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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년 4월 29일 발생한 ‘4.29 LA폭동’은 미주한인 이민역사에서 최대수난 사건이다. 오는 4월 29일이면 폭동 발생 18주년이 된다. 본보는 지난 2003년부터 매년 특집기사로 4?29 폭동에 대해 게재해 왔으며 지난 2007년에는 창간 25주년 특집으로 4회에 걸쳐 ‘4.29 LA폭동의 어제와 오늘’이란 주제로 보도했었다. 이 같은 특집을 통해 1200만 달러에 이르는 폭동성금의 문제점도 지적한 바 있다. 최근 한인사회에서 4.29 폭동 성금과 관련해 갖가지 소문들이 다시 나돌고 있다. 문제의 출발은 지금까지도 4.29 당시 각계에서 모아진 성금의 정확한 액수가 밝혀지지 않았다는 점이다. 4.29폭동성금 처리를 두고 폭동 당시부터 여러 제안이 나왔다. 피해자들에게 즉시 지급하자는 안과 후대를 위한 기금조성안 등이 팽팽히 맞서다가 결국 성금관리위원회(한미구호기금재단의 전신)와 피해자단체들과의 추악한 분쟁으로 야기되기도 했다. 4.29폭동성금에 대한 진상은 18년 전 당시의 상항을 파악하지 않고는 이해하기가 힘들다. 하루아침에 운영하던 업체가 잿더미가 된 피해자들에게 성금은 그나마 큰 위로였다. 그들에게는 자신들에게 지급될 성금을 두고 제3자들이 나서 좌지우지 하는 것을 두고 볼 수가 없었다. 하지만 18년이 지난 오늘 ‘4.29폭동성금’은 기억조차 하기 싫은 의혹으로 얼룩져 있다. 4.29폭동 진상을 규명하자는 극히 일부의 사회운동가와 학자들 중에는 폭동성금 사용을 두고 “한인사회는 후세를 위한 중요한 커뮤니티 발전기금재단 설립의 기회를 영영 잃고 말았다”며 아쉬워하고 있다. 불과 20년도 앞도 내다보지 못했던 당시 한인 커뮤니티의 자화상이었다. 폭동성금 분배로 추악한 싸움이 계속되자 ‘LA폭동성금회수협의회’라는 단체까지 구성되어 “내가 낸 성금을 취소하겠다”고 분노의 목소리가 터져 나오기도 했다. 본보는 원래 오는 4월에 ‘4.29는 우리에게 무슨 의미를 주는가’라는 주제로 연재특집을 기획했었다. 하지만 최근 한인사회 일각에서 폭동성금과 관련해 근거없는 소문들도 나돌아 차제에 특집연재를 앞당겨 2012년 4.29폭동 20주년을 계기로 4.29폭동의 진상규명을 준비하는데 도움을 주고자 한다. <성진 취재부 기자>
(특집 기획 연재 ) (1) 잊혀진 4?29폭동’의 진실 (2) 4.29 폭동성금의 실상 (3) 한인정체성 확립과 4.29 (4) 4.29와 흑인민권운동 (5) 4.29와 미주한인사회

4.29폭동 성금 배분 때문에 동포사회가 한창 분탕이 일어났던 당시, 1992년 9월 2일자 한국일보 지면에 최재웅 편집위원이 ‘오늘의 논평’이란 난에 ‘성금 낸 사람들 분노’라는 제목의 글을 게재했다. <성금문제는 초장부터 ‘잘못 끼워진 단추구멍’이었다. 배를 타서는 안될 사람들이 선장 행세까지 했던게 비극의 씨앗이었다. (중략) 성금 하나 제대로 간수하지 못하는 이 민족의 고질병…우리의 이민사는 항상 상대방의 실책이 가져다 주는 반사이득으로 성장해온 패널틱 킥의 연속이었다. (중략) 선생은 많아도 스승이 없다는 세상-. 북녘땅 가족방문길에 비명횡사한 김계용목사는 “한국사람들은 ‘항아리속에 든 게와 같다. 서로가 항아리를 넘어가려 하지만 한 놈도 넘지 못한다. 설사 먼저 올라간 놈이라도 밑에서 끌어내리고 대신 타고 올라간 놈한테 다시 끌려 내려진다’고 개탄한 적이 있다. 방부제가 필요한 한인사회의 실상을 이처럼 정확하게 꿰뚫어 본 사람도 없었다.> 당시의 성금추태의 한 단면을 지적한 글이다. 4.29폭동성금의 마지막 단계의 관리를 담당했던 한미구호기금재단의 4대 이사장을 맡았던 이민휘 전 미주동포후원재단이사장과 5대 이사장을 맡았던 전주찬 전미래은행이사는 최근 본보 취재진과 만난 자리에서 “일부에서 우리가 폭동성금 125만 달러를 마지막으로 관리해 의혹을 만들었다고 제기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면서 “이번 계기에 4.29폭동성금에 관해 심판을 받겠다”고 밝혔다. 그들은 “일부에서 제기하는 사안은 역사적 사실과는 다른 것”이라면서 “잘못된 시각은 바꾸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취재진이 ‘성금관리를 담당한 당사자들로서 결과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라는 질문에 그들은 “도의적으로 책임을 면할 수 없다”고 말했다. 본보는 다음 호에 이들과 함께 역대 이사장들이 관여했던 사실을 바탕으로 성금관리 문제를 초장부터 보도할 계획이다.

1200만 달러 성금의 실체
지난 2002년 4월 29일 ‘4.29협회’(회장 홍사일)는 폭동 10주년을 기념해 ‘4?29폭동백서’(부제: LA소요사태의 조사 및 진실규명)를 발간했다. 이듬해인 2003년에는 “Victorious Out of the Ashes”라는 제목으로 4.29 백서의 영문판이 출간됐다. 이 두 권의 책은 4?29협회 홍사일 회장이 사재를 들여 발간했다. 이 책은 4?29 폭동의 진실을 규명하는데 교과서로 불릴 만큼 중요한 기록들이 담겨 있으며, 폭동과 관련한 각종 기록들을 수록해 한인사회의 유일한 보고서라고도 볼 수 있다. 발행자인 홍사일 회장은 ‘4?29폭동백서’의 발간 목적에 대해 ▲4?29폭동에 대한 정확한 인식으로 동포사회의 단합과 화합 ▲한국정부와 미국정부에 대해 한인들에 대한 바람직한 정책의 자료로 제시 ▲미국사회와 타 인종들에게 4?29폭동의 진실을 제대로 알리고 ▲우리 후세들에게 이민1세들의 노력과 가치관을 알리고, 그들이 미주류사회에서 올바르게 뿌리를 내리게 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러한 ‘4.29폭동백서’에 담긴 목표와는 다르게 여전히 4?29폭동의 진상은 지금까지 밝혀지지 않고 있다. 미국정부와 주류언론은 물론, 미국 내의 양심세력도 유독 4?29폭동에 대해서만큼은 침묵을 지키고 있다. 한인사회도 다르지 않다. 어떻게 보면 4.29를 기억하기 싫은 표정이다. 해마다 4?29 폭동 기념일이 돌아오면 한인사회에서 명색뿐인 기념행사만 벌어질 뿐이다. 폭동 당시 1,200만 달러라는 어마어마한 폭동 성금이 모아졌으나, 지금은 흔적조차 찾기가 힘들다. 이 같은 거액 성금은 미주한인 이민 역사상 4.29이전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흔치가 않을 것이다. 1992년 4월 29일 발생한 폭동의 잿더미에서 아직도 곳곳에 화마의 냄새가 가시지 않은 5월 1일, 당시 올림픽에 자리 잡았던 라디오코리아 사옥에서 ‘4.29폭동한인피해자협의회’라는 이름으로 이종원(당시 LA한인회장),이정(피해자),홍사일(피해자),임춘훈(당시 라디오코리아 앵커)씨 등이 모여 이정씨를 대표로 선임했다. 당시 라디오코리아는 개국 2년 차로 모든 광고방송을 제치고 폭동상황을 생방송으로 진행해 동포사회 여론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한편 LA총영사관의 박종상 총영사도 한인단체장들을 모아 4.29폭동긴급대책본부 구성을 제의하고 있었다. 이 당시 자연스럽게 피해자돕기캠페인이 일어나 한인 언론매체들이 성금을 모으기 시작했는데 특히 라디오코리아 방송과 한국일보가 경쟁을 하듯이 성금을 모았다. 라디오코리아, KTE(현재 KBS아메리카 방송) 등으로 들어오는 성금은 그대로 방송에 보도됐으며, 한국일보, 중앙일보 등에도 지면에 성금 기탁자와 액수가 보도됐다. 이 같은 폭동성금을 관리하기 위해 긴급대책위원회 산하에 성금관리위원회를 두기로 했다. 당시 처음 구성된 성금관리위원회에는 이정(피해자 대표), 김치현(한미식품상협회 대표), 전수웅(한인타운교민회 대표), 장봉섭(한인공인회계사협회 대표), 안종원(한국금융단 대표), 벤자민 홍(미주한인금융단 대표), 하기환(한인상공회의소 대표), 심항구(교회협의회 대표), 변승국(LA총영사관 부총영사) 그리고 라디오코리아, KTE, 미주한인방송, 한국일보, 중앙일보 등 언론사 등이 참여하기로 했다. 그러나 이 당시 한국일보측은 13인 성금관리위원회에 참여하기를 거부하고 단독으로 성금을 처리한다는 방침을 밝혀 성금관리위원회측과 갈등을 야기시켰다. 모든 언론사가 성금관리위원회를 단일 창구로 했는데 유독 한국일보는 성금관리위원회의 투명성을 이유로 참여하지 않았으며, 후에 단독으로 피해자들에게 500달러씩 지급하다가 나중 여론에 밀려 성금 잔액을 성금관리위원회에 이관시켰다. 특히 4.29협회에서 2003년도에 발간한 4.29폭동백서 영문판 부록에는 1992년 8월13일부터 9월7일까지 4.29폭동피해자협의회(당시 회장 이정)에서 1차와 2차에 걸쳐 지급한 2,500 달러 수표를 받은 폭동피해자들의 명단이 수록되어 있다. 당시 4.29폭동피해자협의회가 보관한 자료에 따르면, ‘일부 한인 언론사들이 모금한 성금에 의혹이 있다’면서 구체적이고 정확한 성금 기탁이 이뤄지지 않았던 사안들도 남아 있는데, ‘라디오코리아 방송의 경우 성금기탁을 보도한 당시 테이프 복사본을 제시하지 않았다’며 의문을 제기했던 자료도 나왔다. (다음 호에 계속)
4.29폭동으로 인생을 바꾼 사람들
4?29폭동 당시 UCLA병원에 입원해있던 이경원 원로기자는 TV중계로 비쳐지는 코리아타운의 불길을 보면서 1년 전 자신이 예언했던 인종폭동이 현실로 나타나는 모습을 보면서 눈물을 흘려야 했다. 당시 간에 이상이 있었으나 이식 수술이 기적적으로 성공해 세상 밖으로 나온 그는 언론인으로서 ‘4?29의 진실’을 규명하는 과제가 자신이 해야 하는 마지막 일임을 정했다. 4.29폭동이 발생한 이후 지난 18년 동안 이경원 원로기자는 80대 고령임에도 젊은 학생들이 초청하는 곳이면 어디든지 달려갔다. 그는 학생들 앞에서 미주 땅의 한인 이민100년 역사를 3설명하면서 절반의 시간을 4.29폭동 관련 이야기에 할애한다. 그는 4.29폭동의 역사가 바로 한인들의 역사인양 목소리를 높인다. “여러분! 당신들의 부모들이 이룩한 코리아타운이 불타고 있었는데, 소위 배웠다고 하는 양반들은 무엇을 했습니까! 하버드, 예일 또는 UCLA 등등에서 박사를 받은 그 많은 한인들은 어디에서 무엇을 했습니까!” “미국에서 고등교육을 받은 한인 엘리트들은 자신들의 학위와 명예 그리고 경제적 부를 추구하면서 자신의 가족에 대해서 생각하면서도, 한인 커뮤니티에 대해서는 무관심 했습니다” 그리고는 결론을 내린다. “왜, 한인들이 4.29폭동에서 희생양이 됐는지 알아야 하는 것이 아닙니까. 그 진상을 알아야 다시 그 같은 수난을 당하지 않을 것입니다!. 1세들은 언어도 불편하고, 이민와서 여러분을 교육시키고, 키우는데 희생하느라 주위를 돌 볼 겨를이 없었지 않는가. 이제는 여러분이 나서야 할 때입니다” 그가 이러한 강연을 통해 강조하는 것은 한인 1세의 미래가 바로 강연을 듣는 2세라는 점이었다. 이 원로기자가 하버드 대학에서 열린 학생모임에서 강연을 하던 때의 일이다. 당시 이 기자 앞 쪽에는 김도형 (Do Kim)이란 학생이 자리 잡고 있었다. 그는 3세 때 부모 따라 이민해 LA코리아타운에서 자랐다. 부모가 햄버거 가게에서 일하며 어려운 이민생활을 영위해 갈 때 그는 코리아타운에서 흑인과 라티노 학생 갱들을 보면서 자랐다. 코리아타운에서 중고등학교를 지내고 미국 최고의 명문대의 하나인 하버드 대학에 입학한 그는 주위의 학생이 대부분 백인 부유층이고, LA 지역의 저소득층 가정에서 온 입학생이 자신을 포함해 고작 4명이라는 사실에 큰 충격을 받았다. 그는 하바드 대학에서 ‘소수민족 사회학’ 강의를 듣던 중 이 원로기자의 강연을 듣게 됐다. 그 날 밤 김 씨는 이 원로기자를 자신의 기숙사 방으로 초청하여 밤새도록 토론을 벌였다. 이후 그는 하버드 대학에서 1993년 소수민족학 연구로 학사학위를 받았으며, LA로 돌아와 UCLA법대에서 2003년에 법학박사 학위를 받고, 캘리포니아 변호사 시험에도 합격했다. 하버드 대학 기숙사에서 TV로 4?29 폭동 장면을 시청했던 그는 UCLA법대를 다니면서 폭동피해자들의 재활을 위한 위원회에서 봉사활동을 했다. 또한 고등학생과 대학생을 상대로 재미한인 청소년리더십 프로그램을 운영했으며, 타인종과의 유대를 위한 ‘다인종 청소년 리더십 협회’도 창설해 사우스 센트럴의 흑인, 피코유니언의 라티노들과 연대하는 운동을 벌였다. 그는 또 한인상인들과 흑인고객들과의 분쟁을 해소하는 한?흑연맹의 위원으로도 활동했다. 그는 현재 코리아타운에서 개업해 저소득층들이 기업들로부터 당하는 고용차별, 성적학대 등등 인권문제를 다루는 변호사로 활동하고 있다. 도 감옥에서 부당하게 대우를 받는 수감자들의 인권 문제를 담당하고 있다. 이경원 원로기자의 강연 소리가 언제나 그의 귓가에서 쟁쟁하게 들렸기 때문이다. 지난 2005년 김 변호사는 자신과 뜻이 맞는 3명의 젊은이들과 함께 ‘이경원 리더십 센터’를 창설했다. 4.29폭동을 항상 주제로 하여 젊은 학생들에게 한인 정체성으로 지도력을 향상시켜 장차 한인 커뮤니티와 미국사회에서 지도력을 발휘케 하려는 취지였다. 고등학생과 대학생들을 대상으로 선발한 리더십 코스는 매년 방학 중 8주간 동안 주로 코리아타운의 문제점을 직접 체험하면서 한인 정체성을 터득한다. 이경원 원로기자로부터 영향을 받아 커뮤니티 봉사에 관심을 갖는 젊은이들이 지난 15년 동안에 하나 둘 생겨났다. 김도형 변호사도 이 중의 하나이다. 시카고, 뉴욕, 샌프란시스코, 휴스턴, 샌디에이고 등등에서 김 변호사와 같은 젊은이들이 커뮤니티를 위해 현재 남모르게 봉사하고 있다. 이경원 원로기자는 “이제는 전국에 퍼져있는 한인 젊은이들이 하나의 네트워크를 구축한다면 미주 한인들은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위치에 오를 수 있다”면서 “4.29의 진실을 규명하는데 이들이 큰 역할을 할 것”이라며 기대감을 나타냈다.
또 다른 폭동이 온다면…
4.29폭동을 잊지 못하는 여성이 있다. 미국에서 활동하는 독립영화인 김대실 감독이다. 그녀는 4.29폭동 관련 다큐멘타리만 2편을 제작했다. 김 감독은 93년에 제작한 ‘사이구(4.29)’ 1편에서 한인 여성 피해자들을 중심으로 조명했고, 4.29폭동 10주년을 기념해 “젖은 모래”라는 제목으로 2편을 제작했다. 2편은 폭동 10년 후의 한인과 흑인, 한인과 라틴계, 흑인과 라틴계의 변화와 갈등, 해결방안을 심층적으로 다룬 작품이다. 지난 93년 PBS를 통해 방영됐던 ‘사이구’ 1편은 폭동 피해 여성들과 인터뷰를 통해 미국 사회의 인종 및 계급갈등, 경제관계 등 복잡한 문제들과 법 시행상의 모순 등을 고발해 미 주류사회에 커다란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김 감독은 1962년 미국에 유학 간 이후 박사학위를 받고 마운트홀리케 대학 교수, 미 연방 인류국가기금과 뉴욕주 예술위원회에서 프로그램 디렉터로 일하다가 지난 88년부터 사재를 털어 독립영화인으로 활동하고 있다. 김 감독이 제작한 다큐멘타리의 특성은 ‘잊혀져 가는 역사를 우리 앞에 내놓는 것’이다. 지난 99년에는 한국위안부 기록 영화 `침묵의 소리’를 제작했고, 95년에는 강제징용된 사할린 동포 할아버지들의 삶을 그린 `잊혀진 사람들’을 만들었다. ‘사이구’ 영화도 마찬가지이다. 우리들이 쉽게 잊어 가는 역사를 알려 주기 위해서다. 그녀에게 ‘왜 다큐멘터리 영화를 만드는가’를 물었다. “나와 같이 숨을 쉬고 피가 흐르고.. 살고 있는 그 분들이 인간이라는 것, 압박 받는 사람들이 가난한 사람들이 다 똑같은 인간이라는 것.. 나에게 모든 어떤 것보다 중요해요” “이 사회의 주류인 백인들은 4.29폭동 당시 비벌리 힐즈의 뒤뜰에서 우리가 다툼을 벌이고 있는 것을 보고만 있었습니다. 그것이 제 마음을 가장 아프게 하는 부분입니다. 이래서는 안됩니다. 새로운 이민자들, 유색인종들, 그리고 흑인계 미국인들 모두가 뭉쳐야 합니다. 뭉쳐서 지금과는 다른 모습의 미국을 만들어내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가 깨닫지 못한 미국의 이면을 인식해야만 합니다” 4.29의 피해자의 한사람인 김동찬씨는 4.29폭동 10주년 때 이런 글을 적었다. “모든 TV 방송국에서 생중계 했던 폭동의 현장 중에는 나에게 잊혀지지 않는 장면들이 많다. 한 폭도가 전자상점에서 커다란 텔레비전을 훔쳐 나와 너무 무거운 나머지 차에 옮겨 싣지 못하자 경찰이 함께 들어주는 모습을 보고 나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물론 물건을 훔치는 걸 어차피 막지 못할 바에는 교통이라도 소통시키자는 ‘민중의 지팡이’가 가졌던 소박한 사명감을 이해해줄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그렇게 가볍게 보아 넘길 일이 아니다. 공권력이 폭동에 어떤 자세로 대처 했었던가를 보여주는 대단히 상징적인 사건이다. 그 순간, 그 혼란 속에서 일어났던 모든 범죄는 면죄부를 받았다고 나는 생각한다. 아니면 공권력은 폭동의 공범으로 비난 받아야만 한다” 누가 이 ‘한’을 풀어 주어야 한다고 생각하는가? LA시장도 “보상에 관심을 갖겠다” 했는데 정작 한인사회는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다. 진정 우리 한인사회가 ‘4.29’를 넘어서 가지 못하면 우리에게는 또 다른 폭동이 다가 온다는 역사의 교훈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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