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살로 생 마감한 ‘비운의 인물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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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노무현 전 대통령처럼 자살로 생을 마감한 비운의 인물들은 나름대로  속깊은 사연을 간직하고 있다. 노무현 전 대통령처럼 당국의 수사를 받던 중 자살한 정치인으로는 프랑스의 피에르 베레고부아 전 총리와 독일의 묄레만 전 부총리가 대표적이다.
베레고부아 전 총리는 자신이 이끌었던 사회당 정부가 총선에서 참패하자 총리직에서 물러난 지 5주 만인 1993년 5월1일 권총을 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는 총선 한 달 전 기업인으로부터 무이자로 100만 프랑(당시 환율로 약 1억4800만원)을 빌린 사실이 언론에 보도되면서 도덕성에 타격을 입자 자살을 결심한 것으로 알려졌다.
청렴한 정치인으로 신망이 높았던 베레고부아 전 총리는 빌린 돈을 합법적으로 신고했고 기일 전에 돈을 다 갚았다고 주장했지만, 결국 자신의 결백을 밝히기 위해 자살을 선택했다.
정치자금법 위반 등의 혐의로 수사를 받아온 위르겐 묄레만 전 독일 부총리는 2003년 6월 스카이다이빙을 하던 중 추락사했다. 당시 목격자들에 따르면 스카이다이빙 광으로 알려진 묄레만 전 부총리의 주낙하산이 정상적으로 펴졌으나 1600m 지점에서 갑자기 주낙하산이 그의 몸에서 벗겨졌으며 보조 낙하산마저 펴지지 않은 채 그대로 추락했다.
묄레만의 사망 1시간여 전 독일 하원에서는 정치자금법 위반 혐의를 받아온 그의 면책특권 박탈을 만장일치로 가결한 데다 검찰은 자택 등에 대한 수색에 착수한 상태였다. 따라서 묄레만은 심리적 압박을 견디지 못하고 자살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역사를 통해 자살로 생을 마감한 인물 가운데 정치적으로 노무현 전 대통령과 유사한 인사는 칠레의 아옌데 대통령이다.
                                                                               <정리 : 성 진 취재부기자>



우리나라 역시 기록에 따르면 삼국시대 신라의 희강왕(재위:836~838년)은 자살로 생을 마감한 것으로 되어있다. 희강왕의 본 이름은 김제륭이다. 아버지는 원성왕의 손자인 김헌정이고 어머니는 포도부인이다.
서기 836년 흥덕왕이 사망하자 김제륭은 아찬 김우징과 조카인 예징, 김양의 지지를 받는 숙부 김균정과 왕위 계승을 놓고 대립했다. 이 과정에서 숙부인 김균정이 전사하자 김제륭이 즉위하였으나 서기838년에 김명, 이홍 등이 다시 난을 일으키자 희강왕은 자살하고 말았다.
애국심을 불태우며 자결을 선택한 인물로는 민영환(閔泳煥, 1861~1905)이 있다. 일제가 우리나라를 강점하자 대한제국의 대신이었던 민영환은 <대한 이천만 동포에게 남기는 글>을 남기고 자결했다.
명성황후의 조카이기도 한 그는 1905년 11월 30일 일본에게 외교권을 박탈당하는 을사조약 체결을 개탄하며 이 같은 선택을 해 역사적 위인으로 기록되고 있다.


사회주의 대통령의 비극


남미 칠레의 아옌데 대통령은 1970년 민주선거를 통해 최초의 사회주의 대통령으로 이름을 올린 인물이다. 그는 의대생 시절 민중들의 비참한 생활을 목격하면서 사회주의에 입문했다.
아예데는 1973년 미국의 지원을 받던 피노체트 장군의 쿠데타에 저항하다 소총으로 자살했다. 1970년 아옌데는 칠레 대통령 선거에서 칠레 사회주의정당들의 연합 정당인 인민연합 후보로 출마해 당선되어 11월 3일에 대통령직에 취임했다. 권력을 잡자 아옌데는 ‘사회주의를 향한 칠레의 길’이라는 사회주의 정책 실행에 착수했다.
이에 따르면 대규모 산업(특히 구리 광산과 은행)을 국유화하며, 정부의 의료 및 교육 복지 관리, 어린이에 무료 우유 배급 등을 실시해 사유 재산까지 국유화했다.
그는 칠레 빈곤층의 사회경제적 후생을 증진하고자 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새로 국유화한 기업이나 공공 근로 사업을 통해 일자리를 제공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1972년에 칠레의 인플레이션율은 140%에 이르렀다. 정부 예산 적자는 치솟고 외환보유고는 떨어졌다. 물가는 상승하는데 정부는 가격 통제를 강제하면서 상점에서 생필품은 사라지고 쌀, 콩, 설탕, 밀가루의 암거래는 급증했다. 또 아옌데 정부를 미국이 방해하면서 칠레 경제는 더 어려워졌다.
아옌데 정부는 국제 채권자와 외국 정부에 채무 디폴트(국가부도)를 선언했다. 또 임금을 인상하는 동시에 모든 물가를 동결했다. 지주, 고용주, 사업가, 운송 연합, 그리고 일부 공무원과 전문 노조들이 이 정책에 강하게 반발했다.
우파에서는 국민당과 로마 카톨릭 교회 등이 반대했으며 나중에는 기독교 민주당도 가담했다. 해외 다국적 기업, 미국 정부와 갈등이 고조되고 있었다. 그런 가운데 아옌데 정부는 텔렉스(telex) 기계와 컴퓨터의 네트워크인 사이버신 계획을 추진했다.
이것은 영국의 사이버네틱스 전문가 스태포트 비어가 개발한 것이었다. 이 네트워크를 통해 공장에서 산티아고의 정부로 데이터를 전송할 수 있어서 실시간으로 경제 계획을 조정할 수 있었다.
1971년 칠레는 쿠바와 외교 관계를 복원하여, 멕시코, 캐나다와 함께 아메리카 대륙에서 쿠바와 외교 관계를 맺지 말자는 미주 기구 협약을 묵살했다. 그 직후 쿠바 대통령 피델 카스트로는 한 달간 칠레에 순방했다.
방문 중 카스트로는 수많은 군중을 끌어 모으며 민중들에게 ‘사회주의를 향한 칠레의 길’(즉 칠레가 쿠바와 같은 길을 가려는 노력)을 뒷받침하였다. 아옌데가 쿠바와 밀접하게 접촉하며 점점 대담하게 사회주의 정책을 펼치자 미국 정부는 두려움을 느꼈다.
닉슨 행정부는 국제기구를 통해 칠레에 경제 제재를 가했으며 칠레 의회의 반 아옌데 세력을 지원했다. 이러한 미국의 방해에도 불구하고, 아옌데 대통령이 1973년 3월 전보다 더 많은 표를 받아 다시 당선되어 개혁정치가 계속될 것이 분명해지자 군부에서는 1973년 9월 11일 미국의 지원을 받은 칠레 쿠데타를 일으켰다.
아옌데는 아우구스토 피노체트의 군사 쿠데타에 대항하여 직접 권총을 들고 끝까지 투쟁하다 1973년 산티아고의 모네다 궁(대통령궁)에서 피델 카스트로로부터 선물 받은 AK-47 소총으로 자살하였다.
그의 자살과 관련해 그동안 많은 의혹을 불러 일으켰으나 최근에 그의 자살은 부인을 포함한 직계 가족들도 인정하고 있다. 그러나 이후 수년 동안, 아옌데의 지지자들은 거의 대부분 그가 쿠데타 세력에 의해 살해되었다고 여겼다.
피델 카스트로도 1973년 아바나의 혁명 광장에서의 연설에서 아옌데가 대통령 궁에서 자신이 선물한 소총으로 군부에 저항하다가 죽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피델 카스트로는 2002년 아옌데가 군부와의 총격전 와중에 죽었다고 주장을 번복해 아옌데가 자살했다는 것을 인정했다.
그러나 일부 지지자들은 아직도 그가 피노체트의 군부에 의해 살해되었다고 믿고 있다. 아옌데는 죽기 전 마지막 라디오 선언에서 다음과 같은 고별인사를 남겼다.
“이번이 제가 여러분에게 말하는 마지막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에게 용기를 주고자 했던 나의 목소리도 닿지 않을 것입니다. 그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계속 들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나는 항상 여러분과 함께 할 것입니다. 내가 이제 박해 받게 될 모든 사람들을 향해 말하는 것은, 여러분들에게 내가 물러서지 않을 것임을 이야기하기 위한 것입니다. 나는 민중의 충실한 마음에 대해 내 생명으로 보답할 것입니다. 나는 언제나 여러분과 함께 있을 것입니다. 나는 우리나라의 운명과 그 운명에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또 다른 사람들이 승리를 거둘 것이고, 곧 가로수 길들이 다시 개방되어 시민들이 걸어 다니게 될 것이고, 그리하여 보다 나은 사회가 건설될 것입니다. 칠레 만세! 민중 만세! 노동자 만세! 이것이 나의 마지막 말입니다. 나의 희생을 극복해 내리라 믿습니다. 머지않아 자유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보다 나은 사회를 향해 위대한 길을 열 것이라고 여러분과 함께 믿습니다. 그들은 힘으로 우리를, 우리를 지배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무력이나 범죄행위로는 사회변혁 행위를 멈추게 할 수는 없습니다. 역사는 우리의 것이며, 인민이 이루어내는 것입니다. 언젠가는 자유롭게 걷고 더 나은 사회를 건설할 역사의 큰 길을 인민의 손으로 열게 될 것입니다.”



사랑과 권력 때문에


한국의 최초의 대중가요 ‘사의 찬미’를 불러 공전의 인기를 모았던 신여성 윤심덕과 연인의 동반자살은 일제강점기 우리나라에 많은 화제를 불러일으킨 사건이었다. 당시 동아일보는 1926년 8월 5일자 사회면에서 이 사건을 다음과 같이 보도했다.
‘지난 3일 오후 11시에 하관(시모노세키)을 떠나 부산으로 향한 관부연락선 덕수환이 4일 오전 네 시경에 쓰시마섬 옆을 지날 즈음에 양장을 한 여자 한 명과 중년 신사 한 명이 서로 껴안고 갑판으로 돌연히 바다에 몸을 던져 자살을 하였는데 즉시 배를 멈추고 수색하였으나 그 종적을 찾지 못하였으며 그 선객 명부에는 남자는 전남 목포시 북교동 김우진이요, 여자는 윤심덕이었으며, 유류품으로는 윤심덕의 돈지갑에 현금 일백사십 원과 장식품이 있었고 김우진의 것으로는 현금 이십 원과 금시계가 들어 있었는데 연락선에서 조선 사람이 정사를 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더라’
윤심덕은 일제 강점기의 성악가이자 가수 겸 배우였다. 화가 나혜석과 함께 1920년대의 신여성을 대표하는 인물이며 한국 최초의 소프라노였다. 윤심덕은 활달한 성격이라 도쿄의 남자 유학생들과 잘 어울렸다.
키가 크고 목이 긴 서구형 외모에 자신감이 넘치는 성격이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1921년에는 유학생들이 계획한 순회공연에 참여했다가 극작가이며 와세다 대학 학생인 김우진을 만나게 되었다. 당시 김우진은 부인과 자녀가 있는 유부남이었다.
윤심덕은 1924년에 도쿄 유학을 마치고 귀국하였고, 한국 최초의 소프라노로서 전성기를 맞았다. 한국 최초의 대중가요로 꼽히는 <사의 찬미>를 불러 좋은 반응을 얻기도 했다. 1926년 레코드 취입을 위하여 오사카에 있는 닛토 레코드회사에 갔다가 윤심덕은 그해 8월 3일에 김우진과 함께 시모노세키에서 부산으로 가는 연락선에 탑승했다. 두 사람은 다음 날 새벽 4시 대마도를 지나던 중 자살했다.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후 이승만 초대 대통령 다음으로 막강한 정치인으로 영향력을 행사하다 스스로 목숨을 끊은 이기붕은 당시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다. 그는 1948년 대한민국 정부수립 후 대통령비서실 실장이 되었고, 이후 서울특별시 시장, 제3대 국방부 장관을 지내다 1951년 12월 자유당 창당 조직에 참여했다.
1952년 9월부터 1960년 4월까지 제17대 대한체육회 회장을 역임했고 대한체육회 회장으로 재임 중 제6대 대한올림픽 위원회(KOC) 위원장을 겸임하였다. 1953년 12월 자유당 중앙위원회 의장, 1954년 6월부터 제3·4대 민의원 의장을 지냈고, 1955년부터는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초대 의원에 피선되었다.
그러나 1960년 부통령 후보로 출마하여 3·15 부정선거를 통해 부통령 선거에 당선되었으나, 4·19 학생혁명으로 사임하고 있다가 그해 4월 28일 가족과 함께 자살했다.
한편 당시 경무대 경찰서장(현재 청와대 경호실장) 곽영주가 이승만 대통령의 하야를 막기 위해 여론을 무마시키고자 그를 비밀리에 살해했다는 설도 있으나 현재까지는 명확한 증거가 나오지 않았다.
중국 역사에도 임금이 자살하는 경우가 더러 있었다.
항우(기원전 232년~기원전 202년)는 초나라의 왕으로, 명문의 후손이다. 그는 일찍 부모를 잃고 숙부 항량의 손에 자랐다. 뒤에 숙부 항량과 함께 진나라에 대항하는 농민군을 거병했다.
그 뒤 의제를 받들었으나 기원전 206년 초나라의 의제를 죽이고 제위를 찬탈하였다. 이는 뒷날 조선왕조 시절 김종직의 조의제문 모델이 되었고, 유방으로 하여금 찬탈자를 친다는 명목으로 거병하는 원인을 제공했다.
그는 유방과 맞섰는데 초반에는 참모 범증의 활약으로 승승장구하였으나, 이를 간파한 유방이 항우와 범증을 갈라놓아 결국 패하였다. 그 후 항우가 이끄는 초군은 유방이 이끄는 한군의 포위망에 갇혀 있게 되었는데 한군은 초군 병사들이 항복하게 하기 위해 초나라진영을 향해 초나라 민요를 연주하게 했다.
후세 사람들은 이를 빗대어 위기에 몰린 사람에게 “사면초가”라 는 고사를 만들어 불렀다. 항우는 마지막에 단기로 적진에 뛰어들어 싸웠으나 역부족으로 결국 자결을 선택했다.
항우가 죽자마자 유방의 부장들은 벌 떼 같이 달려들어 항우의 시신을 서로 차지하려고 쟁탈전을 벌였고 항우의 시신은 결국 산산조각이 났다.



클레오파트라의 자살


“그녀의 코가 조금만 낮았어도 역사가 바뀌었을 것”이라는 유명한 말 속에 등장하는 고대 이집트의 절세미녀 클레오파트라의 자살은 너무나도 유명하다. 그녀의 최후는 소설과 영화로도 재현될 만큼 인기 있는 소재거리다. 정식 칭호는 클레오파트라 7세(기원전 69년~기원전 30년)로 이집트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여성 파라오다.
그녀는 프톨레마이오스 12세의 셋째 딸로 태어났다. 부왕이 죽은 뒤 18살에 세살 어린 남동생 프톨레마이오스 13세와 결혼, 공동 파라오가 되었다. 하지만 또 다른 남동생인 프톨레마이오스 14세와 정권경쟁에서 밀려 일시적으로 파라오직에서 물러났다.
그러나 클레오파트라는 로마에서 폼페이우스와 권력투쟁을 벌이다가 이집트에 온 율리우스 시저와 협상해 그의 지지를 기반으로 다시 파라오 자리에 복귀해 정치적 반대자들을 물리친 후 정치에 몰두하였다.
그녀는 시저가 암살당한 뒤 새로운 로마의 실력자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와 또 다시 결혼 하기도 했다. 하지만 로마의 권력구조 변화로 옥타비아누스, 레피두스 등과 연대했던 이른마 ‘삼두정치’가 깨지자 클레오파트라는 안토니우스와 함께 BC 31년 9월 2일 옥타비아누스에 대항하여 악티움 해전을 벌였다.
하지만 전쟁에서 패한 클레오파트라는 자신을 일개 이집트 여인으로 취급하는 옥타비아누스와 연합할 수 없음을 직감해 자살을 선택했다.
후세 사가들은 그녀가 독사를 이용해 자살했다고 전했지만 독가스를 사용했다는 설도 있다. 또 자살이 아니라는 설도 있다. 옥타비아누스가 클레오파트라를 살해한 뒤 뱀에 물려 자살했다고 발표해 파라오인 그녀의 이미지를 깎아내리려 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는 것이다.
‘희대의 폭군’으로 유명한 로마 제국의 제5대 황제인 네로(라틴어:Nero, 서기 37년 12월 13일~68년 6월 9일) 역시 자살로 비극적인 생을 마감했다. 그는 서기 54년 의붓아버지 클라우디우스가 죽자 이복동생이자 클라우디우스의 친아들인 브리타니쿠스를 제치고 황제로 취임했다.
네로는 세네카와 근위군단 장교 부루스의 보좌를 받아 치세 초기에는 선정을 베풀었다. 그러나 이복동생인 브리타니쿠스를 독살한 뒤 정치적으로 간섭을 한다는 이유로 친어머니 소 아그리피나를 독살하기에 이른다.
그는 부인 옥타비아마저 살해한 뒤 서기 64년 로마 대화재로 민심이 흉흉해지자 기독교인들에게 책임을 뒤집어 씌워 박해했다. 네로의 기독교 박해로 사도 성 바울로 등 성직자들이 순교하는 등, 엄청난 수의 기독교인들이 네로의 손에 죽어갔다.
이 같은 폭정에 서기 68년 타라콘네시스 속주 총독 갈바가 주도한 반란이 일어났으며, 이에 각지의 총독들이 동조해 마침내 네로는 원로원으로부터 ‘국가의 적’으로 선고받는다. 그는 68년 6월 8일 결국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로마 제국 시절에는 유독 실권자들의 자살이 많았다. 그중 시저를 암살해 유명세를 탄 마르쿠스 브루투스도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현대사에서 극적이면서도 충격적인 통치자의 자살로는 나치 총통 아돌프 히틀러(1889~1945)를 꼽을 수 있다. 뛰어난 웅변술의 소유자였던 그는 독일 민족 생존권 수립 정책을 주장하며 자를란트의 영유권 회복, 오스트리아 합병, 체코슬로바키아 점령 및 폴란드를 침공하며 제2차 세계 대전을 일으켰다.
전쟁 중 유대인 말살정책으로 인해 무고한 유대인들이 아우슈비츠 수용소와 같은 강제 수용소 내 가스실에서 학살당했으며 히틀러의 유대인 학살은 인류 역사상 가장 큰 비극중의 하나로 기억되고 있다.
승승장구하며 전세를 확장하던 독일은 스탈린그라드와 북아프리카 전선에서 패배한 뒤 몰락의 길을 걸었다. 히틀러는 1945년 4월 29일 소련군 포위 아래 베를린에서 정부 에바 브라운과 결혼한 뒤 이튿날 지하 벙커에서 청산가리 캡슐을 물고 권총으로 자신을 쏘아 자살했다.
그러나 히틀러가 독약 캡슐을 쓰지 않고 권총만으로 자살을 했다는 증언이 나오는가 하면 소련에 의해 독약 중독으로 사망했다는 조사 결과도 나와 아직까지 그의 자살 내막은 미스터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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