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장희 씨 본지 발행인과의 인터뷰 “나는 4억 8천만원 저작권 침해 피해자”
이장희 씨는 본지 발행인과의 전화인터뷰를 통해 최근 불거진 신상호 한국음악저작권협회장과 전 매니저였던 김 석 씨와의 분쟁에 대해 심경을 토로했다.
그의 입장은 한마디로 “오랜 기간 속았다”며 “신 회장의 주장은 적반하장 격으로 나는 사실을 바로 잡고 싶었다”고 전했다.
다음은 이장희 씨와의 인터뷰 전문이다.
-최근 한국음악저작권협회 신상호 회장을 검찰에 고소하는 등 강경조치를 취한 것으로 알고 있다. 그 배경은 무엇인가?
“오랜 기간 지인으로 지내왔던 신상호 회장에게 저작권료 관리를 맡겨왔던 게 사실이다. 그런데 내가 알고 있던 것과는 달리 거액을 수령해 왔으며, 그 과정에서 알게 모르게 숨겨진 착복이 이뤄졌을 가능성이 노출돼 검찰에 고소를 하게 됐다.”
-신상호 회장과 매니저였던 김 석 씨의 주장은 이장희 씨의 주장과는 다르다. 구체적으로 이들의 주장 가운데 어떤 부분이 잘못됐다는 것인가?
“신 회장의 주장을 곧이 곧대로 믿는다면 저작권료가 월 1-200만원에 불과했고 많아야 500만원 대라고 들었다. 그런데 이번에 내역서를 받아보니 4억 8천만원이 넘는 거액이 출입금된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됐다. 하지만 신 회장은 일언반구의 언질도 없이 그 돈을 유용한 것이다. 김 석 씨는 고소대상이 아닌데 이 분쟁에 왜 끼여드는지 이해할 수 없다.”
-그렇다면 본인 스스로 저작권을 관리하지 않은 책임도 있지 않은가. 오히려 현 상황은 검찰의 조사를 받은 김 석 씨가 LA에서 역소송을 준비하는 등 발빠른 움직임을 준비하고 있는데 어떤 입장인가?
“가져간 돈의 일부라도 갚고 잘못을 인정했더라면 이러한 고소 사태까지 오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이 문제는 ‘한국음악저작권협회’의 부정부패와도 연결고리가 있어 끝까지 싸울 것이다. 신 회장의 경우 이번 케이스말고도 다른 분쟁사례가 많은 것으로 안다. 한국 음악인들의 저작권 보호를 위한 투쟁으로 생각하고 시시비비를 반드시 법정에서 가리겠다.”
-신상호 회장과 전 매니저인 김 석 씨는 3자 대면을 원하고 있다. 사실관계를 확인하자는 취지로 보여지는데 어떤 입장인가. 특히 김 석 씨의 경우 LA를 직접 방문해 폭로 기자회견을 갖는 등 발빠른 움직임을 갖고 있다.
“만나고 싶지도 만날 필요도 없다고 생각한다. 상호간의 합의는 없을 것이며 법의 심판대로 해결될 것이다. 다만 김 석 씨 개인에게는 특별한 감정이 없는데, 신상호 씨가 방패막이 삼아 그를 이용하는 것 같아 안타까울 뿐이다.” |
이장희 씨와는 두살 터울로 1949년생인 김 석 씨는 당시 속칭 ‘주먹 깨나 쓰는’ 시절을 거쳤으며, 우연히 알게 된 이장희 씨와의 인연은 “아직도 소중한 기억이다”고 토로했다.
“군대 입대를 앞둔 나에게 처음 먹어보는 돈까스를 사준던 형의 모습에 평생을 이 사람과 함께 하겠다는 마음을 굳혔었다”고 회고했다.
이어 군제대 후 이장희 씨의 제의로 이른바 ‘로드 매니저’ 역할을 자처하며, 누가 뭐래도 이장희 씨와 실과 바늘 관계로 오랜 세월을 동고동락해왔다는 것이다.
이를 반영하듯 김 석 씨가 소중히 간직해 온 여러 장의 사진에는 굳이 말하지 않아도 한 눈에 들어오는 두사람의 우정이 묻어나 있었다. 아울러 김 씨의 소개로 친분을 갖게 된 한국음악저작권협회 신상호 회장과의 다정했던 한때도 엿볼 수 있었다.
“사실 가수 이장희 씨는 30여년 넘게 음악계를 떠났던 인사로 이른바 ‘75년 대마초 파동’에 휩싸여 도미한 것 아닙니까”라고 언급하며 잠시 뜸을 들인 뒤 “그가 미국에 오기까지의 배경, 풀스토리 속에 제가 모두 개입돼 있습니다”고 전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제가 다 잘못한 일이고 그 때문에 뒤늦게 벌을 받는 것은 아닌가라는 생각이 듭니다”고 자성의 목소리를 토해냈다.
이장희 씨는 지난 1980년 가을 도미길에 올랐다. 세간에 알려진 것은 몬트리올에서 열리는 태평양 가요제에 가수 김태화 씨가 부른 ‘바보처럼 살았군요’가 초청받은 데 따라 작곡가 김도향, 가수 김태화 씨와 함께 제작자 이장희 씨가 캐나다행에 오른 것으로 전해진다.
그러나 김 석 씨의 주장은 달랐다. “평생 무덤까지 가져가려고 했던 비밀이었지만, 1980년 당시에도 이장희 씨가 대마초 혐의로 당국의 수사망이 좁혀오자 지리산 등지에서 은둔생활을 펼치던 중 캐나다 행에 올랐던 것이다”며 “사실 매니저인 내가 갈 자리를 양보해가면서까지 이장희 씨의 도미를 도운 바 있다”고 말했다.
이어 김 석 씨는 “당시 캐나다에서 일행과 함께 하루짜리 비자를 받고 뉴욕으로 건너갔다가 이장희 씨는 한마디로 미국에 눌러앉은 것이다”며 이장희 씨 미국 정착과정의 숨겨진 비밀을 폭로했다.
이미 LA에서는 잘 알려진대로 이장희 씨는 뉴욕에서 LA로 건너와 모 한인방송국에서 DJ 생활을 하던 중 영주권을 취득했으며, 이후 ‘로즈가든’이라는 라이브 뮤직바 형태의 레스토랑을 LA에서 경영했다. 하지만 로즈가든 운영 당시 이장희 씨는 끝내 마약류를 끊지 못했으며, 거의 매일같이 몇몇 지인들과 함께 ‘로즈가든’에서 폐인에 가까운 생활을 했던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이 당시를 어렴풋이 회고한 김 석 씨는 “LA로 우연히 놀러와 이장희 씨를 만나보니 이대로 ‘마약쟁이’로 냅둬서는 안되겠다 싶어 내가 다시 한국행을 주도했다”며 “이에 지난 1988년 귀국해 가수 김완선 3집의 ‘나홀로 춤을 추긴 너무 외로워’ 등을 프로듀서하는 등 재기의 발판을 마련해 준 것 또한 나다”고 주장했다.
김 씨는 “당시 지금은 이혼한 형수가 LA에서 돌아온 이장희 씨를 그리 달가워하지 않았다”며 “그 당시 형수와 아들, 딸이 대치동 은마 아파트에 살았었는데, 이장희 씨가 본가를 찾아갔다가 딸에게 ‘외간사람’이라며 문전박대를 당하는 해프닝도 옆에서 지켜봐야 했다”고 전했다.
이와 관련 김 씨는 “형수와 헤어지게 된 결정적 계기는 이장희 씨의 복잡한 여성편력 등이 끝까지 발목을 잡았다”며 “나는 끝까지 두사람이 잘 되길 바랬던 사람이다.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그의 바람기와 외도를 묵인했던 한사람으로 뒤늦게나마 참회의 심정이 간절하다”고 자성의 목소리를 담았다.
아무튼 지난 88년 다시 귀국길에 오른 이장희 씨의 한국 ‘연예계 복귀’는 소리소문 없이 실패작이 됐고, 이 씨와 김 씨는 새로운 사업구상을 위해 홍콩 여행길에 올랐다가 LA 방송국 설립을 추진하게 됐다는 설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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