 눌러놓아야 원활한 국정 운영과 함께 조기 레임덕도 피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이번 이 대통령의 ‘양보’는 진실한 화해가 아닌, 급한 불부터 끄고 보자는 얄팍한 잔꾀라는 것이다. 친박그룹의 한 관계자는 이에 대해 “재보선에 참패한 뒤 불과 며칠 사이에 이 대통령은 김무성 의원에 대한 원내대표 추대안을 수용하는 모양새를 취하며 당내 분란을 수습하고자 했다. 하지만 이 대통령이 진심으로 친박그룹을 배려하려 했다면 좀 더 ‘소통’의 시간을 가져야 했다. 정말 진정성이 있었다면 친박그룹의 다양한 의견을 들으려는 노력을 했어야 했다. 심지어 박 전 대표도 ‘김무성 카드’안을 공식적으로 통보받지 못한 상황에서 어떻게 이 대통령의 진정성을 받아들일 수 있겠느냐. 이런 무책임한 이 대통령의 행보를 박 전 대표는 도저히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라고 말했다. 박 전 대표의 이런 이 대통령에 대한 불신은 결국 김무성 카드를 단박에 차버린 것으로 표출됐다. 그가 김무성 원내대표 추대론을 반대한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다. 먼저 급조한 것이 뻔해 보이는 김무성 카드를 거절함으로써 이 대통령에게 더 큰 양보안을 요구하는 압박용으로 작용할 수 있다. 박희태 대표는 자신이 주도한 김무성 원내대표안을 포함한 쇄신작업이 박 전 대표에 의해 ‘거절’당하면서 소장파에 의해 조기퇴진 압박을 받고 있다. 친이계 한 중진의원은 “‘김무성 카드’가 날아가 결국 한나라당이 ‘두나라당’으로 가게 생겼다”라고 말했다. 박 전 대표의 ‘몽니’가 분당론으로까지 치닫고 있는 형국이다. 이는 이명박 정권이 화합을 통해 안정적인 제2기 국정 운영을 해보려는 시도 자체가 물 건너가게 된다는 점에서 심각한 분란 사태다. 이번에 박 전 대표가 김무성 카드를 거절함으로써 그의 대권 전략 일단을 보여주었다는 분석도 있다. 박 전 대표로서는 김무성 의원이 이번에 원내대표가 될 경우 내년 지방선거까지 이 대통령과 한배를 탈 수밖에 없다. 공동책임론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얘기다. 그동안 계속 박 전 대표 측은 “전면에 나설 시기가 아니다”라며 이 대통령의 국정 운영에 방관자적 태도를 취해 왔다. 이런 점에서 박 전 대표는 적어도 내년 지방선거 전까지는 계속 이 대통령과 ‘불가근불가원’의 거리를 유지한다는 대권 전략을 세운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또한 이번 김무성 카드 거부는 대권 후보로서 박 전 대표의 ‘커밍아웃’ 시기가 지방선거 이후에도 계속 늦춰질 가능성을 높여주는 대목이다. 박 전 대표의 이번 ‘몽니’는 친박그룹의 독자적 힘으로 대권을 쟁취할 것임을 천명한 것이기도 하다. 여기에는 이명박 대통령이 지방선거를 기점으로 조기 레임덕에 빠질 것이라는 나름대로의 계산이 깔려 있다. 또한 ‘친목단체 수준’(정몽준 최고위원 표현)의 응집력을 보여주고 있는 여당 주류, 특히 친이그룹은 이 대통령의 조기 레임덕과 함께 모래알처럼 흩어져 공중분해될 것을 예상하고 계속 마이웨이를 외치고 있는 것이다.

박근혜의 고민
그러나 주류계와 선을 긋는 박 전 대표로서도 고심이 없을 수는 없다. 미래가 확실히 담보되지 않은 상태에서 선뜻 협조하는 모양새를 취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대립각만 세우자니 정치적 부담이 고민이다. 박 전 대표의 딜레마는 과거 3당 합당 시절 김영삼(YS) 당시 민자당 대표가 처한 상황과 유사하다. YS는 소수파라는 태생적 한계를 안고 있었다. 하지만 YS는 위기 때마다 승부수를 띄웠고 이 같은 전략은 적중했다. 현안마다 자기 목소리를 확실히 내면서 강한 인상을 심어준 것이 주효한 것이다. YS는 1992년 총선 참패 뒤 ‘정부 책임론’을 들고 나왔고 ‘킹 메이커’ 김윤환 의원을 비롯한 민정계 일부까지 끌어안으면서 결국 후계자로 낙점받았다. 여론을 등에 업고 꾸준히 주류를 압박한 끝에 얻어낸 성과물이다. 이는 지금까지 박 전 대표의 행보와도 유사한 대목이다. 다만 YS는 자신을 “민자당 후계자로 지목해 달라”며 합당 직후부터 노 전 대통령을 흔들었다는 점이 박 전 대표와는 다소 다른 점이다. YS는 처음부터 차기 보장에 대한 요구를 숨기지 않았지만, 박 전 대표는 차기 대권에 대해서는 ‘침묵’을 지키고 있다. 하지만 YS가 대선을 1년 앞둔 1991년 ‘후보 조기 가시화론’이라는 카드를 빼들어 노 전 대통령을 압박했듯이 박 전 대표도 ‘때’만 무르익는다면 이와 유사한 행보를 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그렇다면 ‘그때’가 언제냐 하는 것도 중요한 대목이다. ‘타이밍’에 대해서는 친박계 내부에서도 의견이 엇갈린다. 김무성, 홍사덕 의원을 비롯한 구주류는 지금부터라도 차기 대권 행보를 시작하자는 입장이다. 지난 대선 경선 때 패인 중 하나가 ‘캠프’를 조기에 가동하지 못한 데 있는 만큼 차기 행보를 서둘러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친이계와도 일정 부분 협력할 필요가 있다는 게 이들의 인식이다. 구주류계의 한 핵심 인사는 “대망(大望)이 있다면 바로 나서야 한다”며 “대선에서 지고 나서 바로 차기 캠프를 가동했어야 했고 지금이라도 준비를 시작해야 한다”고 말했다. 반면 이성헌·유정복·이정현 의원을 비롯한 신주류는 조기 행보에 회의적이다. 이들은 친이계와 거리를 유지하면서 ‘원칙’과 선명성을 앞세워 차별화 전략에 무게를 두는 모습이다. 이성헌 의원이 지난 11일 최고위원회의에서 “지금 조기 전당대회 이야기가 나오는 것은 비 오는 날 개구리가 뛰는 격”이라며 “문제의 본질은 청와대”라고 비판한 게 대표적 사례다.
내년 지방선거가 분수령될 듯
현재까지만 놓고 보면 박 전 대표의 생각은 구주류보다는 신주류와 가까운 셈이지만, 내년 지방선거를 전후해 본격적인 대권 행보에 시동을 걸 것이라는 관측도 적지 않다. 이 경우 협력이든 적대든 이명박 대통령과의 관계도 분명해 질 것이라는 전망도 나오고 있다. 하지만 박 전 대표의 ‘대립각’ 행보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도 만만치 않다. 박 전 대표는 한나라당 내 양대 축인 만큼 싫든 좋든 당내 화합의 당사자가 될 수밖에 없고, 국정 책임을 공유해야 한다는 지적이 친이계는 물론 소장 개혁파 사이에서 나오고 있다. 친이계 심재철 의원은 한 라디오 인터뷰에서 박 전 대표와 이상득 의원, 이재오 전 최고위원을 거론하면서 “당을 이끄는 사람을 선출할 때는 모두가 당원들의 심판을 제대로 받아야 한다”며 “무택대고 2선에만 머물러 있을 수는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공성진 최고위원은 지난주 김무성 카드 무산 직후 “공은 이제 친박계로 넘어갔다”며 “화합책은 이제 친박계에서 내놓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소장파 모임 ‘민본21’ 간사인 김성식 의원도 당내 계파 갈등과 관련해 “서로 책임 전가식으로 할 게 아니라 국민이 바라는 국정 쇄신과 당 쇄신, 화합의 길로 갈 수 있도록 다시 정돈을 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천신일(66) 세중나모여행 회장과 박연차(64) 전 태광실업 회장은 `의형제’로 불릴 정도로 특별히 가까운 사이라는 건 이미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두 사람 모두 경남 밀양 출신인 데다 박 전 회장이 30여년 전 부산 사상구에서 가내수공업 규모의 신발공장을 시작했는데 이 공장이 우연히 천 회장의 집 옆이었다고 한다. 성실하긴 했지만 아무런 기반이나 도움없이 신발사업을 시작한 박 전 회장을 딱하게 여긴 천 회장은 자신의 땅을 떼주는 등 여러모로 어려운 사정을 봐줬다고 전해진다. 애초 박 전 회장은 동갑내기인 천 회장의 동생과 친분이 깊었는데 이 동생이 갑자기 숨지자 장지까지 찾아가 천 회장에게 “제가 대신 친형으로 모시겠다”고 했고, 이에 감동한 천 회장은 이때부터 두 살 어린 박 전 회장을 친동생처럼 여겼다. 천 회장이 1997년부터 지난 1월까지 대한레슬링협회 회장을 맡았을 때 박 전 회장은 이 단체 부회장으로서 보좌했고, 태광실업이 인수한 휴켐스의 사외이사직을 흔쾌히 수락한 이도 천 회장이었다. 이 같은 형제적 관계로 볼 때 박 전 회장이 국외로 출장을 갈 때마다 세중나모여행사(합병 전 세중여행사)만을 이용한다거나, 두 사람이 의심을 받을 만한 주식거래를 했다는 사실은 이상한 일이 아닐 수도 있다. 태광실업을 일으켜 부산ㆍ경남 지역에서 이름을 알린 지역 사업가였던 박 전 회장이 `전국구’ 유명인사로 부상하게 된 배경에 천 회장 인맥의 도움이 컸다는 소문도 있다. 박 전 회장의 든든한 형님이자 후원자인 천 회장은 이명박 대통령과 고려대 61학번 동기생으로 과는 달랐지만 친구사이였고, 특히 3공화국 초기 한일 국교정상화 반대 시위를 함께한 `6ㆍ3 동지’로 알려져 있다. 천 회장은 1982년 세중여행사를 세운 뒤 뛰어난 사업수완으로 국내 경제계에 영향력을 미쳐왔을 뿐 아니라 정.관계에도 폭넓은 인맥을 자랑한다. 2007년 탄탄한 조직력을 갖춘 고려대 교우회장이 돼 이 대통령을 물밑 지원했으며, 자기 예금을 담보로 이 대통령의 특별당비 30억원을 대출받아 낼 수 있도록 하는 등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이런 점 때문에 세간에서는 천 회장이 현 정권의 `숨은 실세’라는 얘기가 돌기도 했다. 박 전 회장이 작년 7월 국세청의 특별 세무조사가 시작되자 `의형님’인 천 회장에게 `SOS’ 신호를 보낸 것도 이런 천 회장의 위치와 무관치 않아 보인다. 하지만 30여년에 걸친 인연은 결과적으로 의형제를 나란히 검찰청사로 보내는 나락의 씨앗으로 작용한 셈이 돼 버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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