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회장 선출 당시 내부 반목과 사건으로 얼룩졌던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이하 평통)가 최근 또 도마 위에 올랐다. 이명박 정권 태동 후 처음 물갈이된 14기 미주 지역 평통이 회장과 위원단 위촉 과정에서 ‘낙하산 인선’ 등의 논란이 불거진 가운데 여전히 후유증이 가시지 않고 있다. 더구나 시애틀에서는 최근 일명 ‘평통 만찬잔 난동사건’이 발생해 현지 언론은 물론 본국 언론조차 평통에 대한 비난수위를 높이고 있다. 지난 4일 시애틀 이하룡 총영사는 새로 출범한 14기 시애틀 평통(회장 이영조) 임원들과 전 임기 임원진의 화합을 도모하기 위해 관저에서 만찬회를 주선했다. 하지만 화기애애해야할 만찬장은 전·현직 평통 위원 간 욕설과 고성이 오가며 아수라장으로 변하고 말았다. 이하룡 총영사는 이들이 던진 와인 잔에 얼굴을 맞아 피를 흘리기까지 했다. 이번 사태의 배경은 수개월 전부터 반목했던 전·현직 임원들 사이의 앙금이 폭발한 데 있다. 이 총영사 역시 평소 동포사회 분위기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채 섣불리 자리를 마련했다는 비난을 피할 길이 없다. 이번 시애틀 평통의 ‘만찬장 난동사건’은 국내 언론도 보도돼 일각에서는 평통 ‘무용론’ ‘폐지론’까지 고개를 들고 있다. 때문에 시애틀 뿐 아니라 미주지역 전체 평통이 사태의 흐름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성진 취재부기자> |
이번 사건은 본국 주요 일간지는 물론 지방지에까지 보도되는 등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때문에 불미스러운 사태를 일으킨 평통 전체를 싸잡아 ‘미주 평통은 똥통’이라는 노골적인 비난여론도 만만치 않다. 하지만 정적 현지 동포사회에서 이번 사건은 은폐 수순을 밟고 있다. 과거와 마찬가지로 한인 사회 단체장들이 연루된 사건은 큰 사회적 이슈로 떠올랐다 슬그머니 수면아래로 묻히곤 했다. 이번 사건도 예외가 아니다. 만찬을 열었다 싸움에 휘말려 피를 본 시애틀 총영사관 측은 당초 “도저히 묵과할 수 없는 사건”이며 “본부에도 보고하고 평통 청문회도 개최할 수 있다”며 격앙된 반응을 보였었다. 경우에 따라 사법당국에 ‘외교관 피습’ 혐의로 고발할 가능성도 있다는 말까지 나왔었다. 그러나 시애틀 총영사관은 사건의 주동자가 지난 9일 공개사과를 하자 순식간에 꼬리를 내리고 말았다. 이 같은 태도변화가 청와대 측의 요구 때문인지, 또는 외교통상부의 지시에 따른 것인지는 파악되지 않고 있다.
“너 평통 관둬!” 막말에 폭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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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하룡 시애틀 총영사 |
| 사건의 발단은 지난 7월 초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막 출범한 14기 시애틀 평통이 임원진 인선문제를 놓고 줄다리기가 한창인 가운데 지역 한인단체장 회의장에서 첫 마찰이 불거졌다. 당시 이상규 타코마 한인회장은 이광술 시애틀 한인회장에게 ‘평통 위원 용퇴’를 공개적으로 요구한 것. 격분한 이광술 회장은 이를 거부했고 두 사람의 앙금은 이후에도 가시지 않았다. 이상규 회장은 “이광술 시애틀 회장이 평통 위원에서 사퇴하지 않아 문제의 빌미가 되고 있다”며 먼저 시비를 걸었다. 이광술 회장은 14기 평통 위원에 위촉됐으나 이상규 회장은 인선에서 탈락했다. 고배를 마신 이 회장은 “내가 탈락한 이유가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당시 분향소를 설치해 본국정부의 미움을 샀기 때문이라는 등 갖가지 소문이 나돌았다”고 토로했다. 당시 노 전 대통령의 분향소는 이번 사건에서 와인 잔을 던진 이정주 한친회장이 공동으로 설치했다. 이광술 한인회장은 지역 한인회장들이 평통 위원 추천에서 빠지기로 결의한 적이 없다며, 총영사관 추천 여부에 상관없이 위원으로 결정돼 활동하겠다는 뜻을 밝혔었다. 당시 소동으로 시애틀 한인회와 타코마 한인회는 적이 된 상황이었다. 논쟁이 있기 2주일 전인 6월 24일 열린 13기 평통 종무식에서 강동언 전 총연 서북미 협의회장은 공관장 자격으로 참석한 이하룡 총영사에게 직격탄을 날리기도 했다. 강 회장은 “당신(이하룡 총영사)이 온 날부터 한인사회의 기존 정서와 질서가 다 깨졌고 분란이 시작됐다”며 비난의 화살을 날렸다. 13기 평통은 전 정권 성향이 강한 인물 위주로 구성됐었다.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느낀 이하룡 총영사는 다른 회의 참석을 이유로 자리를 떴으나 강 전 회장은 이 총영사와 공관 측을 계속 성토했다. 또 14기 평통회장 인선에 대한 불만을 털어놓기도 했다. 이 같은 논쟁은 LA지역도 예외가 아니었다. 14기 평통이 새롭게 꾸려지며 전임자와 신임자사이의 묘한 갈등이 표면화된 것이다. 14기 시애틀 평통은 회장 선임과 관련해 ‘낙하산 인사’ 논란과 함께 출범 전부터 임원 4명이 사퇴하는 등 잡음이 계속됐었다.
이하룡 총영사 성급한 판단 실수
이렇듯 악화일로를 걷고 있는 전·현직 평통 위원 사이의 앙금이 채 가시지도 않은 상태에서 이하룡 총영사가 성급하게 나선 것이 실수였다. 이 총영사는 14기 평통 출범을 격려하고 앞으로의 활동 방향에 대한 전직 회장단의 자문을 얻고자 한다는 이유로 지난 4일 전·현직 평통 회장단 30여명을 총영사관 관저로 초청했다. 총영사관에 따르면 이날 만찬은 포도주로 건배가 시작됐으며 저녁 식사가 끝난 뒤 전직 회장 및 간사들의 경험담을 듣는 간담회로 이어졌다. 이 자리에서 이광술 시애틀 한인회장은 “지난날 평통 활동을 할 때 한인단체들이 협조를 잘 해주지 않아 힘들었다”는 내용의 말을 했다. 이때 타코마 한인회장을 지낸 이정주 평통 부회장이 발끈하고 나섰다. 그는 “이 회장, 무슨 X소리냐”고 소리를 질렀고 이광술 회장은 “내 말은 당신을 지목한 것이 아니다”며 발언을 끝냈다. 이 총영사가 나서 “이곳은 대한민국의 공관이고 모임도 공식적인 자리인 만큼 고성이나 비속한 발언은 삼가해달라”고 주문했다. 그러자 사회를 보던 이흥복 평통 부간사는 “상스러운 말을 하면 사회자 권한으로 퇴장시키겠다”며 경고성 발언을 했다. 이러자 이정주 부회장은 “누가 당신을 사회자 시켰느냐”며 테이블에 있던 컵과 와인 잔 등 유리컵 3개를 연이어 던졌다. 이 과정에서 유리잔 파편이 이 총영사의 손과 얼굴에 튀어 총영사가 피를 흘리는 사태가 발생했다. 시애틀 총영사관은 지난 8일 오후 이번 사건에 대한 전말을 공식 보도 자료로 만들어 지역 한인 언론사에 보냈다. 이 총영사는 현지 한국일보와의 통화에서 “총영사관에 대한 유언비어 등이 많았지만 지금까지는 동포화합 차원에서 참아왔다”며 “총영사관저에서 열린 공식적인 자리에서 와인 잔이 날아다닐 정도의 사태가 온 것은 더 이상 묵과할 수 없다”고 말했다. 이 총영사는 “특히 이정주 부회장이 술에 취해 우발적으로 한 일을 가지고 총영사를 향해 잔을 던졌다고 주장하는 일부 인사도 있다”며 “이번 불상사는 물론 사태를 와전시키는 행위에 대해서도 진상을 조사해 강력 대응하겠다”고 강조했다. 시애틀 총영사관이 언론에 배포한 보도문에 대해 이광술 시애틀 한인회장은 “한인단체가 협조해주지 않았다”고 표현한데 대해 “평화통일에 앞서 한인사회가 하나로 합쳐야 한다는 뜻을 강조한 것인데 영사관이 이를 왜곡했다”고 주장했다. 당시 술잔을 던진 이정주 부회장은 중앙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술잔은 던진 것이 아니고 조금 세게 밀친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사건 경위에 대해 설명하며 “화나면 벽도 치고 하지 않나. 정확한 기억은 없지만 홧김에 잔을 밀쳤다. 조그만 파편이 총영사에게 튀었다”면서 “전혀 의도적이지 않은 일이었다”고 밝혔다. 하지만 당시 사회를 보던 이홍복 부간사는 당시의 사태를 이렇게 설명했다. 이날 이정주 부회장의 시종 화가 난 말투로 식사 분위기를 무겁게 했고 자신이 ‘오늘은 이하룡 총영사님께서 특별히 시간을 내셔서 평통 전직 회장님들을 모시는 자리이니, 나쁜 말은 하지 말고 좋은 말만 하자’고 건의했다는 것이다, 그는 “퇴장 운운하는 것은 이 같은 양해를 구한 다음 ‘지금부터 사회자 말을 듣지 않으면 퇴장시킬 수도 있다’는 식으로 말한 것일 뿐”이라고 해명했다. 그는 “분위기를 바꾸기 위해 강석동 지도위원에게 건배 제의를 부탁했으며, 다함께 건배를 했다. 그런데 건배가 끝나자 이정주 부회장이 ‘누가 너더러 사회를 보라고 했냐’며 언성을 높였다”고 말했다. 신경질적인 반응에 이 부간사가 일어서자 이 총영사가 진정시키기 위해 손을 들어 자제해 줄 것을 암시했고, 이에 그가 자리에 앉았으나, 갑자기 이정주 부회장이 혼자 중얼거리며 와인 잔을 테이블 위로 집어 던졌다는 것이다. 사건 발생 후 이 부회장은 주변 사람들에 의해 만찬장 밖으로 끌려나왔다. 사회자였던 이부간사는 지난 9일 한 지역 언론에 “서북미 한인사회가 과연 어디까지 와 있나”라는 제목으로 개인의 심경을 밝힌 이메일을 보냈다. 그는 ‘한국의 통수권자를 대표한 분이 마련한 만찬 자리에서 꿈에도 생각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나 총영사께 피해를 주고 정부기물이 파손되는 등의 행동은 서북미에 사는 한사람으로서, 간담회 참석한 한사람으로서 얼굴조차 들 수 없는 정도’라며 ‘지난 4일 있었던 간담회에서 일어났던 일들에 대해 혹시 있을지도 모를 오류를 범하지 않기 위해 진실을 알아야 한다는 생각에 메일을 보낸다’고 밝혔다. 또 그는 ‘예의는 고사하고 불평과 불만, 더 나아가 총영사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분들을 종종 본다. 오늘 이후 우리는 각성해야 한다’고 적었다.
공개사과로 어설픈 마무리
사태가 발생한 후 다음날 시애틀 평통은 긴급임원회의에서는 13명 임원이 참석한 가운데 ‘이정주 부회장의 사과와 사표수리’ ‘연대책임을 지고 회장단 모두 사퇴’ ‘연대책임을 지고 평통위원전원이 사퇴’ 등 3가지 안건을 놓고 임원투표에 들어갔다. 이 가운데 이정주 부회장의 사과와 사표수리로 결론이 났다. 이날 투표에서 이 부회장 사표수리는 8명이 찬성해 과반수 의결로 가결됐으며, 평통 전원사퇴는 5표로 부결됐고, 회장단 사퇴는 한명의 찬성도 없어 역시 부결됐다. 하지만 고종제 수석 부회장은 투표결과에 관계없이 사표를 제출했다. 정병국 간사는 이정주 부회장의 사표는 지난 8일 이메일로 서울 평통 사무처에 제출해 9일 사표수리가 됐음을 전화로 확인했다고 밝혔다. 물의를 일으킨 이정주 부회장은 지난 9일 ‘만찬장 난동’ 사태에 공식적으로 사과하고 용서를 구했다. 이 부회장은 “발단이 어떻게 됐든 상관없이 나의 잘못을 시인하고 용서를 구한다”며 “특히 잘해보자며 격려차를 자리를 마련했다가 엉뚱한 피해를 입은 총영사관과 이하룡 총영사, 그리고 평통에 진심으로 죄송하다”고 덧붙였다. 이날 모임에 참석한 이영조 회장 등 평통 회장단은 이씨의 평통 위원 사퇴와 사과로 이번 사태를 마무리 짓기로 결정했다. 이들은 회장단이나 임원진 전원 사퇴 등에 대한 논의도 있었으나 술김에 벌어진 우발적 사태를 더 이상 확대시키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다고 보고 이씨의 사퇴로 일단락 하는 것으로 입장을 정리했다. 이영조 회장은 “이정주 전 부회장이 이번 사태에 대해 책임을 지고 평통위원 사퇴는 물론 사죄를 했지만 평통도 같이 책임이 있다”며 “물의를 일으켜 한인사회 및 영사관 등에 다시 한번 사과를 드린다”고 말했다. 이번 사태를 지켜본 시애틀 한인들 사이에서는 ‘평통 무용론’이 고개를 들고 있다. 동포 권종상씨는 “한인사회에서 평통은 분명 없어져야 할 단체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며 “정체를 알 수 없는 탄생과정부터 동포사회를 일종의 ‘도구’로 생각하는 본국 정부의 안일한 생각이 만들어낸 구색 맞추기 단체로 밖에는 볼 수 없다”고 말했다. 시애틀 총영사관은 1977년 11월 10일 개관했으며. 이번 이하룡 총영사는 12대 공관장으로 지난해 5월 13일 부임했다. 그의 총영사 임명은 김재수 LA총영사 임명 시 함께 발표됐다. 그의 임명을 놓고 이명박 대통령 당선으로 인한 ‘보은인사’라는 논란이 일기도 했다. 한나라당 중앙위원을 지낸 이 총영사는 부임전 한전산업개발 대표이사를 지내고 이명박 대통령 예비후보 정책 특별보좌관과 대통령 취임준비위원회 자문위원을 지낸 대표적인 ‘MB맨’이다. 시애틀 총영사관은 이정주 부회장이 총영사관을 찾아 사과한 뒤 그의 평통 위원 사퇴, 한인사회 활동중단, 파손 집기 배상 등을 약속 받았고 평통이 이번 사태를 마무리하기로 결정함에 따라 결과를 본국에 보고했다. 시애틀과 마찬가지로 LA에서도 이 같은 불미스런 사태가 일어나지 않는다는 보장은 없다. 특히 지금까지의 논란만 봐도 더한 사건이 생길 가능성이 다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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