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언론들은 처음 이 사건을 쇼킹한 뉴스로 한껏 달아 올랐으나, 그 후 김대중 정부와 노무현 정부의 ‘10년 좌파정권’에 의해 이 사건 수사는 진척을 보이지 않았고 오히려 깔아 뭉게는 상황이 전개됐다.
다만 일요시사가 지난 5월 <창간15주년 기획특집>의 일환으로 “피살된 재러 영사 최덕근”이라는 제목으로 이 사건을 새롭게 조명하면서 ‘진실은 어디에?’라며 “한국과 러시아 정부는 이 사건을 두고 외교상의 문제로 유야무야 시킬 가능성이 높다”고 보도했다. 이 잡지는 초기 수사의 초점은 북한의 소행일 가능성에 맞춰졌다고 보도했다.
최 영사가 사망 전 북한의 마약 밀매 동향을 캐기 위해 러시아-북한 경계지역이던 하산까지 가서 목숨을 건 첩보전을 벌인 사실이 알려진데 따른 것이다. 피살 당시 그의 주머니에서 나온 메모는 ‘북한 소행설’에 한층 무게를 실었다. 메모에 따르면 최 영사는 북한의 100달러짜리 위조지폐 유통경로를 역추적하는 과정에서 인근 나홋카의 북한 영사관에 상주하는 보위부의 정보망에 걸려들었다.
이 사실을 한국의 관계당국이 감지하고 신변안전에 주의를 당부했다. 하지만 최 영사는 추적을 중단하지 않았으며 거의 실체에 접근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에 따라 북한 측이 마약 및 위폐조직과 러시아 브로커의 노출을 우려해 공작원이나 청부업자를 매수해 살해한 게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됐다.
이에 러시아 수사당국은 북한 공작요원의 테러 가능성에 대해 집중수사를 벌였다. 한국 정부도 북한 측이 개입했을 가능성이 클 것으로 보고 러시아 정부에 북한 개입 여부를 철저히 수사해줄 것을 강하게 요청했다. 그러나 이후 안타깝게도 사건은 유야무야돼 버리고 말았다.
당시 러시아 당국의 무성의와 한국 정부의 소극적인 태도가 맞물린 결과였다. 특히 러시아 측은 지난 1998년 10월 한-러 영사국장 회의에서 1999년4월까지 최종 수사결과를 한국에 통보할 것을 약속했다. 그러나 지난 1999년 5월 김대중 전 대통령의 러시아 방문을 앞두고 돌연 통보 시일을 연기했다. 당시 김대중 정부는 한-러 정상회담 테이블에 이 사건이 의제가 되는 것을 피했다. 러시아 역시 반대할리 없어 양측의 이해가 맞아 떨어지면서 사건은 멀어저 갔다.
문제는 그 이후로도 러시아 당국이 최 영사 사건에 대한 수사결과 통보를 계속 미뤘다는 점이다. 한국의 김대중 정권도 독촉을 하지 않았다. 이러는 가운데 러시아는 최 영사 사건을 강력범의 소행으로 몰고 갔다. 이와 함께 사실상 수사를 종결처리 했다. 사건 초기 북한 측의 소행으로 추정됐던 최 영사 사건의 진상은 제대로 규명되지 않은 채 한-러 외교사의 뒤안길로 밀려나가고 있었다.
한심한 사태는 지난 2007년, 노무현 정권 말기에 이르러서는 러시아가 주러 한국대사관에 “수사 종결에 동의해 달라”고까지 요청하기도 했다는 것이다. 러시아 형법상 살인 사건의 공소시효는 15년이다. 당시로서 공소 시효가 4년 남은 사건에 대해 수사 종결을 서두르는 이유에 대해 러시아는 “본국 영토 안에서는 조사를 할 만큼 했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결국 영구미제사건으로 만들려는 속셈이 보였다.
이같은 러시아 측의 해명을 두고 당시 한국 사회에선 많은 말들이 오고 갔다. 우선 진상이 드러날 경우 러시아는 북한과의 외교단절까지도 생각해야 하지만 이는 러시아에 손해가 되기 때문에 수사 조기 종결 카드를 꺼낸 것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 됐다. 일각에서는 북한 첩보를 수집했던 최 영사의 특수한 직무 때문에 한국과 러시아 양국 모두에 ‘말 못할 사정’이 있다는 추측도 흘러나왔다. 또 이 사건에 연루된 러시아인들 때문에 진상이 밝혀지기 어렵다는 얘기도 있었다.
그러나 지금까지 거론된 ‘특별한 사정’ 중 어느 것도 이 사건의 진상 규명을 가로 막는 결정적인 요인으로 보기 어렵다. 설령 스파이 스캔들이라고 해도 개인의 일생을 파괴한 사건에서 범인을 지목하지도 못하고 조사를 끝내는 것은 국제관례와 상식에 맞지 않는다는 지적이다. 여기에는 당시 김대중-노무현 좌파정권이 북한을 건드리지 않으려는 속셈도 작용했으리라는 것이다.
결국 먼 이국땅에서 대한민국을 대표해 일했던 한 외교관의 죽음은 이제 사실상 영구 미제로 남게 됐다. 일요시사 특집 보도는 “공소시효를 꽉 채워 살인자의 형사 책임을 벗겨주는 선례를 남길 것인가라는 질책의 목소리는 15년이 흐른 지금도 여전히 울려 퍼지고 있다”고 지적했다.
영구미제 사건으로
본지가 수집한 자료에 따르면 당시 북한 측은 자신들의 사건 초기에 자신들의 관련설을 강력히 부인하기 위해 블라디보스톡에 3명의 관리를 파견해 항의까지 했었다. 또 정보계통인Eurasia in the 21st century 에서는 ‘북한이 당시 러시아 측이 한국에 갚아야 할 빚 대신으로 탱크와 전차 등을 제공하는 것에 반감을 표시하기 위한 수단으로 사건을 일으켰을 것’으로 분석하기도 했다.
한국의 국립과학연구소가 ‘독침’에 위한 살해로 귀결을 내렸어도, 러시아 당국은 계속 “머리에 심한 가격으로 사망했다”로 주장했다.
최 영사의 살해사건은 한국에서 1996년 10월 3일자부터 대대적으로 보도되었다. 사건이 국내외 로 파장이 커지자 갑자기 북한 측에서 뉴스가 터저나와 미국 언론들의 관심을 모으기도 했다. 북한은 그해 10월 8일 “1996년 8월 압록강을 건너 북한으로 들어온 미국인 에번 헌지커를 간첩 혐의로 체포했다”며 “남조선 안기부의 첩자로 북한에 들어왔다”고 발표했다.
예상대로 이 뉴스는 미국의 LA타임스 등 많은 언론이 보도했다. 하지만 간첩 혐의로 북한에 구속됐던 한국계 미국인 헌지커는 당시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의 특사로 11월 방북한 리처드슨 의원이 북측과 협상, 풀려났다.
북한이 8월달에 체포한 미국인의 구금사실을 이처럼 6주간이나 지체시켜 발표한 것은 바로 최 영사 사건을 희석시키려는 수작이라는 분석이 미국의 정보 소식통들로부터 나왔다.
살해된 최 영사의 대외직 명칭은 문화 담당관이었다. 버틸 린터가 쓴 “Blood Brother: Crime, Business and Politics in Asia”라는 책에서 언급한 것은 최 영사가 실제로 담당한 업무는 대북정보수집 이었고, 주로 북한의 마약밀매에 관한 사항을 수집하는 것이며, 이미 상당한 자료를 수집했던 것으로 미 정보 당국도 인지하고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최 영사의 살해사건은 김영삼 정권 말기에 발생했으나, 김대중 정권이 들어서면서 가능한 이 사건을 회석시키려는데 초점을 모았고, 노무현 정권에서는 아예 사건 자체를 없에버리려는데까지 갔었다. 결국 이 사건은 공소시효가 지난 10월 1일로 마감되어 영구미제가 되어버렸다. |