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키리크스가 미국 외교전문을 대거 공개하면서 각국과 외교정책을 둘러싼 갈등이 드러나는 동시에 미국의 첩보활동에 대한 반발이 이어지고 있다. 먼저 CNN 방송은 29일 이번에 공개된 외교전문이 이란 핵 프로그램에 대한 미국과 터키 간 이견을 보여줬다면서 앙카라 주재 미국 대사관은 지난해 10월 이 문제로 터키의 고위 외교관과 격하게 충돌했다고 전했다. CNN이 인용한 전문에 따르면 당시 제임스 제프리 앙카라 주재 대사는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터키 총리가 이란의 핵개발 논란을 “잡담” 정도로 치부한 것과 관련,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그해 피츠버그 주요 20개국(G20) 정상회담에서 이란의 핵 야심을 비난한 문건을 손에 들고 페리둔 시니를리올루 터키 외교차관을 향해 “이것이 잡답이냐”고 언성을 높였다. 윌리엄 번즈 미 국무부 정무차관은 지난 2월 한 터키 관리를 만나 “이스라엘이 이란의 핵무기 확보를 막기 위해 군사행동을 취하거나 이집트와 사우디 아라비아가 자체적으로 핵무기 확보에 나선다면 터키의 국익을 침해할 것”이라고 경고하기도 했다. <데이빗 김 취재부 객원기자>
미 고위 외교관은 앞서 2005년 3월 보고에서는 “에르도안이 아주 적게 읽는데다 주로 이슬람 편향적인 기사를 본다. 그는 카리스마와 본능, 음모이론을 끌어내고 신(新)오토만 이슬람 환상에 사로잡힌 조언자들에 의존하고 있다”며 에르도안 대통령을 폐쇄적인 인물로 혹평했다. 이 같은 외교전문 내용은 힐러리 클린턴 미 국무장관과 아흐메트 다부토글루 터키 외무장관이 29일 워싱턴에서 만나 양국 우호관계를 강조한 것과 좋은 대조를 이뤘다.
외교갈등 조짐
첩보전을 방불케 하는 미국 측 정보 수집활동도 각국에서 외교 갈등으로 번질 조짐을 보이고 있다. 엑토르 라코냐타 파라과이 외무장관은 미 외교관들이 2008년 파라과이 대선 후보들의 생체정보 등 개인 신상을 수집하라는 지시를 받았다는 전문 내용에 대해 미국 측의 해명을 공식 요구할 것이라고 밝혔다. 라코냐타 장관은 “만일 이런 내용이 사실이라면 매우 심각한 내정간섭”이라고 지적했으며, 파라과이 외무부는 수도 아순시온 주재 미국 대사를 소환했다. 또 닐다 코파 볼리비아 법무장관은 외교전문 가운데 미 마약단속국(DEA)과 국제개발처(USAID), 일부 민간단체가 간첩 행위를 했다는 내용이 있다면서 “이제 우리는 그들이 볼리비아에서 무슨 일을 해왔는지 자세히 알게 됐다”고 비난했다.
코파 장관은 미 평화봉사단과 각종 보건기구들도 스파이 활동에 가담했다면서 “(미국 첩보활동 관련) 정보가 더 모이기를 기다렸다가 미 정부를 고소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나아가 영국 앤드루 왕자는 자국 부패방지국(SFO)과 기자 등을 험담해 논란이 일고 있다. 일간 가디언에 따르면 앤드루 왕자는 2008년 영국 통상대표 자격으로 키르기스스탄을 방문, 현지 외교관과 재계 인사들을 만난 자리에서 SFO의 활동을 “백치”로 평하고 뇌물수수 보도를 하는 기자들을 “어떤 일에나 간섭하는 이들”로 헐뜯었다. 앤드루 왕자는 이어 경제대국인 미국의 대(對)키르기스스탄 투자액이 영국의 투자 규모와 비슷하다는 점을 들어 “놀라울 것 없다. 미국인들은 절대 지리학을 이해하지 못한다. 영국은 세상에서 가장 뛰어난 지리학 교사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타티아나 펠러 키르기스스탄 미 대사는 이에 대해 앤드루 왕자가 “영국식의 무례한 말을 했다”며 대화 내용을 워싱턴에 자세히 보고했다.
외교 비화 불거져
위키리크스 폭로 후 외교 비화도 속속 불거지고 있다. 중국 베이징 미 대사관의 고위 외교관은 지난해 5월 낸시 펠로시 미 하원의장의 방문에 “끔찍이 겁먹었다”면서 중국 정부는 자국의 인권문제를 비판해온 펠로시 의장의 티베트 방문 요청도 거부했다고 보고했다. 또한 미 정부는 관타나모 수감자들을 받아들여 제대로 감시할 국가를 찾으려 무척이나 애쓴 것으로 나타났다. 뉴욕타임스(NYT)는 압둘라 빈 압둘 아지즈 알-사우드 사우디 국왕이 지난해 이 문제와 관련해 수감자들에게 말이나 매에 사용하는 전자칩을 심어 행적을 추적해야 한다는 ‘특이한 제안’을 했다고 보도했다. 이에 대해 존 브레넌 백악관 대테러담당 보좌관은 “말(馬)들은 좋은 변호사를 가질 수 없다”고 받아넘겼다고 NYT는 덧붙였다.
페일린, 위키리크스 폭로 관련 오바마 비난
미국 공화당의 차기 대권후보로 거론되는 세라 페일린 전 알래스카 주지사가 최근 위키리크스의 미국 외교전문 25만여건 폭로와 관련, 사태 예방에 최선을 다하지 않았다며 버락 오바마 미 대통령을 비난하고 나섰다. 페일린은 29일 자신의 페이스북에 게재한 글을 통해 “위키리크스 설립자인 줄리언 어샌지가 앞서 한번도 아닌 두번씩이나 문건을 폭로했는데, 그가 이토록 민감한 (외교) 문건들을 폭로하는 것을 막기 위해 정부는 어떤 조치를 취했냐”고 꼬집었다. 그러면서 최근 발생한 위키리크스의 미국 외교 문건 폭로를 계기로 “이같은 낭패를 다루는 오바마 행정부의 무능한 방식에 의구심이 든다”고 말했다. 또한 기밀 문건 유출의 재발 방지를 위해 백악관이 취하기로 한 조치들을 언급하며 “백악관은 왜 기밀 문건이 처음 폭로됐던 지난 7월에 이러한 조치들을 취하지 않았느냐”며 비난의 목소리를 높였다. 페일린은 이어 위키리크스 설립자 어샌지에 대해서도 비판을 가했다. 그는 “알 카에다가 발행하는 영문잡지 ‘인스파이어’의 편집장이 언론인이 아닌 것처럼 어샌지도 언론인이 아니다”며 “왜 그는 알 카에다 및 탈레반 세력과 똑같은 수준으로 추적당하지 않느냐”고 반문했다. 페일린은 또 이날 위키리크스의 사이트를 영구적으로 폐쇄시키기 위해 “사이버 수단”을 사용할 것과 위키리크스의 기술 제반시설을 와해시키기 위해 나토(북대서양조약기구), 유럽연합(EU) 등에 외교적 압력을 가하는 방안 등을 제안하기도 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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