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죽’만 울린 박연차 게이트 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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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연차 전 태광실업 회장의 정관계 로비 의혹 수사가 끝났다. 대검찰청 중앙수사부는 12일 수사결과를 발표, 뇌물수수나 정차자금법 위반, 알선수재 혐의 등으로 20여명을 구속하거나 불구속 기소했다.
안희정 민주당 최고위원과 민유태 검사장, 박 모 부장판사, 김정복 전 중부지방국세청장, 이종찬 전 대통령 민정수석비서관 등은 직무관련성이 인정되지 않거나 범죄가 성립되지 않아 내사 종결했다. 다만, 김태호 경남지사는 주요 참고인인 해외 거주자에 대한 조사 필요성이 있어 계속 수사하기로 했다.
검찰이 발표한 수사 결과를 놓고 정치권과 검찰 주변에서는 살아있는 권력에는 손도 대지 못한 ‘변죽만 울린 수사’라는 비판이 나오고 있다. 특히 태광실업 세무조사 무마 로비와 관련해 여러 차례 이름이 거론된 ‘대통령의 친구’ 천신일 세중나모그룹 회장은 부실한 수사로 영장청구 단계에서 기각 당하는 굴욕을 맛봤다. 또한 여야 가릴 것 없이 진행될 것이라는 수사는 여권에서는 추부길 전 청와대 홍보기획비서관과 송은복 전 김해시장만이 구속된 채 막을 내렸다. 반 년 가까이 한국사회를 떠들썩하게 만든 박연차 게이트를 정리해봤다.
                                                                                <한국지사 – 박희민 기자>



지난 3월 본격적으로 시작된 검찰의 수사는 크게 세가지 흐름으로 나뉘어 진행됐다. 정관계 및 법조계, 경찰간부의 불법자금 수수의혹, 고(故) 노무현 전 대통령의 불법자금 수수의혹, ‘박연차 구명로비’로 일컫는 세무조사 무마로비 의혹이 그것이다. 시기별로는 노 전 대통령 관련 의혹에 대한 수사 전·후로 나눌 수 있다.


‘자신만만’ 수사 초기


박연차 리스트 수사는 지난해 종결된 세종증권 비리의혹 수사와 연장선에 있다. 당시 수사팀은 박 전 회장을 특별범죄 가중처벌법상 조세포탈 혐의 등으로 구속 기소했다.
하지만 수사 초기부터 제기된 박연차 리스트 의혹에 대해서는 “검찰이 따로 리스트를 입수하지 않았다”며 “다만 향후 로비 혐의가 확인되면 언제든지 수사에 착수할 것”이라고 수사결과를 갈음했다.
이후 검찰 정기인사로 수사팀은 이인규 중수부장 체제로 바뀐다. 이 부장은 취임 즉시 ‘특수통’ 검사 8명을 충원해 박연차 리스트를 규명하기 위한 계좌추적과 압수물 분석 등 수사의 물밑작업에 들어갔다.
충분한 준비작업을 거친 이인규 체제의 새 수사팀은 3월14일 정치권 로비의혹과 관련 박 전 회장을 심문하는 등 본격적으로 수사에 착수한다. 이후 검찰은 거칠 것 없이 전·현직 정치인에 대해 소환조사를 진행했다.
적극적이고 구체적인 진술로 일명 ‘박 검사’로 불리던 박 전 회장의 수사 협조와 박 전 회장의 여비서가 꼼꼼히 기록한 다이어리가 수사의 주동력이었다. 검찰은 이를 통해 거의 매일 정치인들을 소환시키거나 구속했다.
20여일 사이에 구속된 인사만 추부길 전 청와대 비서관, 박정규 전 청와대 민정수석, 이광재 민주당 의원 등 6명에 달했고, 박관용·김원기 전 국회의장, 박진 한나라당 의원, 서갑원 민주당 의원 등 거물급 정치인들도 연이어 검찰에 소환됐다.
이 시기 검찰은 자신감을 바탕으로 신속히 수사를 진행, 구속영장을 청구했으며 법원에 의해 한 차례도 영장이 기각되지 않았다.
검찰이 예상치 못한 변수를 만난 것은 노 전 대통령과 박 전 회장 간의 수상한 돈거래 의혹이 일부 언론을 통해 알려지면서부터였다. 500만달러, 100만달러 등 구체적인 액수가 제시되기 시작했고, 돈의 전달자로 정상문 전 청와대 총무비서관의 이름이 등장했다.
검찰은 처음 관련 의혹이 제기됐을 당시 “확인해 줄 수 없다”는 말로 예정된 수사 일정을 진행하려 했다. 하지만 검찰은 4월 초 홍콩 사법당국으로부터 박 전 회장의 홍콩법인 APC의 비자금 계좌내역을 확보, 수사의 방향은 노 전 대통령 쪽으로 급격히 기울었다. 진술 만이 아닌 구체적인 물증까지 확보됐기 때문이다.
결국 노 전 대통령은 4월7일 오랜 친구이자 측근인 정 전 비서관의 체포 소식을 듣고 즉시 자신의 홈페이지를 통해 검찰 수사에 응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이에 검찰은 다음날 즉시 “노 전 대통령 사과문의 진실을 밝히겠다”며 사실상 노 전 대통령에 대한 소환 방침을 내비췄다.
이후 검찰은 정 전 비서관에 대해 구속영장이 한 차례 기각되는 난감한 상황에서도 노 전 대통령의 조카사위 연철호씨, 부인 권양숙 여사, 아들 노건호씨를 각각 참고인으로 불러 조사를 진행, 수사의 고삐를 더 조였다.
결국 노 전 대통령은 검찰과 4월30일 오후 1시30분에 청사로 출두하기로 의견을 조율, 14년만의 ‘전 대통령 검찰 소환’ 장면을 국민들에게 보였다.
노 전 대통령에 대한 소환조사 직후 검찰은 권 여사에 대한 재조사를 끝으로 가능한 빠른 시간 안에 노 전 대통령의 사법처리여부를 결정할 계획이었다. 하지만 검찰은 권 여사에게 100만달러 사용처에 대한 이메일을 받고 딸 정연씨 부부를 소환하는 등 3주 가까이 노 전 대통령에 대한 수사를 계속 진행했다.
결국 지난 달 23일 노 전 대통령은 ‘나로 인해 너무 많은 사람이 고통을 받게 됐다’는 내용이 담긴 유서만 남긴채 서거, 검찰은 엄청난 충격에 빠졌으며 수사 또한 갈 길을 잃었다.
노 전 대통령 서거의 직접적인 원인으로 지목된 검찰은 노 전 대통령 수사를 ‘공소권 없음’으로 종결한다는 입장만 밝힌 채 침묵 속으로 들어갔다.
검찰은 국민장 기간 동안 여론을 의식해 수사를 중단, 향후 수사방향에 대해 고심을 거듭했다. 그사이 임채진 검찰총장은 한 차례 사표가 만류된 끝에 결국 지난 5일 도의적 책임을 지고 퇴임, 내·외부적으로 큰 위기에 봉착하게 된다. 이후 검찰 수사는 추진력을 잃었으며 결국 지난 12일 ‘용두사미’식의 수사 결과를 내놨다.



역대 사건 중 최대 규모 기소


박연차 전 회장의 정관계 로비 의혹 수사는 역대 부정부패 사건 가운데 기소자가 최대 규모다. 전두환 노태우 전 대통령 비자금 사건 때 두 전직 대통령을 포함해 15명이 기소됐고 한보 사건 때는 정태수 리스트에 오른 33명 중 8명만 뇌물수수 혐의로 불구속 기소됐다. 성격은 다르지만, 대형 사건이었던 12·12, 5·18 사건의 16명 보다도 더 많다.
더욱이 정치인과 자치단체장, 법조인, 기업인, 언론인 등 사회 유력인사들이 모두 망라됐고 뿌려진 돈만 135억원에 달한다는 점에서 최고의 부패 스캔들로 기록될 것으로 보인다.
검찰이 지난해 12월 박 전 회장을 조세포탈 혐의로 구속한 후 6개월 만에 정관계 로비 의혹의 일단을 밝혀냈다는 것에서 이번 수사의 성과가 크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번 수사가 박 전 회장의 입에 의존한 경우가 많아 재판에서 어떻게 달라질지 미지수다. 박 전 회장이 법정에서 진술을 바꾸면 유죄 입증이 어려운 피고인이 많기 때문이다.
특히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이후 박 전 회장의 태도가 바뀌고 있는 것은 검찰에게는 부담감이다.
지난 11일 이광재 의원의 공판에서 박 전 회장은 “깨끗한 정치를 하려 했던 사람에게 못할 짓을 했다”고 사과하는 한편, 여러 차례 거액을 전달하려다 이 의원의 거절로 실패한 사실을 털어놨다. 재판이 끝나야 성과가 명확해질 것으로 예상된다.


세무조사 무마 로비 의혹 미궁


한계가 없는 것도 아니다. 죽은 권력과 달리 살아있는 권력에 대해 관대했다. 박 전 회장 구명로비 수사는 변죽만 울린 채 천신일 세중나모여행 회장을 불구속 기소하고 추부길 전 비서관만 구속하는 것에 그쳤다.
정권 최고 실세가 연루된 것으로 드러났지만, “로비가 통하지 않았다”는 추 전 비서관의 말을 근거로 “조사가 필요하지 않다”고 선을 그었다. 로비의 정점에 있었던 한상률 전 국세청장은 아예 소환도 하지 않고 서면조사로 갈음했다.
처음부터 실패한 로비로 규정한 틀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않은 것이다. 국세청 압수수색 결과도 다르지 않았다. 세무조사 진행이 왜곡되거나 축소된 사실이 없다는 것에서 한 발자국도 나아가지 못했다.
홍만표 대검 수사기획관은 “세무조사와 관련해 충분히 진술을 들은 만큼 한 전 청장이 귀국한다 해도 불러 조사할 계획이 없다”고 말했다.
검찰이 확인한 것처럼 세무조사 기간에 세무조사 대책회의가 10여 차례나 열렸다. 대책회의에서는 천 회장과 김정복 전 중부지방국세청장, 박 전 회장 쪽 인사들이 세무조사 진행 상황을 논의하고 그에 맞춰 로비 전략을 세웠다.
일차적으로 박 전 회장에 대한 검찰 고발을 막는 것이 목적이었겠지만, 태광실업 법인에 대한 처벌을 면하는 것도 목표이었을 것이 분명하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검찰 기소 단계에서 태광실업 법인이 빠졌다. 실패한 로비라고 보기에는 석연치 않은 대목이다.
‘마당발’로 알려진 박 전 회장은 현 정권 인사들한테도 광범위한 로비를 펼쳤지만 수사결과는 초라하다. 구속된 이는 추 씨와 송은복 김해시장 2명뿐이다. 천 회장과 이상철 서울시 정무부시장은 불구속기소됐다. 송 씨와 이 부시장은 세무조사 무마 로비건과는 무관하다.



표적수사 시비 벗어나지 못해


표적수사 시비가 끊이지 않았던 것은 문제점이다. 이번 수사의 큰 줄기였던 노 전 대통령의 600만달러 수수 의혹에 대해 검찰은 박 전 회장의 진술만 가지고 무리하게 진행했다.
박 전 회장의 진술을 뒷받침해 줄 중간 전달자의 진술도 없고 정황 증거도 없는데도, 노 전 대통령을 겨냥해 저인망식 수사를 벌였다. 표적을 정해놓고 수사를 벌인 것이다.
노 전 대통령이 재임 중 이 같은 사실을 알았다는 증거가 드러나지 않았다면 수사 방향을 바꿨어야 했다. 그러나 검찰은 신병처리까지 미뤄가며 고집스럽게 사건의 본질과 상관 없는 사용처 규명에 골몰했다.
검찰은 수사결과 발표에서도 박 전 회장의 피의사실이 인정된다며 노 전 대통령 혐의를 기정사실화했다. 노 전 대통령 서거로 공소권 없음 처분을 내놓고도 피의사실을 우회적으로 밝힌 것이다.
검찰사건사무규칙에 따르면 범죄성립 여부 자체를 아예 판단하지 않는 것이 공소권 없음 처분이다. 정면으로 이 규칙을 어긴 것이다.
법조계 한 인사는 “전직 대통령 서거라는 참혹한 결과를 가져온 수사에 정당성은 없다”며 “노 전 대통령에 대한 발표내용을 보면 검찰에 자기반성이 없어 자체 개혁을 기대할 수 없을 것 같다”고 밝혔다.


수사·보도 관행 변화 불가피


검찰은 ‘박연차 게이트’와 3개월간 씨름한 끝에 만신창이가 됐다. 검찰 책임론은 검찰총장 사퇴에도 수그러들지 않고 있다. 대검 중수부 폐지, 수사팀 문책인사 단행, 국정조사 실시 등 야당 요구에 일부 여당 의원이 동조하는 추세다.
수사 과정에서 피의자 가족 계좌까지 샅샅이 뒤지는 저인망식 수사와 범죄자 진술에 지나치게 의존하는 수사, 특정인을 겨냥한 ‘표적수사’, 정권교체 때마다 되풀이되는 ‘보복수사’ 논란도 과제를 남겼다. 정치권에선 중앙수사부 폐지론과 함께 수사팀 문책, 국정조사 등이 거론되고 있다.
검찰이 수사 진행상황을 언론에 알리는 방식도 고민할 부분이다. 고검장 출신인 박희태 한나라당 대표조차 “이런 수사는 처음 본다”는 반응을 보였다. 과도한 피의사실 공표로 수사를 받는 상대방에게 극심한 모욕감을 안겼다는 비판이 만만치 않다.
법무부는 김경한 장관 지시로 검찰 수사관행과 언론을 상대로 한 브리핑 제도 개선에 나선 상태다. 국민의 알권리와 피의자 인권 사이 절충점을 찾는 게 브리핑 제도 개선의 목표다. 앞으로 검찰 수사에 대한 언론의 보도관행은 큰 변화가 예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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