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희 전 삼성그룹 회장의 사면을 둘러싼 논란이 연말 본국 정·재계의 핫이슈로 떠오르고 있다. 이 전 회장은 경영권을 불법적으로 승계하기 위해 삼성SDS 신주인수권부사채(BW) 헐값 발행, 차명계좌 운용 등으로 부당한 이득을 얻은 점이 인정돼 지난 8월 사법부는 그에게 배임 및 조세포탈죄로 징역 3년, 집행유예 5년, 벌금 1,100억 원을 선고했다. 현재 정치권 일부나 재계에서는 여러 가지 이유로 이 전 회장의 사면을 건의하고 있다. 특히 평창동계올림픽을 숙원사업으로 하고 있는 스포츠계에서는 IOC 위원 출신이 이 전 회장의 사면을 누구보다고 강하게 건의하고 있다. 하지만 이 전 회장의 사면을 반대하는 목소리도 적지 않다. 실형이 선고된 지가 불과 몇 개월 밖에 되지 않았는데 벌써 사면시킨다면 형평성의 문제가 생긴다는 것이다. 가뜩이나 현 정부가 가진자들의 목소리에만 귀를 귀울인다는 비판이 나오고 있는 상황에서 이 전 회장에 대한 사면은 현 정부 입장에서도 부담이다. 현재 청와대는 대부분의 사면 대상을 정해놓은 채 이 전 회장, 서청원 친박연대 대표 등 일부 정재계 인사들의 사면 포함 여부를 고심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건희 전 삼성그룹 회장 사면을 둘러싼 갈등을 쫓아가봤다. <한국지사 = 박희민 기자> |
최근 정치권은 물론 재계와 체육계, 강원지역을 중심으로 연말연시에 있을 사면에 이 회장을 포함시켜야 한다는 주장이 거세다. 이들은 막판 경쟁이 불붙은 2018년 동계올림픽을 유치하기 위해서는 이 회장의 역할이 필요하다는 논리를 내세우고 있다. 평창 동계올림픽 유치를 위해서는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위원인 이 전 회장이 활발하게 뛰어야 하고, 그러려면 ‘족쇄’를 풀어줘야 한다는 것이다. 이 전 회장은 지난 1996년 국제올림픽위 위원으로 선출된 뒤 2010년과 2014년 동계올림픽 유치 활동을 벌였다. 그러나 지난해 8월 조세포탈 혐의로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 벌금 1100억원을 선고받은 뒤 국제올림픽위 위원 직무를 자발적으로 포기한 상태다. 정치권의 사면요청은 여야를 가리지 않고 있을 정도다. 지난 9일에는 강원도 국회의원협의회 소속 여야 의원 8명이 이귀남 법무부 장관을 면담하고 이 전 회장의 사면을 건의했다. 재계도 한 목소리다. 대한상의를 비롯한 경제5단체는 이 전 회장을 포함한 기업인들의 대사면을 정부에 공식건의할 방침이다. 앞서 김진선 강원지사와 조양호 평창동계올림픽 유치위원장, 박용성 대한체육회(KOC) 회장 등도 사면 필요성을 제기한 바 있다. 정부 일각에서도 정치계 등의 요구를 수용해 이 전 회장에 대한 사면여부를 검토하겠다고 화답했다. 그것도 주무장관인 법무장관이 국회 예결위에 출석한 공식적인 자리에서다. 이귀남 법무장관은 국회 예결위 답변에서 “사면은 대통령 전속 권한”이라면서도 “소관부처인 법무부가 사면건의를 검토하고 있고 신속히 검토를 마치겠다”고 말했다. 한나라당 황영철 의원은 “내년 초에 열리는 벤쿠버 IOC 동계올림픽에 이 전 회장이 중요한 역할을 해야 한다”며 “사면·복권도 시기에 맞춰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면 의미가 없다”고 강조했다. 유인촌 문화체육관광부 장관과 최경환 지식경제부 장관도 이 전 회장에 대한 사면 필요성을 제기했다. 이 전 회장 사면론이 부풀어오르면서 삼성 안팎에선 그 배경에 관심이 쏠린다. 일단 삼성과 청와대의 ‘빅딜설’이 관심을 끈다. 삼성이 세종시로 본사 또는 계열사를 이전하는 대신 MB 정부가 이 전 회장을 특사해준다는 설이다. MB 정부는 세종시 원안을 백지화하는 대신 기업과 대학, 연구소 등의 이전을 추진하고 있다. 또한 내년 6월엔 지방선거가 있어 현 정부가 정치적 부담을 느낄 수 있으므로 세밑이나 연초에 특사를 받으려 한다는 설도 나오고 있다. 여기에 지방선거에서 야당이 이기면 특사는 더욱 어려워질 수 있는 만큼 MB 정부가 힘이 있을 때 추진하려 한다는 분석도 있다. 한 재계 인사는 “삼성이 특사를 서두르는 이유는 올해 안으로 이 전 회장에 대한 법률적 이슈를 모두 마무리짓고, 내년부터 소유구조 개편과 승계구도 작업을 본격화하기 위해서”라고 말했다.
반대 여론도 많아
하지만 사면을 반대하는 목소리도 적지 않다. 먼저 시민단체들은 형평성에 맞지않는다는 논리를 내세우며 사면을 반대하고 있다. 김상조 경제개혁연대 소장(한성대 교수)은 “MB 정부의 슬로건이 법치주의다. 힘없는 국민과 노조는 법치주의를 엄격하게 적용받았다. ‘이 전 회장에게는 다른 잣대를 들이대는 것이 과연 MB 정부식 법치주의인가’라는 비판을 겸허하게 생각해야 한다”고 말했다. 정치권에서도 반대의 목소리는 나오고 있다. 한나라당 정몽준 대표는 지난 14일 최고위 회의에서 정치권, 재계와 체육계 등이 이 전 회장의 사면복권을 건의하고 있는데 대해 “취지를 충분히 이해하고 있지만 요즘의 사면 보도를 보면 다소 이른 감이 있지 않나 이런 생각도 든다”라면서 견제구를 던졌다. 정 대표의 이런 입장에 대해 일각에선 정 대표가 현대가(家)출신 CEO이란 점 때문에 삼성과 현대가의 미묘한 관계가 남아있는 것이 아니냐는 얘기까지 흘러나오기도 있다.
청와대의 고민
사면여론이 들끍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대통령을 비롯한 청와대의 고민은 간단치 않다. 그렇지 않아도 세종시 수정 문제나 예산안 처리 등 굵직한 논란거리가 대기 중인 상황이다. 더구나 이 대통령은 취임 이후 법질서 확립을 강조하면서 서민생계형을 제외한 정재계 인사 사면에는 부정적 입장을 밝혀왔다. 김은혜 청와대 대변인은 성탄절 사면계획과 관련 “계획된 바도 확정된 바도 없고 따라서 (구체적) 기준도 말할 수 없다”며 조심스런 태도다. 특히 최근 이 대통령은 ‘친서민과 중도실용’을 강조하다 세종시 수정추진을 계기로 다시 ‘일방통행식 국정운영’ 조짐이 보인다는 공격을 받고 있는 입장이다. 이 회장에 대한 사면이 “서민들에겐 법과 원칙을 강요하고, 부자들에만 예외를 인정한다”는 여론을 자초할 수 있다는 것도 청와대 고민이다. 이르면 금주 중 이뤄질 이 대통령의 최종결정이 주목되는 것도 이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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